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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월요일
Harrodsburg, KY - Holy cross 인근 Fogle road
55.5 mile ≒ 89.3 km

유리창이 빗방울로 얼룩진다. 시커멓던 구름이 가느다란 빗줄기를 연신 뿜어낸다. 기상예보로는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애쉬랜드(Ashland)에서 뺨을 후려치던 폭우에 비하면 이 정도 가랑비는 콧방귀가 나올 정도다. 4박 5일간 환상을 맛보았던 윌모어(wilmore)를 떠난다.

끝없는 주방일로 형수님은 미처 나오지 못하고 시온, 이삭 두 꼬맹이가 삼촌을 배웅한답시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기특한 녀석들.

꿈만 같던 조우가 이뤄진 베리아(berea)는 여기서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 전 구간을 자전거로 달리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부탁하기에는 염치가 없다. 대신 윌모어(wilmore)에서 가장 가까운 해로즈버그(Harrodsburg)부터 여행을 시작하기로 타협을 본다. 페더럴 루트(Federal Route) 68번을 타다 스테이트 로드(State Road) 152번을 만났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이 서쪽 방향으로 다시 시작된다.

6년 만의 상봉은 또 다른 이별이 되었다. 긴장 풀고 쉴 때는 몸이 근질근질하더니 다시 라이딩을 시작하려니 진한 아쉬움에 멈칫할 수밖에 없다. 사촌형은 여비에 보태라며 용돈을 건네고, 아이들은 손을 흔든다.

조카 시온이가 자전거를 잡아 주는 사이에 나는 앞 바퀴를 연결한다.
▲ 새로운 출발 조카 시온이가 자전거를 잡아 주는 사이에 나는 앞 바퀴를 연결한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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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무리 가봤자 차로 1시간 거리네. 도착해서 연락 주면 내가 데리러 갈게. 잠은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다시 거기로 데려다줄게. 그날 도착해서 내가 또 데리러 가면 되지. 이렇게 하면 날마다 우리 집에서 잘 수 있겠다."

물보다 진한 피를 느끼며 웃는다. 자전거에 올라탄다. 며칠 만에 느껴보는 안장이 새롭다. 페달을 밟으면서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그들. 조금씩 작아지던 모습이 칼리지 스트리트(college street)를 향해 좌회전을 하니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별은 또 다른 시작이다.

SR 438번 도로로 접어드니 링컨 농장 주립공원(Lincoln homestead state park)를 지나게 된다. 미국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켄터키 주를 실감한다.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켄터키 호겐빌(Hodgenville)에서 남쪽으로 3마일 떨어진 놀린(Nolin) 강 근처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북동쪽으로 10마일 떨어진 납크릭 농장(Knob Creek Farm)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페더럴 로드 62번에서 구드리 드라이브웨이(Guthrie Driveway)로 꺾기 전 근처 바즈타운(bardstown)이 모습을 드러낸다. <켄터키 옛집(My Old Kentucky Home)>이라는 유명한 곡을 쓴 스테판 포스터(Stephen Foster)와 연관이 깊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 위치한 자택에서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까지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도중에 사촌이 사는 켄터키 주, 바즈타운의 페더럴 힐 맨션(Federal Hill mansion)에 들렀다가 영감을 얻어 곡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학자들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1851년 베스트 셀러가 됐던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t Beecher Stowe)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인상 깊게 읽은 스테판이 그 유명세를 이용해보려 곡을 지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그네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 갈 길이 멀어 명소를 일일이 들를 여유가 없다. 내리막과 오르막이 심심치 않게 있지만 경사도가 높지 않아 평균 시속 10마일이 나온다. 원래 목적지는 하워즈타운(Howardstown)이지만, 늦은 출발 덕에 17마일을 남겨두고 저녁 7시가 되었다. 더 이상은 무리다.

차고 앞에 의자를 놓고 나란히 앉아 있는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부부와 아들. 그리고 인근에 사는 처남이 담소를 나누는 중이다. 오랜만에 신공을 발휘해야 할 순간이 왔다.

"앞마당에 텐트를 좀 쳐도 될까요?"

허락은 하지만 내게는 도통 관심이 없는 그들. 대화 삼매경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뭐하는 녀석인지, 어디 가는 길인지 물어 볼 기미도 없다. 머쓱해져 주변을 서성거리다 텐트를 짓기 시작했다.

바닥에 풀어놓은 짐 사이를 고양이가 돌아다니고 있다.
▲ 여행자의 짐 바닥에 풀어놓은 짐 사이를 고양이가 돌아다니고 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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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컵라면이다. 스토브에 물을 끓여 용기에 붓는다. 오랜만에 조촐한 식사를 하니 요 며칠간 즐겼던 '황제의 식탁'이 생각난다. 정겨운 친척들과 옹기종기 둘러앉아 먹던 화기애애한 식사자리.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세차게 밀려드는 파도는 해변 위에 성급히 세운 모래성을 금새 무너뜨리고 만다.

