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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의 비극적인 죽음. 그 후 첫 공식 행보에 나섰던 1974년 9월부터 10.26 직전까지, 박근혜 대선 후보의 퍼스트레이디 활동 기간은 현 대통령 임기와 맞먹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인 만큼, 박 후보의 당시 행적은 중요한 검증 대상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대한 평가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과거 청와대 안주인에서 미래 청와대 새 주인을 꿈꾸는 최초의 대선 후보,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기간 모습을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 9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과거사 관련 입장 발표를 마친후 당사를 나서고 있다. 이날 박 후보는 5.16과 유신, 그리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 9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과거사 관련 입장 발표를 마친후 당사를 나서고 있다. 이날 박 후보는 5.16과 유신, 그리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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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박 후보가 언론자유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힐 때가 됐다고 본다. '이(李)비어천가'가 '박(朴)비어천가'로 바뀌었을 뿐 주요방송사의 노골적인 편파보도가 시정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박 후보의 국민대통합 행보는 '위선'에 불과하다. '국민이 준 권력만 받겠다'(지난 5월 SBS 힐링캠프)고 한 박 후보의 언행일치를 지켜보겠다."

지난 9월 19일, <기자협회보>는 편집위원회 명의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언론자유와 관련한 입장을 명확히 밝힐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박 후보는 이를 외면했다. 나흘 후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사과했지만, 언론자유에 대한 입장은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자협회보>의 공식 요구를 무색케 만드는 막말 파문이 일어났다. 당시 김재원 새누리당 대변인은 기자들과의 저녁 식사자리에서 자신이 한 발언이 언론사에 보고된 것을 알고, 취중에 "야, 병신들아, 이렇게 한다고 너희들이 특종할 것 같냐" 거나 "너희가 정보보고 하는 게 우리한테 다 들어온다"고 말함으로써 박 후보 측근의 언론관에 심각한 물음표를 갖게 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박 후보는 유독 언론 자유와 관련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올해 MBC, KBS, <연합뉴스>, <국민일보>, YTN 노조 등이 사상 초유의 최장기 공동파업에 들어간 상황에서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MBC가 파업에 돌입한 지 145일째를 맞이한 지난 6월 '파업이 징계 사태까지 간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란 발언이 그나마 유일한 언급"이었다고 한다.

스물다섯 큰 영애의 격려사를 '받들었던' 9시 뉴스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의 새마음운동 열풍은 당시 전국을 휩쓸었다. 박근혜가 각종 새마음갖기 운동대회에서 행한 격려사를 묶은 <새마음의 길>이란 책이 50만부나 팔렸다고 알려졌을 정도였다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의 새마음운동 열풍은 당시 전국을 휩쓸었다. 박근혜가 각종 새마음갖기 운동대회에서 행한 격려사를 묶은 <새마음의 길>이란 책이 50만부나 팔렸다고 알려졌을 정도였다
ⓒ 1979년 <새마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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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박 후보가 언론자유와 관련해서 사실상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박 후보가 퍼스트 레이디 시절 벌였던 새마음운동은 '알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죽음 뒤 가까워진 최태민 목사와 구국선교단, 그들이 탄생시킨 구국여성봉사단을 모체로 전국적으로 벌였던 국민정신 개조운동.

<관련기사>
[퍼스트레이디 박근혜①] 박근혜에겐 감추고 싶은 '20대'가 있다?
[퍼스트레이디 박근혜②] 박근혜의 '새마음'에 쌍용�두산�현대도 떨었다

'20대 박근혜'가 직접 전면에 나서 전국을 돌며 새마음갖기운동 대회를 통해 지역·학생·노동·재벌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규모의 조직을 건설했으며, 이를 통해 단기간에 급속도로 퍼스트 레이디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한 것이 바로 새마음운동이다. 그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1979년 10월 2일자 <경향신문> '주평'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TV 비평 성격의 이 기사는 1979년 9월 24일자 KBS 9시 뉴스와 MBC 9시 뉴스의 보도 순서를 각각 나열하고 그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는데, '박근혜 총재 자연보호연구회 격려사'란 소식을 양 방송사 모두 각각 다섯 번째 보도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와 관련 이 글을 쓴 당시 이상회 연세대 교수는 "무엇보다 '환율 불인상'이나 '추곡 수매가격 불인상'과 같은 주요 뉴스를 '간추린 뉴스'로 가볍게 처리한 처사는 이해가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스물 다섯 큰 영애의 '격려사'를 당시 방송사들이 얼마나 '받들었는지' 잘 나타난다. 새마음운동으로 크게 격상된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근혜의 '국민과의 대화'를 아십니까

