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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매스미디어는 사라질 것이다."

루퍼드 머독의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수십의 언론사를 소유해 '미디어 황제'로 지칭되는 그조차도 언론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전망한다. SNS로 대표되는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하면서, 전통적인 언론의 역할을 대체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러나 언론자유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로 인식되며, 언론은 사실의 전달자로서 그 역할을 신뢰받는다. 이 같은 인식과 신뢰를 바탕으로 언론은 '선출되지 않는 권력'으로 기능한다.

선거를 통한 권력을 골자로 삼는 민주사회의 몇 안 되는 예외다. 그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정보원에 대한 접근, 사실을 전달하는 행위에 대한 한정적인 면책 등이 보장된다. 또 언론자유가 위태로울 때, 시민들은 그 수호를 위한 강력한 우군이다. 지난 여름, 우리사회를 들끓었던 '공정보도' 쟁취를 위한 언론인들의 연이은 파업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은 그 훌륭한 사례다.

하지만 모든 언론이 사실이라는 자신들의 최우선 명제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실수나 미필적 고의는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의도된 목적 아래에서, 언론은 스스로의 생명과 다름없는 가치를 훼손시킨다. 즉 언론은 민주사회의 '양날의 검'이다. 이러한 이중성으로 말미암아 시민들은 언론의 수호자이자, 경계자로서 모순된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오도된 사실을 주춧돌 삼은 사회는 붕괴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김연수 옮김, 민음사 펴냄)는 언론에 의한 사실왜곡을 고발하는 소설이다. 문학사가 아르놀트 하우저는 "현실을 충실하고 올바르게 묘사하는 모든 정직한 예술가는 본래적으로 그 시대에 계몽적·해방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소설은 무엇보다도 이에 충실하다. 한 평범한 인물이 황색저널리즘에 의해서 피폐해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앞서 언급된 언론의 이중성을 환기시킨다.

언론에 의한 사실왜곡, 그리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그녀는 발터 뫼딩 경사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그는 마침 사적인 이유가 아닌 직무상의 이유로 아랍 족장으로 분장을 하고 있던 참이다. 그녀는 놀란 뫼딩에게 조서를 작성하라며 진술한다. 자신이 낮 12시 15분경 자기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으며, 뫼딩이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그를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했고, 그녀 자신은 12시 15분에서 저녁 7시까지 후회의 감정을 느껴 보기 위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했지만, 조금도 후회되는 바를 찾지 못했노라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체포해주길 부탁하며, "사랑하는 루트비히"가 있는 그곳에 자신도 기꺼이 있고 싶다고 말한다. - 본문, 11~12쪽

독자들의 질문을 유발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카타리나 블룸은 왜 기자를 살해했는가? 어째서 살인 이후에 일말의 후회도 느끼지 못하는가? 지난 며칠 동안, 경찰은 그녀를 심문했었다. 카타리나가 은행 강도 혐의자인 루트비히 괴텐의 정부일 거라는 의심 때문이다. 실은 댄스파티에서 만난 두 사람이 하룻밤을 지냈을 뿐, 그녀는 괴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치근거리기만 하고, 다정함이 없었던 전 남편과의 이별 이후에 자신이 갈구하던 감정을 처음 느끼고 사랑에 빠졌을 따름이다.

경찰은 댄스파티 이전부터 괴텐을 미행했었고, 다음날 아침에 카타리나의 집에 들이닥쳤지만 그는 사라진 뒤였다. 그녀는 경찰에게 괴텐의 행방을 추궁받기 시작한다. 문제는 언론이 이 상황을 보도하면서 불거진다. 수사가 막 발걸음을 땠는데도, 1면에 그녀의 사진과 실명이 버젓이 실린다. 특히 유력지인 <차이퉁>이 사실왜곡에서 비롯된 언어폭력을 카타리나에게 쏟아낸다.

