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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뉴스 7년을 싸워야 산재 인정, 이게 정상인가요?

육영수 여사의 비극적인 죽음. 그 후 첫 공식 행보에 나섰던 1974년 9월부터 10.26 직전까지, 박근혜 대선 후보의 퍼스트레이디 활동 기간은 현 대통령 임기와 맞먹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인 만큼, 박 후보의 당시 행적은 중요한 검증 대상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대한 평가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과거 청와대 안주인에서 미래 청와대 새 주인을 꿈꾸는 최초의 대선 후보,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기간 모습을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말]
1980년 1월 28일 계엄고등군법회의 재판부에 세 달 전에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항소이유보충서가 제출되었다. 이 문서에는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와 관련된 중요한 증언이 실려 있다.

"구국여성봉사단과 연관한 큰 영애의 문제가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었지만 중요한 것이었다." (1990년 11월 23일자 <동아일보>)

최태민이란 자가 총재로, 큰 영애(박근혜 현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명예총재로 있던 구국여성봉사단이 많은 부정을 저질러 김재규 자신이 중앙정보부 조사 결과를 대통령에게 '직보'했음에도, 오히려 대통령은 이를 무시하고 박근혜를 이 단체 총재로 앉혀 결과적으로 개악시켰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은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에 쏠렸다. 이로 인해 '구국여성봉사단과 연관한 큰 영애의 문제'는 주로 최태민이란 세 글자에 국한됐고, 정작 이들이 구국여성봉사단을 '교두보'로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것은 바로 '새마음운동'이었다.

퍼스트 레이디의 '새마음 외출', 그렇게 많았는데 왜?

 2007년 출판된 박근혜 후보의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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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음운동. 이제까지 알려진 바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박근혜가 육영수 여사 사망을 계기로 가까워진 최태민 목사와 의기투합하여 1977년부터 전국적으로 펼친 국민운동으로 충효 정신을 바탕으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다같이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민 정신 개조운동이란 평가도 따라붙는다.

그 운동에 어느 정도 박근혜가 열과 성을 다했는지는,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등 당시 보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975년부터 1979년 10.26 직전까지 이들 신문에 실린 '큰 영애'의 퍼스트레이디 행적을 조사해보니, 박근혜가 소화한 청와대 외부 단독 일정 보도 137건 중 최태민 목사 혹은 새마음운동과 관련한 일정이 64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도대로라면, 거의 두 번에 한 번은 '새마음 외출'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박근혜는 이와 같은 자신의 '과거' 평가에 매우 '인색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2007년 나온 그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를 보면, 총 350페이지 분량의 이 책에서 '새마음운동'이란 단어는 단 두 차례만 언급된다. 그 분량 또한 다 합쳐도 한 페이지 정도에 불과하다.

"1974년부터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았고, 곧이어 '새마음운동'을 전개하며 퍼스트레이디 활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새마음운동'은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가자는 뜻을 담았다. 소득 수준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득 수준에 걸맞은 의식 수준을 갖는 것이 필요한 때였다."

위 글이 박근혜가 자서전을 통해 새마음운동에 대해 그나마 상세하게 밝힌 전부다. 이제부터 그 '전부의 나머지'를 구체적으로 짚어보려 한다.

"복음국가 건설" 다짐하는 행사에 나타난 박근혜

 생전의 육영수 여사, 곁에 앳된 모습의 박근혜 후보가 보인다
ⓒ 2000년 <나의 어머니 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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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화여고 합창단의 육 여사를 추모하는 조가가 울려 퍼지자 장내는 숙연해졌고 이내 울음바다가 되었다. 시종 따뜻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위엄을 잃지 않은 근혜양은 입장식이 끝난 뒤 식순에도 없는 즉석 연설로 '바쁜데 와주셔서 고맙다. 힘껏 싸워 돌아가신 어머님의 뜻을 받들어 이 대회를 빛내달라'는 내용의 인사를 했다."

1974년 9월 21일 장충체육관에서 개막한 '육영수 여사컵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 당시 <경향신문>은 어머니의 충격적인 죽음 이후, 퍼스트 레이디로 처음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낸 '큰 영애' 박근혜의 모습을 위와 같이 전하고 있다. 이처럼 그 해 박근혜의 행보는 '새마을 권잠(勸蠶)실 현판식'이나 '새마을여성경진대회' 참석 등 대체로 육 여사의 자리를 메우는 모습이었다.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만의 독자적인 행보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이듬해 5월 11일 임진각이었다. 최태민 목사가 이끄는 대한구국선교단, 그들이 주최한 기독교 초교파 구국기도대회라는 행사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 "조국의 통일"과 또한 "복음국가 건설" 등을 다짐하는 '해괴한' 자리였다.