1977년 1월 3일 MBC가 방영한 신년특집 '대통령 영애 박근혜양과 함께' 소식을 전한 당시 <경향신문> 보도
 1977년 1월 3일 MBC가 방영한 신년특집 '대통령 영애 박근혜양과 함께' 소식을 전한 당시 <경향신문> 보도
ⓒ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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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스스로 방송 출연에 적극적이기도 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를 대상으로 1979년 10·26 사건 직전까지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 기사(사진 포함 877개)를 살펴보면, 박근혜는 특별 기자회견이나 특별대담 형태 프로그램에 AFKN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 차례 출연한 것으로 나타난다. KBS·MBC·TBC 등 방송 3사 합동 '큰 영애와의 대화'도 있다. 모두 오늘날의 '대통령과의 대화'를 연상시키는 프로그램들이다.

어머니 육영수는 어떠했을까. 역시 같은 방법으로 박 전 대통령이 5·16 군사 정변에 성공한 1961년부터 1974년 8월 14일까지 '육영수 기사' 1264개를 모두 살펴봤다. 박근혜와 같은 TV 프로그램 출연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딸'의 경우보다 TV 보급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시기였기 때문일까.

라디오의 경우도 매 한가지다. 단 한 차례, 1967년 4월 18일자 <동아일보>의 육영수 여사 단독 인터뷰가 20일 <동아방송>을 통해 나간다는 '예고'기사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그 후 <동아일보>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때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대선을 앞두고 전국을 돌며 유세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불발이 된 것 아닌가 하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박근혜는 신문 또는 <여원> 등 여성월간지와의 신년 인터뷰 형태를 애용했던 어머니보다 상대적으로 신문 지상에서도 '노출 빈도'가 적지 않았다. 단순 수치로 비교해봐도 5년 2개월 정도 퍼스트 레이디 생활을 했던 박근혜의 보도 검색 숫자는 육영수 보도의 70% 가까이 육박한다. 보도 검색의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그만큼 신문들이 박근혜 동정을 충실하게 보도했다는 말이 된다.

특히 새마음운동 관련 보도가 눈에 많이 띈다. 위 3개 신문이 박근혜가 직접 참석한 것으로 보도한 구국선교단·구국여성봉사단·각종 새마음대회 관련 행사만 무려 60차례에 이른다. 새마음운동이 새로운 정당성을 부여해야 하는 사업이었던 만큼, 박근혜가 연설할 때마다 신문들은 '성실하게' 잘 받아썼다. 따라서 박근혜로서는 굳이 어머니와 같은 형식을 취할 필요가 없었던 셈이다. 게다가 방송 출연 다음 날 신문은 관련 기사로 '도배'가 됐으니 '일석이조'임에 분명했다.

"아버지의 인간미, TV 통해 광범위하게 알려"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의 행복했던 한 때. 사진은 1973년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 여자부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선수단 일행을 청와대로 초대해 다과회를 열었을 때 모습. 당시 이에리사 선수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의 행복했던 한 때. 사진은 1973년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 여자부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선수단 일행을 청와대로 초대해 다과회를 열었을 때 모습. 당시 이에리사 선수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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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님하고 배드민턴 치시면 누가 이깁니까?
"때에 따라 다른데 여동생하고 저하고 편을, 아버지께서는 혼자 저쪽에서 하셔도 아버지한테 종종 져요(일동 웃음). 어머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도 이 운동을 많이 했는데 그 때는 한 사람이 남기 때문에 편을 가르고 한 사람은 꼭 심판을 봤어요." (1977년 MBC 신년특집 대담)

박근혜의 '국민과의 대화'는 아버지를 위해서도 '일석이조'였다. 방송을 통해 박근혜는 "식사시간에 역사에 관한 얘기만 풀리게 되면 끝도 없이 그 얘기를 하시(1976년 KBS 송년특집 대담)"거나 "매일 아침 검도 연습을 하는(1977년 MBC 신년특집 대담)" 등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을 갖춘 '아버지'로 소개했다. 어버이날 '혼자' 카네이션을 받고 눈물짓는 박 전 대통령의 일화(1977년 KBS·MBC·TBC 방송 3사 송년 특집 '대통령 영애 박근혜양과의 대화')는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충분히 자극할 만했다.