1년 반 전부터 수배 중이던 강도이자 살인자인 루트비히 괴텐은, 가정부 일을 하는 정부 카타리나 블룸이 그의 흔적을 없애고 도주를 눈감아 주지 않았더라면, 어제 잡힐 수도 있었다. 경찰은 블룸이 오래전부터 이 음모에 연루되어 있었다고 추측한다. - 본문, 38쪽

살인범의 약혼녀 여전히 완강! 괴텐의 소재에 대한 언급 회피! 경찰 초비상! - 본문, 41쪽

이제 카타리나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심지어 <차이퉁>은 그녀의 지인들과 한 인터뷰를 입맛대로 수정하며, 카타리나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카타리나는 매우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는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다"로, "카타리나가 과격하다면, 그녀는 과격하리만치 협조적이고 계획적이며 지적입니다"는 "모든 관계에서 과격한 한 사람이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군요"로 뒤바뀐다. 카타리나의 어머니, 카타리나를 가사 관리인으로 고용하고 변호를 맡아준 블로르나 부부 등도 <차이퉁>의 왜곡된 보도에 의해서 곤경에 빠진다. 개개인의 평화로운 삶들은 비틀린 펜에 의해서 철저하게 난자당한다.

결국 괴텐이 붙잡히고, 그의 증언 덕분에 카타리나에 대한 의혹이 사라진다. 애초에 괴텐은 은행 강도나 살인 같은 흉악범으로 지목되었지만, 그 역시도 탈영, 금고탈취, 무기절도 수준의 범죄자로 밝혀진다. 그녀와 그 주변에게 지옥 같았던 며칠은 끝났지만, 카타리나의 명예는 사라지고 없다. 성실함과 총명함으로 존중받던 카타리나 블룸은, 어느새 '강도의 정부, 창녀, 빨갱이' 따위의 멍에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차이퉁>을 비롯한, 어떤 언론도 자신들의 잘못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내가 기자들의 술집에 갔었던 것은 그저 그를 한 번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인간이 어떻게 생겼고, 행동거지는 어떠하며, 말하고 마시고 춤추는 모습은 어떤지 알고 싶었습니다. 내 삶을 파괴한 바로 그 인간 말입니다 (…)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이, 귀여운 블룸 양, 이제 우리 둘이 뭐하지?'라고요. 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거실로 물러나며 피했지요. 그는 나를 따라 들어와서는 말했어요. '왜 날 그렇게 넋 놓고 보는 거지? 나의 귀여운 블룸 양, 우리 일단 섹스나 한탕 하는 게 어떨까?' (…) 그렇지만 이자는 '섹스나 한탕 하자'고 했고, 그래서 난 생각했던 겁니다. 좋다, 지금 총으로 탕탕 쏘아 주마. - 본문, 140~141쪽

카타리나는 그녀의 명예를 앗아간 <차이퉁>의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찾아간다. 하지만 잃어버린 명예에 대한 사과는커녕 모욕과 조롱이 이어진다. 그 분노에 대한 앙갚음과 사랑하는 괴텐의 곁(형무소)으로 가기 위해서 카타리나는 베르너 퇴트게스를 살해하고 만다. 이후의 이야기는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카타리나는 후회의 감정을 느끼고자 시내를 배회했지만, 그것을 조금도 찾지 못하고 경찰에게 스스로 찾아가게 된다. 소설의 출발에서 유발된 독자들의 질문은 그렇게 해답을 얻는다. 그녀의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카타리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혐오나 경멸이 아닌 연민일 따름이다.

