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김이수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11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김이수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11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김이수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11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 검시관으로 참여하면서 대검에 찔린 시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봤다"고 말했다. 김 후보자는 함진규 새누리당 의원이 "당시 가슴에 자상을 입은 여인의 시신을 검시한 검시관 서명란에 증인 김이수라고 써 있다, 맞는가"라고 묻자 "맞다"고 답한 후, "(계엄군이) 대검으로 찌른 흔적을 봤는가"라는 이어진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당시 계엄군이 소총에 대검을 착검해 시위대에 사용했다는 사실은 검시 보고서와 병원의 진료기록부상 '자상'이라는 기록으로 이미 드러났지만, 국회 인사청문회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시신을 검시했던 검시관이자, 국가 고위 공직자가 직접 증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5·18기념재단 송선태 상임이사는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통화에서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정호영 등 신군부 측은 대검 사용 여부를 부인하다가 검시 보고서 등을 공개하자, '그런 기록이 있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며 애매하게 넘어갔다"면서 "기록에 있던 내용이 군 검시관으로 참여했던 사람의 입에서 직접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민주통합당에 의해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추천된 김 후보자는 1979년 사법연수원(9기)을 수료한 후 그해 12월에 군 법무관으로 임관했는데, 첫 부임지가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이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한복판에서 군 법무관 생활을 했던 김 후보자는 시위대의 기소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군판사로서 계엄령 하 군사재판에 관여했으며, 상무대에 있던 시신의 검시관으로도 참여했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당시 검시 보고서는 총 165건으로 총상 126건, 타박상 17건, 차량사고사 12건, 미상 7건, 자상 3건이다. 김 후보자가 검시관 서명을 한 것은 모두 30건인데, 그중 자상은 2건(자상 1건, 총상을 동반한 자상 1건)이다. 전체 자상 3건 중 2건을 김 후보자가 검시한 것이다.

김이수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참관한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 검시조서
 김이수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참관한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 검시조서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 법무관 복무... "아주 복잡한 심경이었다"

이날 인사청문회에서는 김 후보자가 당시 군사재판에서 시위대를 처벌한 판결이 논란이 됐다.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은 당시 '광주에서 공수부대들이 대학생들을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등의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혐의로 진도에 사는 한 이장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김 후보자의 판결을 거론하며, "분명히 검시관으로서 대검에 찔린 자상을 봤다고 했는데, 판결에서는 허위사실 유포로 처벌했다, 결국 판결 잘못한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 후보자는 "그런 점이 있는 것 같다"고 인정했다.

최민희 민주통합당 의원은 김 후보자가 관여했던 군사재판 중 재심에서 7건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면서, 이들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 후보자는 "잘 알겠다"면서 "아무리 엄중한 상황이었더라도 지금와서 생각하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재심) 판결을 보고 검토해서 마음의 결단을 정하겠다"고 말했다.

김 후보자는 당시 군사재판 참여에 대해 "어떻게 보면 피하고 싶은 자리였다"면서 "내가 광주 사람으로서 어떻게 보면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해야 될 입장에도 있는 사람인데 군인 신분으로 재판을 맡게 됐다, 그래서 아주 복잡한 심경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굉장히 엄중한 상황이었다"면서 "재판을 안 하려면 전출을 해달라고 하거나 칭병하고 드러누워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논란에 대해 5·18기념재단 송 상임이사는 "군 법무관으로서 신군부의 명령에 의해 그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음을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당시 도청항쟁 지도부나 학생운동 지도부는 김이수 군 법무관을 비교적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최소화하는 데 최대한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한다"면서 "그 사람이 시민군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국가 공식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재판이나 조사를 받았던 사람들의 가슴에는 남아 있다"고 말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0년부터 오마이뉴스에 몸담고 있습니다. 그때는 풋풋한 대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됐네요. 현재 본부장으로 뉴스본부를 이끌고 있습니다. 궁금하신 점 있으면 쪽지 주세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