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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밤 대전시민아카데미와 대전충남인권연대, 대전충청오마이뉴스가 공동 주최한 '장준하-박정희, 살아있는 싸움' 특강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한홍구 교수
 27일 밤 대전시민아카데미와 대전충남인권연대, 대전충청오마이뉴스가 공동 주최한 '장준하-박정희, 살아있는 싸움' 특강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한홍구 교수
ⓒ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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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입장에서 장준하는 존재론적인 위기였습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가사처럼, 삶의 대목에서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존재론적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지난 27일,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장준하 박정희의 살아있는 싸움' 강연은 올바른 역사를 찾아가는 '죽비소리'였다. 대전시민아카데미·대전충남<오마이뉴스>·대전충남인권연대 주최로 진행된 이번 강연에서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동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정치인 장준하와 박정희를 조명했다. 이 과정에서 한홍구 교수는 '장준하 선생 의문사'와 관련해 '(수사권을 가지고) 재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고 장준하 선생은 1975년 유신 정권 하에서 등산하는 중에 운명했다. 당시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실족사로 처리됐지만, 최근 유골에서 타살 흔적이 발견되는 등 의혹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소신을 밝혔다.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볼 때) 숨이 딱 막혔습니다. 법의학자들이 의식이 없는 상태로 떨어졌다고 공통된 의견을 냈습니다. 추락하기 이전에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더 이상 억측이 없기 위해 (수사권을 가진)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광복군 핵심 장준하 VS 일본 육군사관학교 우등생 박정희

이날 강연에서 한홍구 교수는 장준하와 박정희, 두 인물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해 눈길을 끌었다. 장준하에 대해서는 "(광복군 출신으로) 태극기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반면 박정희에 대해서는 "(만주군 출신의) 불행한 친일파"라고 평가했다.

한홍구 교수는 이야기보따리를 풀 듯, 장준하 선생의 청년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일제의 서슬 퍼런 강제 징용 중 탈출해,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한 장준하의 삶은 조선청년의 귀감이라 할 만했다.

"(1944년7월) 일제 징용에서 탈출 상해 임시 정부 합류한 (장준하 선생을 비롯한) 조선 청년들의 모습에 백범 김구 선생은 감격해 했습니다. 백범 선생님은 한 연설에서 '20, 30세 조선 청년들은 죄다 (일제의) 노예가 되었다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다 있다'며 놀랐습니다. 그때 장준하가 답사에 나섰는데, 당시 장준하는 물론 연설을 듣던 이들 모두 울어 상해임시정부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한 교수는 장준하의 호기를 엿볼 수 있는 한가지 일화도 전했다.

"장준하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를 폭파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 정부 내에 파벌이 있었는데, 그런 상황이 못마땅했던 장준하 선생의 한마디였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힘을 하나로 모아도 될까말까인데, 파벌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백범(김구) 선생은 그런 장준하를 좋게 봤고, 나중에 자신의 비서 일을 시킵니다."

백범의 눈에 장준하가 '조선 청년들의 귀감'이었을 것이라 말하는 한홍구 교수. 그는 박정희 역시 일제가 원했던 '조선 청년들의 귀감'이었다고 말했다.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일제가 바라는 조선 청년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홍구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해방 전, 광복군(장준하)과 만주군(박정희)으로 엇갈린 두 사람의 삶을 조망했다. 1917년(장준하), 1918년생(박정희)생인 두 사람의 청춘은 '독립운동과 친일'로 엇갈렸다.

그런 역사 속에 8·15 광복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장준하 선생과 김구 선생의 일화 하나를 전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50명을 키워, (한반도) 한 지역(도)에 5∼6명씩 투입하는 작전을 세웁니다. 생존확률은 0% 가까운 작전이었습니다. 그때 장준하 선생과 김준엽 (9대 고려대총장) 선생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당시 백범 김구선생은 두 사람이 비상한 일꾼이라 생각해, 이 작전에서 이들을 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기도 투입 젊은이의 책임자인 장준하 선생은, '나를 빼면 대오가 무너진다'고 하며 작전준비를 계속했습니다."

다음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해방은 광복군의 작전 예정일보다 빨리 이뤄졌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이었건만, 백범 선생은 '일본이 너무 빨리 항복했다'며 한탄했다. 전쟁에 참여하지 못해 그토록 바라던 승전국 지위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광복군이 있었기에, 독립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기에 자존심은 지켰다. 한 교수가 전한 역사의 진실은, 작은 위로가 될 법한 말이었다.

