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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한때 그녀가 기자의 대명사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중들에게 '기자'란, 험한 현장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그곳의 모습과 그곳에서 나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왜곡하지 않고 똑바로 전달하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리고 기자 이진숙은 그 인식의 구체화, 형상화에 누구보다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전선기자로 1991년 1차 걸프전 당시 활약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2003년 그녀는 이라크전에서 또 한 번 대한민국의 전선기자로 미군과 영국군 연합군의 공습에 의해 피해를 입은 바그다드 시내의 현장을 대한민국에 보도했다.

"바그다드에서 이진숙입니다."

짧지만 강렬한 이 한 문장을 통해 전선기자 이진숙은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며 '기자의 표본'이 되었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렀다.

강산도 변하게 하는 10년, 그녀도 많이 변했다

MBC 김재철 사장과 이진숙 기획조정본부장(자료사진)
 MBC 김재철 사장과 이진숙 기획조정본부장(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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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도 변하게 하는 10년 세월. 그 사이 그녀는 많이 변해있었다. 전선기자라는 타이틀은 내려놓고 그 대신 MBC '홍보국장', '기획홍보본부장'이라는 감투를 머리 위에 썼다. 그리고 그녀는 과거 자신이 했던 말,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실천했던 행동을 뿌리부터 흔들며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현 정권 들어 MBC에는 크고 작은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닥쳤다. 임기를 시작하면서부터 '큰 집'에 불려가 '조인트'를 맞은 김재철 사장은 철저하게 정권의 입맛에 맞게 MBC를 움직였다. 정권에 비판적인 방송은 시간대를 옮기거나 폐지하며 무력화시켰고, 이에 반발하는 PD와 기자, 아나운서 등 내부인력은 징계의 칼을 들이대며 입을 다물게 했다.

그 결과 두 차례 큰 파업이 일어났고, 그 중 한 번은 1992년 군사정권 시절에 있었던 '50일 파업'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길게 진행됐다. MBC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기자, PD, 아나운서, 기술인력 등 직종을 가리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가 훼손되다 못해 땅에 떨어져 버린 방송의 공정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노조의 움직임에 사측은 철저하게 강경대응으로 일관했다. 공정방송을 위한 노조의 파업을 정치적 파업으로 규정하며 '불법'의 굴레를 뒤집어씌워 끝내는 집행부를 경찰에 고발했고, 파업을 중단하고 회사로 복귀한 이들에게 해고, 대기발령 등 무차별적인 징계를 단행했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언제나 이진숙,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사측의 편에 서서 김재철의 입이 되어 그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녀는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 등에서 노조의 파업은 불법이고 정치적인 의도를 가졌으며, 자신들은 공정방송, 공정보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고 주장했다. <PD수첩>의 '한미 FTA' 편 방송 불발과 <뉴스데스크>의 전두환 전 대통령 육군사관학교 생도 사열 논란 단신 처리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뉴스 밸류'에 대한 가치판단과 시각 차이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기자생활을 하며 진실을 위해 발로 뛰며 시시비비를 가려왔던 그녀였지만 김재철 사장의 배임과 횡령 의혹에 대해선 어쩐 일인지 "노조가 그 건에 관해 경찰에 고발했으니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면 된다"는 식으로 한 발 물러났다. 노조가 주장하는 불공정 사례에 대해서도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고 대답하며 "결국에는 더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는 애매한 말로 넘어갔다.

그녀가 그렇게 김재철을 대변하는 사이 MBC는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까지 추락했다. 방송사를 대표하는 메인 뉴스인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은 반토막이 나 사장의 입에서 시간대를 옮기라는 말까지 나왔고, 광고매출은 1천억원이나 떨어졌으며, 신뢰도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MBC는 지상사 3파 가운데 꼴찌를 차지하는 불명예를 얻었다. 이 모든 것이 김재철 사장 취임 이후 벌어진 일인데도 이진숙은 그를 감싸는 데 급급했다.

정수장학회 파장으로 다시 떠오른 이름 '이진숙'

▲ 정수장학회, 대선판 쟁점으로 '부상' 서울 중구 정동의 굳게 잠긴 정수장학회 사무실 문의 모습.
ⓒ 연합뉴스

그리고 며칠 전, 파업 중단 이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던 그녀의 이름 석 자가 다시 언론의 헤드라인에 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MBC의 지분 30%를 보유하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최필립 이사장과 이진숙 MBC 기획홍보본부장, 이상옥 MBC 전략기획부장이 지난 8일 모여 정수장학회의 지분 매각을 논의한 사실이 <한겨레신문>을 통해 보도된 것. 그들이 나눈 대화 전문이 보도되면서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대화록을 통해 살펴본 결과 이진숙은 그날의 회동을 조율하는 위치에 있는 듯했다. 최필립 이사장이 지분 매각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상옥 전략기획부장이 그것에 대해 답변하는 가운데 그녀는 일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최필립 이사장에게 부연 설명하는 동시에 이상옥 전략기획부장의 의견에 더하거나 빼는 식으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그녀는 지분 매각 계획 발표 방식에 대해 "요란하게 할 필요 없고 지나가는 말로 그냥 해버리는 게 나은 거 아니냐"는 최필립 이사장의 말에 "정치적으로도 임팩트가 크기 때문에 그림은 괜찮게 보일 필요가 있다"고도 말했다.

논란이 확산되고 그 불똥이 대선정국으로까지 번지자 그녀는 "정치적 의도 없이 한 얘기"라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림이 괜찮게 보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일까? 그 그림이 누구에게 괜찮게 보여야 하고 그로 인한 이익을 누가 얻게 되는지는 구태여 입 아프게 떠들지 않아도 이번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노조의 파업을 정치적 목적을 가진 파업이라 비난했던 그녀가, 자사 지분 매각에 관한 논의를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에 보고하지도 않고 진행한 점에 대해 대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라크전 당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오로지 진실된 보도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녀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 진실에 눈을 감고 공영방송 MBC의 기획홍보본부장이라는 직함을 잊어버린 채 김재철 한 사람의 입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

다시 그녀가 기자 이진숙으로 돌아오길 바라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일까? 그래도 소망해본다.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진숙을 기억하는 한 사람의 시청자로서 말이다.


태그:#이진숙, #정수장학회, #김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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