그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박근혜의 '국민과의 대화'는 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는 '아버지 박정희'가, 육 여사 생존 당시 신년 인터뷰 등에서 활자로 소개된 '남편 박정희'보다 훨씬 강력하게 다가왔을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1977년 3월 11일자 <경향신문>이 전한 일본 <아사히 신문> 보도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 신문은 지난 74년 육영수 여사가 비명으로 간 뒤 장녀 박근혜양이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로 활약, 외빈 접대·사회 복지 활동 등을 도맡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아버지로서의 대통령'의 인간미를 TV를 통해 광범위하게 국민에게 알리고 있다고 소개했다."

박근혜가 TV를 통해 노동자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애정'을 알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977년 방송 3사 송년 특집 프로그램에서 박근혜는 "아버지께서 버스 안내양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도록 하기 위해 모자가 달린 동복을 직접 디자인했다"거나 "요즘 아버지께서 가장 마음을 쓰시는 것은 근로자의 복지 향상과 처우 개선"이라고 전했다.

박근혜가 언급한 '요즘'은 유신 정권 치하에서 노동운동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시절. 김문수 경기지사가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기 전, 청계천 여러 공장을 전전하던 '요즘'이었으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감된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영등포교도소에서 두 딸에게 편지를 쓰던 '요즘'이기도 했다. 이들이 '큰 영애와의 대화'를 당시 지켜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육영수와 박근혜의 결정적인 차이

1968년 1월 1일자 <경향신문>. 육영수씨는 인터뷰 매체로 방송보다는 신문이나 여성 월간지를 선호했다
 1968년 1월 1일자 <경향신문>. 육영수씨는 인터뷰 매체로 방송보다는 신문이나 여성 월간지를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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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달리 방송 출연에 적극적이었고 아버지의 인간적 면모를 방송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정도 '과거'만으로 언론자유와 관련한 '침묵'의 현재를 바로 연결짓기는 무리다. 육영수와 박근혜의 결정적인 차이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언론인을 대하는 자세'였다.

관련 보도를 살펴보면, 먼저 육영수는 적어도 공식석상에서 직접 접촉은 '기자'로 국한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접촉은 본인이 음식을 준비하고 박 전 대통령이 합석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매월 정기적으로 열린 이 오찬을 위해 육영수가 마련한 음식들은 국수, 냉면, 스파게티 등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정부가 대대적으로 추진하던 혼분식 운동의 장려 차원에서 선택한 메뉴들이었다. 박 전 대통령 없이 단독으로 기자들을 만날 경우 또한 그 대상을 여성 언론인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박근혜는 달랐다. 전국적으로 새마음운동 조직 건설 열풍이 한참 뜨겁던 1977년 7월 6일, 박근혜는 당시 홍경모 KBS 사장, 이환의 MBC·경향신문 사장, 김덕보 TBC 사장 등에게 청와대에서 '새마음캠페인' 유공 감사장을 수여한다. "새마음갖기운동과 자연보존운동이 전국적인 차원으로 활발해진 것은 언론기관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란 말도 잊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그 해 연말 KBS·MBC·TBC 등 방송 3사는 송년 특집 프로그램 '대통령 영애 박근혜양과의 대화'를 합동으로 방영한다. '새마음캠페인' 유공 감사장에 대한 일종의 '화답'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박근혜의 사장단 '접촉'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만남은 지역·학생·노동·불교계 등 방대한 규모의 새마음운동 조직 건설이 완성 단계에 접어든 1979년에 다시 나타난다.