스스로 택한 고독함이지만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값이 나왔다. 제가 쳐놓은 그물에 걸린 거미. 공중에서 버둥거리며 '외로움' 백신을 맞는다. 투명한 용액이 팔뚝에 꽂힌 바늘을 통해 울룩불룩한 정맥을 따라 흘러들어간다. 사지말단의 모세혈관까지 파고드는 액체는 몸을 휘감아 나를 깊은 늪으로 잡아끈다. 14시간 동안 태평양을 건너 착지한 미 대륙, 조그마한 마을 풀밭에서 몹시 사람이 보고팠다.

무엇을 위해 여행하는가? 사람들이 묻는다. 지금밖에 시간이 없으니까, 인생에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나만의 도전이다 등. 세 치 혀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을 해대지만 기실 나조차도 알 수 없다. 진정한 여행은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걷는 것이라는 말을 누가 했던가. 애스토리아에 도착하면 해답이 조금이라도 보일 거란 헛된 기대를 품는다.   

6월 12일 화요일
Holy cross 인근 Fogle road - SR 920번과 84번의 교차점
61.5 mile ≒ 98.9 km

점점 캠핑에 능숙해진다. 7시가 약간 지난 시각. 눈을 뜬다. 아침을 먹고 너저분한 짐을 정리하기까지 9시가 채 되지 않았다. 속도가 붙는다. 기세를 몰아 맥다니엘스(Mcdaniels)까지 가기로 맘먹는다. 약 80마일. 아직 무리지만 이른 출발시간을 한번 믿어본다.

탁상행정은 현실과 일치하지 않았다. SR 52번과 SR 247번의 교차로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고야 말았다. 오른쪽으로 내달리는데 3~4마일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바로 근처에 게세마니 수녀원(abbey of our lady of gethsemani)이라는 큰 이정표가 있음에도 길을 놓치다니. 라이더의 굴욕이다.

버팔로(buffalo)를 지나 SR 61번을 따라가다가 US 31E 도로에 이르자 표지판 하나가 시선을 잡아끈다. 에이브러햄 링컨 출생지 국립사적지(Abraham Lincoln Birthplace national historic site).

불과 오른쪽으로 0.2마일. 고민이 된다. 여기서 시간을 조금이라도 보내면 맥다니엘스(McDaniels)까지는 무리다.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 참고하는 기준이 하나 있다. A를 선택하고 B를 포기하였을 때 아쉬움이 크다면 나는 B를 택한다. 난 링컨을 보고 싶다.

1808년 12월 토마스(Thomas)와 낸시(Nancy) 부부는 놀린(nolin) 강이 흐르는 싱킹 스프링 농장(sinking spring farm) 300에이커를 200달러에 사들인다. 옛집을 떠나 남서쪽으로 14마일 떨어진 농장으로 이사 가는 날. 첫째 아이 사라(Sarah)는 불과 한 살이었다.

싱킹 스프링 농장의 붉은 흙은 그다지 기름지지 않았다. 근처는 불모지였고 목초지를 만들려는 인디언이 불을 놓아서 나무도 자라지 않았다.

그들의 보금자리는 당시 개척자들이 흔히 살던 통나무집이었는데, 흙바닥에 창문 하나, 문 하나가 달렸고 작은 화덕, 지붕, 그리고 진흙과 짚, 나무판자로 만든 낮은 굴뚝이 조촐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1809년 2월 12일 일요일. 옥수수 껍질과 곰 가죽으로 만든 침대에 누워 있던 낸시는 아이를 낳았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그가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다.

아버지 토마스는 농장 일 외에도 간간히 목수일과 캐비넷(진열용 선반이나 장) 작업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어머니 낸시는 가족을 위해 화덕에서 빵과 옥수수, 돼지고기를 요리했다. 검소한 생활이지만 가난하지는 않았다. 두 개의 농장과 엘리자베스 타운의 여러 부지, 가축들을 가지고 있던 링컨 일가는 그 지역에서 부유한 축에 속했다. 1811년 10마일 떨어진 납 강(Knob creek) 인근 농장으로 이사 가기까지 링컨 가족이 2년 동안 살았던 싱킹 스프링 농장.

링컨 가족이 떠난 농장에 위치한 기념관 건물 안에는 통나무집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1894년 뉴욕의 사업가 데닛(A. W. Dennett)은 링컨 농장을 구입하여 통나무집 하나를 싱킹 스프링 근처로 옮긴다. 얼마 후 분해된 집은 많은 도시를 옮겨 다니며 전시되었다.

1905년 <주간 콜리에(weekly collier)>의 편집장인 로버트 콜리에(Robert collier)가 이 농장을 다시 사들인 후 1년 후인 1906년 마크 트웨인(Mark Twain),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새뮤얼 곰퍼스(Samuel Gompers) 등의 유명 인사들과 함께 링컨 농장 연합(Lincoln Farm Association)을 결성한다. 제16대 대통령이었던 링컨의 출생지를 보존하고 기념관을 건립하려는 계획이었다.

