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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의 할아버지가 친일 여부 논란으로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미리 하나 전제해둘 것은 그 대상이 누구든 친일 혐의가 있으면 진위 여부 등을 두고 논란의 대상이 되는 건 자연스럽고 응당한 일이라는 점이다.

12일자 <한겨레>는 안 후보 조부의 친일 논란을 다뤘다. 그동안 <한겨레>는 '2012 대선주자 탐구'라는 타이틀을 달고 주요 대선후보들의 검증작업을 해 왔다. 이날 <한겨레>는 안철수 후보를 8~9면에 걸쳐 다뤘는데 문제의 기사는 9면의 '가족관계' 꼭지에 실려 있다.

 한겨레 신문에 보도된 안철주 대선후보 조부 관련 기사.
 12일 <한겨레>에 보도된 안철수 대선후보 조부 관련 기사.
ⓒ 한겨레

<한겨레> 석진환 기자가 쓴 '할아버지 일제 때 금융조합서 일해…친일여부 논란' 제하의 이 기사는 안 후보 집안의 높은 학력수준(특히 의료계 인사가 많음)을 소개하면서 3대에 걸친 가계도도 곁들였다.

안 후보의 조부 안호인(1906년생)씨의 '친일' 논란은 그의 학력과 경력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언급된 것으로, 작년 9월 안 후보 아버지가 <여성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 인터뷰에서 안 후보의 아버지는 "아버지는 일본강점기에 금융조합에서 일을 하셨어요. 그 시대에도 교육을 많이 받으신 편이라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셨는데, 그때는 일본인이 지점장을 하던 시절이라 해방된 후에야 농협지점장을 지내셨죠"라고 말했다.

그런데 해당 기사에서 안 후보 캠프의 금태섭 상황실장은 "현재로선 안 후보 할아버지께서 일본강점기 금융조합에서 일했는지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면서 "안 후보 할아버지께서는 경남 사천 쪽의 '조선미창'에서 퇴직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제 당시 '금융조합'은 어떤 곳이었나

그렇다면 이 사안의 핵심은 두 가지라고 본다. 첫째, 일제 당시 '금융조합'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며, 둘째, 안 후보 조부의 직책(직위)로 볼 때 그를 친일파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간 나온 연구 성과와 친일파 판단기준 등을 종합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일제하 '금융조합'은 현 '농협'의 전신으로, 근대식 금융기관으로 출발했다. 1906년 '은행조례' 공포로 설립된 농공은행이 농촌 금융 문제를 제대로 다뤄내지 못하자 농촌 금융을 전담할 새로운 금융기관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듬해 1907년 5월 '지방금융조합규칙'과 '지방금융조합 설립에 관한 건'이 공포되면서 '금융조합'이 등장했다.

그 후 1914년과 1918년 관련 법령 개정으로 농촌과 도시에도 금융조합을 설치하고 각 도 금융조합연합회를 결성했다. 1918년 6월 '금융조합령'이 제정되면서 지방금융조합도 금융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1945년 해방 당시 전국에는 총 912개의 금융조합이 있었는데,  해방 후 1956년 농업은행이 설립되면서 금융조합은 자취를 감췄다.

 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가 11일 오전 대전광역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방문하고 나오며 취재진에 소감을 밝히고 있다.
 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가 11일 오전 대전광역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방문하고 나오며 취재진에 소감을 밝히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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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당시 금융조합은 군(郡) 단위에는 1개소, 그보다 규모가 큰 시(市)나 대도시에는 여러 개의 점포를 두고 있었다. 참고로 마산시의 경우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을 비롯해 신(新)마산과 구(舊)마산에 각각 금융조합이 하나씩 있었다. 당시만 해도 큰 도시였던 마산에는 이들 외에도 농민을 대상으로 한 내서금융조합과 사금융(私金融)인 마산금융회사 등도 있었다.(허정도 글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참조)

서민금융기관으로 출발한 금융조합이 '친일'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일제당시 금융조합 본래의 취지인 '농촌 금융' 차원을 넘어 농민들을 착취하는 수탈 기관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금융조합 연구의 드문 명저인 <일제하 금융조합 연구>(혜안, 2002)를 펴낸 이경란은 이 책에서 일제 당시 금융조합의 반서민적 행태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대한제국 정부는 농민의 궁핍을 줄이고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소농(小農)이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금융기구를 만들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1907년 '금융조합 규칙'을 제정했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금융조합은 상층 농민과 지주가 혜택을 입는 기구로 바뀌었다. 담보물을 제공할 수 있는 자에게만 돈을 빌려준 것이 그 한 예다.

