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2년 전 여름, 서른한 살의 나이. 이미 피폐해진 몸과 마음에 새 봄이 찾아왔다. 새로운 연애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연애 한 달 만에 이 남자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연애 1년 1개월 만에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콩깍지가 씌워져 있었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철없이 결혼을 맞이했다.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듯, 경춘선 복선전철이 뚫렸다. 많은 관광객들이 닭갈비를 먹겠다고 춘천에 찾아들었고, 소양강 처녀상 앞에서도 단체사진을 찍는 이들이 늘어났다.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투자자들도 몰렸다. 서울경기지역 사람들이 재개발 아파트와 역세권 아파트를 대거 구입했다. 전세값이 올랐고, 신혼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 버렸다. 수도권과의 교통망이 좋아져 마냥 좋아했건만, 집 없는 사람에게 서러움을 주는 후폭풍이 올 줄이야.

"우린 가진 게 없잖아"

나는 '삼포세대(연애, 결혼, 자식을 포기한 청년세대)'를 부정하는 처자였다. 시민단체에서 장기간 일하고 있었고, 남편도 그러해서 우리는 웬만하면 꿈을 집어먹고 살 강건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회가 피폐해져도 사랑으로 이겨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신혼집 구하기는 만만치 않았다.

방 두 칸짜리 깨끗한 집을 예전에는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같은 가격에 허름한 반지하 방들만 소개되었다. 부동산 중개업자와 집을 찾아나서는 길이 답답하고 우울했다. 2~3주 집구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사랑은 웬 말, 우리는 서로에게 은근스레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부모들은 우리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다. 우리는 그걸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문제가 걸리자, 여성운동을 한다는 내가 치졸하게 '남자는 집, 여자는 살림살이'라는 구시대적인 결혼 공식을 한번쯤 생각하게 되었다. 얼마나 속물적이었나 스스로 자책하면서. 그때 남편이 지나가며 자포자기 심정으로 한 말이 생각난다.

"어떡해… 우리는 가진 게 없잖아."

나도 결혼과 동시에 '집 같은 집'을 꿈꾸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 '집 같은 집'이라는 것을 소위 TV에 나오는 작지만 아담하고 깨끗하고 누구에게 소개해도 누추하지 않을 그런 집 정도로,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 '집 같은 집'은 너무 비쌌다.

드디어 집을 구하다

집 앞 산책로를 나오면 소양강 물안개를 볼 수 있다. 강바람이 매서울때도 있지만, 이 작은도시라 느낄 수 있는 여유인듯.
▲ 집 앞 풍경 집 앞 산책로를 나오면 소양강 물안개를 볼 수 있다. 강바람이 매서울때도 있지만, 이 작은도시라 느낄 수 있는 여유인듯.
ⓒ 이선미

관련사진보기


드디어! 집을 구했다. 꾸역꾸역 아파트가 들어차 있지 않고, 강을 따라 산책로가 있고, 남편이 농사짓는 외곽과도 연결도로가 있어 오가기 쉬운 곳이었다. 집주인은 수원 사람이었다. 우리는 집주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투자 목적으로 관리하는 집이었다.

집도 널찍하고 좋았지만 싱크대는 자취방 수준으로 개수대가 한 칸이었고, 화장실에 세면대가 없었다. 집주인에게 용기를 내어 둘 중에 하나만이라도 손을 봐달라고 말했다. 집주인은 돈이 없다며, 집 관리가 너무 힘들다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거절했다. 괜스레 눈물이 났다.

'그래도 신혼집인데….'

마음 한 켠이 싸했지만, 이 감정을 남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속상해 할테니까. 세면대는 우리 돈을 들여 시공했고, 싱크대는 1년 뒤에 집주인이 사정이 좋아졌는지 새로 놔주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국민임대에 들어가자

이 집에서 1년 반을 지내고, 국민임대아파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출산준비가 한창인데, 집걱정을 다소 덜게 되어 다행이다.
▲ 아기옷 빨래 이 집에서 1년 반을 지내고, 국민임대아파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출산준비가 한창인데, 집걱정을 다소 덜게 되어 다행이다.
ⓒ 이선미

관련사진보기


춘천의 임대아파트는 퇴계동 쪽에 몰려 있다. 퇴계동에는 넓은 평형대 아파트와 임대아파트가 어우러져 있는데, 어떤 초등학교 학부모가 임대아파트 아이들과 반을 달리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떠돌았다. 우리는 그런 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다행히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임대아파트가 생겼다. 아기를 임신하고 있는 상태라 임대아파트 공고를 보고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평형대의 아파트에 지원할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속에 17평형 국민임대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다. 나는 작더라도 대도시에서 집 구하기 힘든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좋은 조건인지 생각하며, 그 집에 배치할 세간들을 줄자를 뽑아가며 이리저리 맞추고 있다.

춘천은 곧 대단위 물량의 아파트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집값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돈 있는 사람들에게는 1천, 2천 떨어지는 것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그 정도도 없으니까. 우리 또래의 친구들은 부모의 도움을 받거나, 무리한 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결혼생활은 헉헉대는 쳇바퀴가 되어간다. 그나마 직업을 구한 친구들의 경우이다. 직업을 구하지 않고서는 연애를 하기도 힘들다. 점점 삶의 무게는 몸을 짓누르고 있다. 바닥 끝까지.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아기 보육시설 때문에 당장은 도심에 살지만, 향후 춘천 인근 시골로 들어갈 생각이다. 남편이 일할때 트럭 뒤편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소리, 바람소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 여유로운 시골 아기 보육시설 때문에 당장은 도심에 살지만, 향후 춘천 인근 시골로 들어갈 생각이다. 남편이 일할때 트럭 뒤편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소리, 바람소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 이선미

관련사진보기


얼마 전 나보다 4살 아래 대학원 동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자기 친구들이 굶어죽지는 않을까, 밥은 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한다고.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요즘 애들은 너무 유약해'라고 생각했다. 입에 풀칠을 못하겠냐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하니 참 무서운 말이었다. 비정규직,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밥을 먹기는 하겠지만, 희망하는 삶을 꾸릴 수 없는 그 무력감은 입 안의 밥을 버석거리는 모래처럼 만들어버리겠지.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일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의 삶의 조건이 부정당하는 사회에서, 돈이 사람보다 먼저인 사회에서 '희망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내 몸을 자본주의 구렁텅이에 던져도 시원찮을 판에, 약간 생각 좀 하고 지킬 건 좀 지키고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예전에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를 읽고는 그냥 먼 이야기로 들렸는데, 나는 어느새 그 부동산 계급사회에 최하위 계층으로 편재되어 있었다. 세입자의 서러움을 느끼며, 나는 세입자로서 나의 정체성에 분노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에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어떠한 눈치와 요구도 받지 않고 내 몸을 편히 누일 집이 필요하다. 모두에게.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입니다



태그:#세입자, #신혼집 구하기, #부동산계급사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