언론사 사장 27명에게 사실상 '새마음 보도지침'

1975년 5월 25일 청와대에서 신문·방송·통신 사장 또는 회장 13명이 새마음봉사단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당시 보도를 전하는 <경향신문> '새마음 운동 차분하게'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1975년 5월 25일 청와대에서 신문·방송·통신 사장 또는 회장 13명이 새마음봉사단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당시 보도를 전하는 <경향신문> '새마음 운동 차분하게'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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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환의 MBC·경향신문 사장 ▲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 ▲ 김덕보 TBC 사장 ▲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 김종규 서울신문 사장 ▲ 장기봉 신아일보 사장 ▲ 최세경 KBS 사장 ▲ 김석원 동양통신 사장 ▲ 박용곤 합동통신 사장 ▲ 김태동 코리아헤럴드 사장 ▲ 조병직 기독교방송 사장 직무대리 ▲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

이상은 1979년 5월 25일 청와대에서 새마음봉사단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신문·방송·통신 사장 또는 회장 13명의 이름이다. 이들에게 '큰 영애'는 자문위원 위촉장을 수여하면서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니 힘이 솟는 것 같다", "이 운동이 국민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도록 격려하고 이끌어달라"고 당부한다. 더불어 박 전 대통령을 새마음봉사단 명예총재로 추대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아버지'는 뜻밖의 말을 한다. "운동이라고 해서 요란하게 기세를 올리는 것 보다도 조용하고 차분하게 실천 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요란하게 기세를 올리고자 하는 자리'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새마음봉사단 총재인 '딸'에게 일종의 '브레이크'를 주문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박근혜의 '사장단을 대하는 자세'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8월 24일, 이번에는 14개 지방지 사장들을 새마음봉사단 총재 자문위원으로 위촉한다. "자문위원 여러분이 보도를 통해서 뿐 아니라 새마음봉사단원들을 잘 지도·격려하여 새마음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더욱 심화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사실상의 '보도지침'이었다. 다음은 당시 지방지 사장 명단이다.

▲ 구자학 국제신문 ▲ 왕학수 부산일보 ▲ 전달출 매일신문 ▲ 김부현 경남매일 ▲ 김종태 전남일보 ▲ 홍대건 경기신문 ▲ 강표원 강원일보 ▲ 이석훈 충청일보 ▲ 남재두 대전일보 ▲ 이존일 전북신문 ▲ 심상우 전남매일 ▲ 이재필 영남일보 ▲ 김윤양 경남일보 ▲ 김선희 제주신문

언론자유에 대한 명확한 입장 밝혀야

퍼스트 레이디 육영수의 대중적 인기는 매우 높았다. 대선 유세 현장에서 군중들 사이에 섞여 있던 육영수로 인한 소란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연설이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사진은 1971년 대선에서 퍼스트 레이디 활동을 부각시킨 1971년 4월 19일자 <경향신문> 보도
 퍼스트 레이디 육영수의 대중적 인기는 매우 높았다. 대선 유세 현장에서 군중들 사이에 섞여 있던 육영수로 인한 소란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연설이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사진은 1971년 대선에서 퍼스트 레이디 활동을 부각시킨 1971년 4월 19일자 <경향신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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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박근혜는 어머니와 달리 언론사 사장들을 사실상 직접 '통제'하려고 했다. 이에 순응한 언론인과의 관계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이환의 MBC·경향신문 사장. 그는 1992년 민자당 소속으로 14대 국회에 입성하고, 2000년에는 한나라당 부총재 자리에 오른다.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박근혜 선대위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6년 동남아 3국을 순방할 때이다. 첫 방문국인 말레이시아 방문 3일 째 되는 날, 육 여사는 말레이시아 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중략)…'제일 기쁜 일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대통령과 국민 여론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내조의 보람찬 자랑스러움을 말했다." (나의 어머니 육영수, 박목월 편)

박근혜는 퍼스트 레이디로서 '대통령과 국민 여론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을 택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스스로 여론의 중심이 되고자 했다. TV에 출연해 온 국민을 상대로 '새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언론사 사장단들을 불러 사실상의 '새마음 보도지침'을 하달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박근혜 대선 후보는 '언론자유'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 후보라면 누구나 '내일'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며, 동시에 박 후보 스스로가 언론자유 '암흑기'의 최대 수혜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마지막 4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박근혜, #육영수, #새마음운동, #이환의, #방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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