그러다가 1910년 한국이 병탄되고 총독부가 들어선 뒤로 금융조합은 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1910년대에는 지주 중심의 농업개량 정책을 수행했으며, 1920년대에는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또 1930년대에는 농촌진흥운동의 성공에 협력했고, 중일전쟁 이후 국가총동원체제 하에서는 농촌과 농민의 생산력을 전쟁에 총동원하는 데 앞장섰다. 

물론 금융조합을 일진회, 국민총동원연맹, 대화동맹 등의 어용 친일단체로 규정짓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오히려 산림조합과 같은 총독부 산하기구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앞에서 소개했듯이 금융조합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하수인으로 부린 격이니 그곳에 근무했던 조선인들의 경력은 그리 자랑스러울 것은 못 된다.

안 후보의 조부, 당시 무슨 직책을 맡았나

다음, 안 후보 조부의 당시 직책(직위) 건이다.

<한겨레> 기사에는 안 후보의 조부가 금융조합 근무 당시 어떤 직책을 맡았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안 후보 아버지가 <여성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때는 일본인이 지점장을 하던 시절이라 해방된 후에야 농협 지점장을 지내셨죠"라고 한 대목을 두고 일부 블로거들은 "상당한 고위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겨레>는 썼다.

금융조합은 기관장인 조합장과 그 아래 이사, 그리고 몇 명의 직원을 두고 있었다. 오늘날 농협 지점장격인 조합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이사와 직원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안 후보 측에서 아직 관련 자료를 내놓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추정컨대 안 후보의 조부는 금융조합의 '직원'으로 근무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 이유는 금융조합 이사는 '상고 출신'이 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데 있다. 명사 가운데 금융조합 이사 출신이 몇 사람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역사 앞에서>라는 책을 쓴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 1913∼1951)이다. 1937년 경성법전(서울대 법대 전신격) 졸업 후 그는 한동안 전남, 경북 등지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지냈다. 또 일본 중앙대 법학과 출신으로 7선 의원을 지낸 이재형(李載灐) 전 국회의장도 경남, 경기 등지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지냈다.

그런데 일제 당시 '금융조합 이사'는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가 선택 가능한 최고의 직업 가운데 하나로 불렸다(물론 '최고'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판검사나 군수로 나가는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인 청년들의 선호도가 높았던 만큼 일제에 포섭되거나 하수인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을 자신의 처세로 보여준 사람이 있다. 대성그룹 창업자 김수근(金壽根, 2001년 작고) 회장이 그렇다.

 고 대성그룹 김수근  명예회장
 고 대성그룹 김수근 명예회장
ⓒ 연합뉴스
1939년 일본대 법학과에 입학한 김수근은 재학 중 조선총독부 재무국에서 실시한 금융조합 이사 시험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했으며 1943년 대학 졸업 후 경북 영주 금융조합 부이사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금융조합 이사 출신 가운데는 이재형 전 국회의장처럼 해방 후 정계로 나간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그는 자신이 일제 때 금융조합 이사를 지낸 것을 '속죄'하는 의미에서 산업계로 진출해 기업을 일구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우선 금융조합 이사는 적어도 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이 있어야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 당시 금융조합 이사는 고등문관시험에 떨어진 대졸자들이 차선으로 보는 시험이었다고 전해진다.

군수나 경찰서장 같은 지방 공기관의 기관장은 아니라고 해도 지역의 '돈줄'을 쥐고 있어서 관내에선 대단한 실력자였다고 한다. 따라서 금융조합 이사도 당시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금융조합 이사도 친일파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안철수 후보의 조부가 '금융조합 이사'를 지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다)이다. 그 근거는 적어도 대한민국 국회에서 정한 관련 법률에서 찾는 것이 맞다고 본다. 제헌국회에서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참여정부 시절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한 바 있다. 이들 두 법률에서 금융조합 이사와 가장 근접한 항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반민법(제4조 9항)
'관공리 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특별법(제2조 18항)
'동양척식회사 또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우리민족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

결론적으로 말해 '금융조합 이사'를 친일 반민족행위자(속칭 '친일파')로 볼 수는 없다. 박근혜 후보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만주군 중위'로 해방을 맞았는데 이는 얘기가 다르다. 박 전 대통령의 행위는 특별법 제2조 10항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된다. 다만 친일규명위에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하지 않은 것은 구체적인 행적자료를 입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선 정국에서 후보자들에 대해 검증작업이 다양한 측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정확한 근거자료를 토대로 한 객관적 기준에서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안철수 후보 조부에 대한 '친일' 논란은 현재까지 나온 얘기('금융조합 근무')로만 본다면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게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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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