그 후에도 박근혜는 M16 소총 사격 등 구국선교단 목사들의 군사훈련 퇴소식, '나라의 영원한 보호와 발전을 기원하는 기도회' 등 최 목사가 주관하는 여러 행사에 모습을 나타낸다. 군부대나 대구 지역 교회 등 먼 곳도 마다하지 않았다.

최태민 목사 주관 행사에 자주 얼굴 드러내

 최태민 목사는 박근혜 후보와 함께 새마음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인물이다. 1990년 11월 23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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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도 최태민 목사와 박근혜와의 '돈독한 행보'는 계속된다. 구국선교단 주관 헌혈 행사에  방문하는가 하면, 구국선교단 개설 야간무료진료센터(새마음종합병원 전신) 개원식에도 참가한다. 이어 그해 4월, 김재규가 항소이유보충서에 언급한 구국여성봉사단의 발단식이 열린다. 박근혜는 물론 당시 통일원장관, 서울시장 등도 참석했다고 한다.

새마음운동의 '복선'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해 6월이다. 역시 구국선교단이 주최한 경로대잔치,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오늘의 모임은 국민 전체가 참여해야 할 운동"이라고 강조한다. 당시 권력의 '주구' 역할을 했던 <경향신문> 역시 "효를 통한 인간정신의 승화를 다짐하는 경로대잔치"라 표현했으니, 그때 이미 새마음운동의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증명하듯 곧 구국여성봉사단 조직이 전국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다. 그해 9월 도지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구국여성봉사단 천안 지부와 수원·화성지부가 만들어지고, 구국선교단·한국노총·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구국여성봉사단 등 4개 단체의 '구국단체 결연 단합대회'도 열린다. 행사 때마다 박근혜가 참석했음은 물론이다.

급기야 그해 연말과 다음해 연초에 걸쳐서는 TBC를 시작으로 KBS 이어 MBC 순으로 새마음운동 '예고편'이 방영된다. 특별 기자회견이나 특집 대담 형식의 프로그램에 박근혜가 직접 출연하여 '새해에는 새마음운동' 또는 '이제는 새마음운동 시대'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아들이 히딩크와 기념사진 찍었던 그 나이에...

 1976년 12월, 박근혜 후보는 퍼스트레이디로 생활한 지 2년 여 만에 이뤄진 TV 특별기자회견 등을 통해 새마음운동의 본격적인 전개 의지를 밝힌다. 1976년 12월 17일 KBS 송년 회견 소식을 보도한 당시 신문
ⓒ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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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만능으로 이뤄지는 모든 부작용은 아예 처음부터 뿌리 뽑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경제 발전에 못지 않게 정신개혁운동을 일으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정신적인 면에서도 선진화를 이룩해야 한다." (1976년 12월 12일 TBC)

"우리가 이 시점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또 시급한 일은 무엇보다도 범국민적으로 새마음갖기운동을 벌여 정신순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새마음갖기운동을 생활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국민이 노력하는 것이 국민총화단결의 첩경이다." (1976년 12월 17일 KBS)

"새해에는 도시·농촌 할 것 없이 우리 정신을 순화시키는 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일어났으면 좋겠다.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을 되찾고 튼튼한 복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자는 새마음갖기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이뤄지길 바란다." (1977년 1월 3일 MBC)

그때 박근혜의 나이 스물다섯, 이명박 대통령 아들 시형씨가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히딩크 감독과 기념사진을 촬영했을 때와 같은 나이였으니, 갓 대학을 졸업한 새파란 젊은이의 '일성'을 지켜보는 당시 '어른 세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20대의 나이에 북한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김정은을 바라보는 지금의 시각에서는 아주 '기괴한 광경'이었던 셈이다.

새마음운동 전국에 지역 조직... '개악'은 오히려 그 후

 박근혜 후보의 퍼스트레이디 시절 핵심 활동은 새마음운동이다. 특히 1977년부터 박 후보는 전국을 돌며 새마음운동 확산을 위해 지역 조직을 건설한다. 사진 상단 왼쪽부터 'Z' 방향으로 경기, 충남, 전북, 경북, 전남, 강원, 충북, 제주 새마음갖기 궐기대회. 하단 맨 오른쪽 사진은 경기여고 새마음학생회 발단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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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스물다섯 살 젊은이의 새마음운동 '교지'에 온 나라가 출렁이기 시작한다. 그해 3월 16일, 구국봉사단, 대한노인회 등 10개 민간단체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른바 '새마음갖기궐기대회'.

