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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미국 시카고에서 교통사고로 뇌사한 한봄이(당시 18세)씨는 다섯 생명을 살렸다.
ⓒ 한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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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시카고에서 연락이 왔다. 미국에서 유학 중인 봄이(당시 18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비보였다. 태평양을 급박하게 건너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애타게 부르는데도 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국 의사는 중환자실에 누워 일주일째 의식불능 상태에 빠진 봄이에게 뇌사판정을 내렸다.

햇살 따스한 봄날에 태어나서 '봄이'라고 지었다. 1남2녀 중 맏딸인 봄이는 이름만큼이나 화사한 존재였고 부모의 말을 거스른 적이 없을 정도로 효녀였다. 봄이가 중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유학길에 오른 이유는 꿈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봄이의 꿈은 국제 변호사였다. 평균 학점 4.0 이상의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봄이는 하버드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 입학원서를 접수시킨 상태였다.

"뇌의 기능은 완전히 정지되고 장기만 살아있는 상태가 뇌사예요. 봄이를 아무리 부르고, 깨우고, 기다려도 살아 돌아오지 못해요. 여보, 봄이의 장기를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요. 그래서 그 환자들을 살리고 봄이는 하늘나라로 떠나보냅시다."

봄이는 이 날을 예견했을까?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면서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밝혀둔 상태였다. 의사인 봄이 어머니는 봄이 아버지에게 뇌사를 설명하면서 장기기증을 제안했다. 아버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기 출산으로 어렵게 태어난 봄이는 태어나자마자 생사의 기로에 서긴 했지만 그때 뿐, 그 이후엔 아무런 문제없이 잘 자랐다. 유학 4년 동안은 물론이고 맏딸로 태어난 후 18년 동안 기쁨을 나눠준 봄이를 이대로 떠나보낼 순 없었다.

아비의 고통이 클지라도 산고(産苦)로 낳은 어미의 애통(哀慟)만 하랴. 봄이 아버지는 봄이를 영원히 살게 하자는 아내의 고귀한 뜻을 결국 받아들였다. 봄이의 몸에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냈다. 봄이의 심장, 각막, 콩팥, 간 등은 미국인 환자 5명에게 이식됐고 그들은 새 생명을 얻었다. 봄이의 남은 시신은 어머니의 모교인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기증됐다.

"우리 평생에 몇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

 지난 6월 청계천광장에서 열린 세계헌혈자의날 행사에 참석한 봄이 아버지 한정남(첫 번째), 봄이 어머니 정경숙(두 번째), 봄이 여동생 남편 나웅주(세 번째), 봄이 여동생 한채연(네 번째).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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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는 가족에게 사랑의 씨앗이 되었다. 봄이 아버지는 장례식 조의금 1500만 원 전액을 장기기증 운동단체인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기탁했다. 이 기탁금은 '사랑의 뼈 은행'을 세우는데 쓰였다. 뼈 은행은 선천성 안면기형자나 사고로 뼈 이식이 필요한 환자들을 위해 세운 민간기관이다.

(주)샤니 대표이사였던 봄이 아버지는 장기기증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조직은행' 초대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이 은행은 기증자의 뼈, 근육, 심장판막, 심혈관 등 인체조직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이식해주는 민간기관으로 봄이 조의금으로 출발한 '사랑의 뼈 은행'이 기초가 됐다. 봄이 아버지는 2004년~2006년까지 3년 동안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을 지내면서 사회 전반에 장기기증을 확산시키는 데 헌신했다.

봄이 아버지 한정남(68)씨와 어머니 정경숙(62)씨는 지난 9일 장기기증의 날을 맞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열린 '2012 생명나눔 페스티벌'에 참석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주최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장기 기증자와 이식자 등 모두 500여 명이 참석해 생명 나눔의 숭고함을 되새겼다. 봄이 아버지는 이날 행사에서 생명 나눔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주었다.