우리 사회의 '무고한 카타리나'들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연유에는 조금의 우여곡절이 있다. 1971년, 독일의 소도시인 카이저스라우텐에서 은행 강도 사건으로 사망자가 발생한다. 독일에서 선정적인 언론으로 손꼽히는 일간지 <빌트>가 이를 바더 마인호프 그룹에 의한 것으로 보도했는데, 제대로 된 사실 확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더 마인호프 그룹은 68학생 운동에서 만들어진 과격 테러 조직이다. 일련의 상황에 대해 뵐이 주간 <슈피겔>에 <빌트>의 보도태도를 비판하는 글을 싣자, 그와 <빌트>지 사이에 논쟁이 진행된다. <빌트>와 그 계열사 언론들은 지면을 통해서 작가에 대한 인신공격과 사실왜곡을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테러조직을 옹호하는 것으로 오해된 뵐은 197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전까지 온갖 협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이러한 작가의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사실왜곡에 의한 언론의 폭력을 체감하고, 이를 비판하기 위한 소설이다. 글머리에서 뵐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 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라고 말하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어떤 맥락에서 소설이 쓰였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한국의 언론은 어떠한가. 9월 1일에 <조선일보>가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의 범인이라며, 모자이크 없이 1면에 특정인의 사진을 삽입했다가 물의를 빚었다. 사진 속 인물이 당사자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곧바로 정정보도, 피해자에 대한 피해보상이 다짐되었지만 오보로 인한 무고한 시민의 상처는 돌이키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번 달 11일에는 MBC가 새누리당 김근태 의원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기소를 전하면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사진을 내보내는 오보가 발생했다. 마찬가지로 정정보도와 유가족에 대한 사과가 이루어졌지만, 오보로 인해 잃어버린 명예가 그것으로 보상될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사회에 '무고한 카타리나들'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범죄자에 대한 언론의 신상공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시민이 왜 언론보도에 경각심을 지녀야하는지 확인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언론이 다양화되면서 특종경쟁이 불붙자, 오보에 의한 피해도 날로 증가추세다. 언론중재위원회의 '연도별조정중재신청 통계'에 따르면, 2011년 한 해 동안 총 2124건의 조정사건이 접수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2007년의 1043건보다 두 배로 증가한 수치다. 민·형사상의 소송을 제외하고, 개인이 언론에 의해서 입은 피해를 구제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피해구제 중 절반에 육박하는 44.8%는 취하건의 수치인데, 일반적으로 정정보도나 인터넷 기사 삭제에서 마무리된다. 돈으로 피해를 보상받는 손해배상청구사건 조정액의 경우에도 평균이 215만원에 그친다.

선거보도를 향한 시민의 성찰과 감시가 필요할 때

사실 언급된 사례나 통계는 소설 속 <차이퉁>의 경우처럼 의도된 사실왜곡이라 지적하기는 어렵다. <조선일보>와 MBC가 보여주듯, 대부분의 오보는 실수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이 사실왜곡에 있어서, 언론의 의도성을 의심하는 보도가 있다. 바로 지난 총선과 앞둔 대선에서 쓰였고, 쓰이고 있는 선거보도다. 선거보도의 경우 늘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6월 20일, 언론중재위 산하 선거기사심위위원회는 지난 총선의 선거기사 심의결과 107건에 위반이 적발됐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이 중에서 57.9%를 공정성 및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유형으로 분류한다.

검증이라는 미명아래에서,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아니면 말고' 식의 부정확한 보도가 대표적이다. <뉴스타파>는 28회에서 MBC가 단독 보도한 '안철수 후보의 박사학위논문 표절 의혹'을 비판한다. 우선 표절되었다고 화면에 제시된 논문부터 동명이인의 것이라는 지적이다. 10줄에 걸친 표절의혹 부분을 3쪽 분량으로 비약한 부분도 확인됐다. 또 학술적인 의혹이 핵심인 보도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에 의한 검증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담당기자는 실수라고 해명했지만, MBC노조는 언론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반증이라며 책임자 퇴진을 요구중이다.

위원회의 통계에 직접 해당되지 않지만, 특정 사건을 부각함으로써 선거구도의 변화를 도모하는 이른바 '북풍' 논란이나, 정책보다 판세를 조명하는 경마식 보도 등도 그 위험성은 마찬가지다. 언론은 독자들에게 명확한 사실전달을 통해서, 올바른 투표권 행사를 도와줄 의무가 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공익을 위해 사용될 때에만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선거보도의 사실왜곡에 엄정한 잣대를 세우는 일이 어렵다는데 있다. 예컨대 어디까지가 사생활 침해인지, 도덕성 검증인지 분별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논란이 확대재생산 되면서, 선거보도의 문제점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은 외면받기 쉽다. 지난 11일, 언론개혁시민연대 주최로 '대선보도 이대로 안 된다' 주제토론회가 열렸다.

여기에 참여한 언론학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대선을 앞두고 저널리즘의 원칙이 무시된 선거보도가 위험수위"라며, "SNS을 비롯한 수평적 대안저널리즘이 그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시민의 역할이 중요하다. 개개인마다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를 수용할 때, 비판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공론의 장에서 선거보도에 대한 토론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감시가 지속돼야만 근원적인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언론의 사실 왜곡이 삶을 얼마만큼 피폐케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어떤 개인에 국한된 범위라면,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성찰해야하는 선거보도의 결과물은 우리사회 전체와 그 미래까지도 좌우할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명예를 잃어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민음사 펴냄, 2008년 5월, 7500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민음사(2008)


태그:#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선거보도, #언론의 사실왜곡, #언론의 공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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