당시 내무부 장관도 참석한 이 행사에서 '큰 영애' 박근혜는 격려사를 통해 "새마음갖기운동이 어느 단체나 지방에 국한되지 않고 국민 전체의 국민철학으로 심어져 나갈 때 이 땅은 이상적인 복지국가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곧 전국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8일 후 인천에서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새마음갖기 경기·인천시민 궐기대회가 열리고, 이어 경남·마산, 충남·대전, 전북·전주, 경북·대구, 전남·광주, 부산, 강원, 충북 등 순으로 제주를 제외한 전국이 새마음갖기궐기대회 '광풍'에 휩싸인다.

그 모든 행사에 박근혜는 직접 모습을 나타낸다. 당연히 도지사들로서도 '출석 도장'을 찍어야 하는 행사였다. 동시에 궐기대회가 열릴 때마다 해당 지역에는 구국여성봉사단이 조직된다. 일종의 '박근혜의, 박근혜에 의한, 박근혜를 위한' 전국 규모 조직이 탄생한 셈이다.

1978년 2월 22일, 전국 지부장 등 구국여성봉사단 간부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새마음갖기결의 실천 전국대회에서 박근혜는 마침내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정식 취임한다. 취임사에서 이제 새마음운동은 "한 국가가 진정한 복지국가로 성장해 나가고자 할 때 필연코 다져야 할 기초작업"으로 격상한다. 김재규가 결과적으로 상황이 더 개악되기 시작했다고 지목한 바로 그 시점이다.

불교도 '새마음', 구로공단도 '새마음'

 1978년 6월 2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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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김재규의 상황 인식은 정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생 단위 새마음운동 조직이 본격적으로 꾸려지고, 종교계는 물론 노동계로까지 확산되는 시점이 '큰 영애' 박근혜가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취임한 이후였기 때문이다.

우선 종교계에서는 불교계가 발빠르게 움직였다.

1978년 4월 새마음갖기 국민운동 불교본부가 '뜨고', 이어 새마음갖기 대법회가 열린다. 새마음운동의 '산파'가 최태민 목사였음을 감안하면, 매우 '아이러니'한 일임에 분명했다.

이에 박근혜는 새마음운동 불교본부 각 종단대표를 청와대에서 접견하는 자리에서 그들을 치하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모든 종단이 한가족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단합하여 불교 총화를 이룩하고 나아가 전국민에게 새마음의 불꽃을 피우게 해 달라"고 격려한다.

노동계에서는 특히 직능 단위로 새마음운동 조직이 잇따라 구축된다. 그 출발은 구로공단. 1978년 6월 1일 최각규 상공부 장관, 구자춘 서울시장, 공단 내 362개 업체 대표, 그리고 여자 종업원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단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 및 새마음직장봉사대 결단대회'가 열린다.

이어 그해 9월 한국간호원보조협회, 11월에는 버스 안내양을 중심으로 한 '전국자동차노조'가 각각 새마음직장봉사대를 조직한다. 다음해인 1979년에는 3월에 창원공업기지, 8월에는 서울시 약사들까지 '새마음 종사' 행렬에 동참한다.

"전국 면 단위까지 지부 조직"... <새마음의 길> 영문판도 나와

 1979년 7월 발행된 <새마음의 길> 영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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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방위로 조직된 새마음운동 관련 단체의 위세는 1979년 2월 당시 구국여성봉사단이 주도한 '물가안정범국민대회'를 통해 잘 나타난다.

그 면면은 구국여성봉사단, 전국대학생총연합회, 전국 중고등학생 총연합회, 대한노인회, 자동차노조, 새마음 불교본부, 성균관, 서울시의사회, 서울시한의사회, 예총 등이었다.

이와 관련 1979년 8월 14일자 <경향신문>은 '뿌리내리는 새마음운동' 기사를 통해 퍼스트레이디 박근혜를 돌아보면서 "큰 영애가 무엇보다도 큰 역점을 두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새마음운동"이라며 "새마음봉사단은 전국 각 면에까지 지부 조직을 끝냈다"고 결산하고 있다. 그야말로 '꼼꼼하게', 조직을 구축했음을 보여준다.

이제 새마음운동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새마음종합병원, 새마음연수원도 등장한다. 연예인 새마음봉사대가 각종 '새마음 행사'에 동원된다. 당시 박근혜 총재의 새마음 대회 격려사를 묶은 <새마음의 길>이란 책이 나오는가 하면, 다시 얼마 후에는 <새마음의 길> 영문판도 출판된다. <코리아헤럴드>가 출판한 이 책의 당시 정가는 1200원, 미화로 2달러50센트였다고 한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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