"봄이의 각막과 심장, 신장, 간이 5명의 장기이식대기자에게 전해지고 서너 달 후 저희 가족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를 쓴 주인공은 다름 아닌 봄이의 장기를 이식받고 건강을 회복한 이식인들이었습니다. 감사하다는 그 편지를 받고, 가슴 한 켠이 뭉클해졌습니다. 하늘나라로 떠난 봄이를 통해 5명의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봄이 역시 그들을 통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살아서 평생이 지나도 하지 못할 일을 우리 딸 봄이가 아주 어리고 앳된 나이에 하고 갔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내가 한 평생 이 땅에서 살아가며 구할 수 있는 생명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우리 봄이는 그 어린 나이에 5명이나 살리는 대단한 일을 했구나. 이토록 아름다운 아이가, 내 딸 봄이가 내 곁에 잠시나마 살아준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장기기증으로 세상을 밝힌 봄이네 가족의 우선순위는 사랑과 나눔

 세계헌혈자의날 행사를 주최한 '한마음혈액원'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1-5 디자인랩' 대표(나웅주)는 봄이 여동생의 남편이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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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가 뿌린 사랑의 씨앗이 가족을 통해 꽃피고 있다. 봄이네 가족은 삶의 우선순위를 사랑과 나눔에 두었다. 전문경영인과 산부인과 의사에서 은퇴한 부모는 봉사활동과 나눔이 우선이고, 국제변호사인 봄이 오빠는 유엔(UN) 산하기구에서 빈곤국과 개발도상국을 돕는 일을, 디자인 전문가인 봄이 동생 부부는 재능기부로 세상을 밝히고 있다.

봄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중증 장애인 사회복지시설인 (사)광명사랑의집을 찾아가서 장애우들을 목욕시키고 밥을 먹이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또 제빵 기계 지원을 통해 이주노동자와 몽골 빈민들을 도우려고 애썼던 봄이 아버지는 몽골에 세워진 '밝은미래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오빠 한신범(37)씨는 봄이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었다. 미국 뉴욕에서 국제 변호사로 일하다가 귀국한 한 변호사는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서울사무소에서 10월부터 활동할 예정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빈곤 국가의 빈곤 감축과 개도국의 산업개발 지원을 위해 세워진 이 기구에서 한 변호사는 국제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가로 활약하게 된다.

여동생 한채연(33)씨는 재능기부로 밝은 세상을 디자인하고 있다. 금강기획 광고디자인팀에서 일했던 채연씨는 2011년 6월 디자인전문가인 남편과 함께 디자인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소 이름은 봄이 언니가 자신의 한 생명으로 다섯 생명을 살린 것처럼 디자인으로 세상을 밝히고 싶어서 '1-5 디자인랩'이라고 지었다.

'1-5 디자인랩'은 사회적 기업인 '공부의 신'과 '함께 일하는 세상' 등에 CI를 개발해 무료 제공하는 등 재능기부로 동참했다. 올해 1년 동안은 국내 최초의 민간혈액원인 '한마음혈액원'에 대한 광고, 홍보, 이벤트 등의 커뮤니케이션 프로젝트를 무료로 돕고 있다. 한마음혈액원 주최로 지난 6월10일~12일까지 사흘간 청계광장에서 열린 '세계헌혈자의날' 행사에서는 헌혈캠페인 티셔츠 디자인 등으로 행사를 빛나게 했다.

한채연씨는 11일 "봄이 언니의 장기기증을 통해서 부모님뿐만이 아니라 오빠와 막내인 저까지 삶의 가치가 바뀌었다"면서 "봄이 언니의 고귀한 뜻을 따라 디자인으로 사회의 가치를 높이고 공헌하는 사회적 디자인(social design) 회사를 꿈꾸고 있다"는 소망을 들려주었다.

봄은 떠나지만 햇살 머금고 돌아온다. 다시 돌아와 봄눈과 언강을 녹이면서 봄꽃들을 춤추게 한다. 겨울 추위에 겁먹고 웅크렸던 만물들은 비로소 생명의 노래를 부른다. 그렇듯이 봄이는 미국의 어디선가 누군가의 심장으로 뛰고 있고, 그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뇌사의 아픔을 장기기증으로 녹이면서 비탄에 처하지 않았던 봄이네 가족은 손잡고 사랑의 길을 가고 있다.

 '1-5 디자인랩'은 봄이 여동생 부부가 설립한 디자인연구소로 봄이 언니의 고귀한 뜻을 받들기 위해 재능기부로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세계헌혈자의날에 재능기부한 뒤에 기념촬영한 '1-5 디자인랩' 식구들(왼쪽에서 두번째가 나웅주 대표, 세번째가 한채연씨)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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