"8월 18일 장준하, 이범석, 김준엽 등은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당시 일본군 대좌는 무릎을 꿇고 이들에게 술을 따랐습니다."

27일 밤 대전 중구 문화동 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열린 한홍구 교수의 '장준하-박정희, 살아있는 싸움' 특강 장면.
 27일 밤 대전 중구 문화동 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열린 한홍구 교수의 '장준하-박정희, 살아있는 싸움' 특강 장면.
ⓒ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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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보수성과 삶의 진정성 가진 장준하! 그런 그가...!

해방 이후 5·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그런 박정희에게 장준하는 어떤 존재로 다가왔을까? 한홍구 교수는 '박정희에게 장준하는 존재론적 위기'라고 강연했다. 삶의 대목, 대목마다 박정희에게 장준하는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과 친일, 민주와 독재의 싸움에서 전자의 장준하는 후자의 박정희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또 보수파의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가 위기의식을 느낄법했다.

"장준하가 보수파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중략) 우리나라의 베트남 전쟁 참여에 대해, 정치인 장준하 선생은 '조선 청년들의  피의 값을 얼마나 더 받아야 하나'며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참여가 결정되자 자신의 아들을 베트남 전선에 보냈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장준하 선생을 극우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 교수가 말한 장준하의 극우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무늬만 극우가 아니다. 민족주의 입장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진정성 있는 보수주의였다. 한 교수는 장준하 선생이 '정치적 보수성을 삶의 진정성을 통해 극복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장준하 선생은 여·야가 손 놓았던 군인의 처우개선에도 힘썼습니다. 베트남전에 파병됐던 장병들의 월급은 징병 된 베트남 군인 월급과 같았는데, 장준하 선생이 월급을 인상하는데 힘썼습니다.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장준하 같은 분이 대통령에 출마한다면 맨발로 뛰어다니며 운동하고 싶은 심정' 할 정도로 보수 쪽에서도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장준하가, 1975년 8월 17일 향년 56세의 일기로 운명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등산 도중, 실족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12년 8월 16일,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지름 6㎝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돼 있다는 사실이 37년 만에 확인됐다.

타살의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자연히 '장준하 선생 의문사' 의혹은 2012 대선 정국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야당(민주통합당)에서는 당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의혹 규명에 나선 상태다.

"(수사권을 가진) 재조사 필요"... 장준하, 박정희 정권 평가 바뀌지 않아!

"(중략) 장준하 선생은 성격적으로는 과격했지만, 행동은 조심스러우셨습니다. 추락사한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 낭떠러지는 전문 산악인도 어려워하는 곳입니다. (장준하) 선생님이 장비 없이 내려 오실 리 없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이날 강의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어, '장준하 선생 의문사'에 대해 재조사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언급했다.

"유골이 37년 동안 저렇게 온전한 상태라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 기막힌 일을 밝혀내야 합니다. 유골을 보며 차라리 장준하 선생님이 추락사 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만약 타살이 맞다면) 너무 슬픈 이야기입니다. 더 이상 말이 오가지 않도록, 재조사가 필요합니다."

한홍구 교수는 강연의 말미에, (장준하 선생 의문사) 결과가 어떻든 역사적으로 내려진 장준하와 박정희의 평가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 내다봤다. 장준하가 지켜온 삶의 의미,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과오, 살인 정권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이다.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장준하 삶의 의미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박정희 정권이 가진 살인정권의 본질도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한홍구 교수가 던진 한마디에는 힘이 있었다. 역사학자 입장에서 청중에게 뜨거운 교훈을 던졌다.

역사는 힘 있는 자의 것이다. 1975년 장준하 박정희의 싸움은, 장준하 죽음으로 끝이 났다. 박정희가 이겼다. 독립운동과 친일, 민주와 독재의 싸움에서 후자가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끝은 아니다. 2012년 그들의 이름은 살아남아 새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는 죽지 않았다. 역사는 힘있는 자의 것이지만, 동시에 진실을 알리려는 이들의 산물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근현대사의 과오, '인혁당 사건 조작'이 살아남은 자들의 피와 땀의 노력으로 바로 잡아졌던 기억을 상기해 보자.

'장준하 선생 의문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한홍구 교수의 강연은 진실 추구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심어줬다. 37년을 끌어 온 의혹의 진실, '장준한 선생 의문사'라는 역사의 숙제가 정부차원, 혹은 국회 차원의 재조사를 통해 제대로 풀어지길 바란다. 이 숙제를 제대로 풀어야,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대한민국이 더 나은 미래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태그:#한홍구,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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