같은 해 그 통나무집을 사들인 연합회는 건립을 위한 모금행사를 개최하여 십만 명의 시민들로부터 35만 달러를 모았다. 1909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초석을 놓고, 1911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대통령이 기념관 완공식을 열었다. 존 러셀 포프(John Russell Pope)가 디자인한 이 건물은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191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기념관과 싱킹 스프링 농장은 1959년 에이브러햄 링컨 출생지 국립사적지(Abraham Lincoln Birthplace 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되었다.

나중에 가짜로 밝혀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상징적인 의미로 남아있다.
▲ 링컨 메모리얼 빌딩 안에 전시된 통나무집 나중에 가짜로 밝혀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상징적인 의미로 남아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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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얼 빌딩(memorial building) 안에 신주단지처럼 모셔져 있는 가짜 통나무집을 보았다. 191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40여년이 흐른 후 추가 조사를 통해 실제 링컨 가족이 살았던 집이 아님이 밝혀졌다. 링컨을 기리기 위해 상징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보존되고 있다.

안장에서 내려 오랜만에 걸으니 발바닥에 닿는 땅의 감촉이 낯설다. 주변엔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링컨의 흔적을 느끼며 걷고 있었다.

이젠 가야 할 시간.

'링컨 아저씨. 안녕. 당신이 미국 역사에 남겼던 발자취만큼은 못하지만 나름 이 땅에 내 흔적을 박아두려 합니다.'

안장에 올라타고 내 애마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

10킬로미터를 남겨두고 한 가정집 앞에 주차를 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잔언덕이 많아 피로해진 몸을 추스르며 마지막 스퍼트를 하려는 참이었다. 차량 한 대가 들어서더니 전신주 관리 업무를 하는 남자 2명이 내렸다. 자전거 여행자임을 밝히자 그들은 무척 호의적이었다. 스프레이식 살충제를 건네주고 집주인에게 부탁해 음료수 두 통을 얻어온다. 예상치 못한 환대는 언제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집주인은 넌지시 당신 집에서 묵어가기를 바랐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맥다니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다. 넓은 정원과 단정한 주택에 군침이 흘렀지만 기어이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료품점에서는 여행자에게 샤워시설을 제공하는데, 보이는 그대로 매우 난잡했다. 수많은 잡동사니가 들어찬 화장실 겸 샤워실을 보면서 왜 돈을 안 받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 더블 엘 식료품점(Double L grocery) 식료품점에서는 여행자에게 샤워시설을 제공하는데, 보이는 그대로 매우 난잡했다. 수많은 잡동사니가 들어찬 화장실 겸 샤워실을 보면서 왜 돈을 안 받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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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후 목적지에 도착. SR 920과 SR 84의 교차로에 위치한 더블 엘 식료품점(Double L Grocery)은 캠핑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노트에 중간점검 결과를 적고 잠자리에 들었다.

주행거리 : 902.5마일 / 남은 거리 : 3337.5마일
예상 소요 시간 : 하루 60마일 = 55.6일 / 하루 70마일 = 47.6일

6월 13일 수요일
Double L Grocery Store - Utica, KY
70mile ≒ 112km

캠핑을 하다보면 적절한 위치선정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시멘트 바닥은 깨끗하고 편평하나 깊은 잠에 들기에는 딱딱하고 차갑다. 푹신한 풀밭이 최적의 장소지만 돌멩이나 솔방울을 미리 치우지 않으면 잠자리에서 뒤척이다가 극심한 따가움에 잠을 깨고야 만다. 크게 그늘을 드리운 나무 밑에 텐트를 치면 비바람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

더블 엘 식료품점(Double L grocery)에 도착했던 어제, 쾌적한 잠자리를 위해 세 번이나 텐트를 옮겨다녔다. 이른바 '천막 삼천지교(三遷之敎)'다. 아침 6시부터 가게 문을 연 아주머니가 텐트 밖을 배회하던 나를 맞아준다.

"캠핑 비용이 얼마죠?"
"노, 노. 우리는 돈을 받지 않아."
"그럼 도네이션(donation, 기부)도 안 받나요?"

간단한 저녁식사와 세탁기, 샤워실을 제공했는데도 주인 아주머니는 돈을 받지 않았다. 여행자가 머물 만한 방을 마련해놓지 않았기에 숙박비를 받기 미안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대로 가기엔 염치가 없었던 나는 카운터 한 켠에 놓인 음료수 컵을 기부함으로 명명하고, 3달러를 집어넣었다. 명실상부한 첫 기부자가 된 셈이다.

아침 해가 따갑게 내리쬐는 가운데 시간은 9:00. 서쪽으로 불과 몇 마일을 이동하자 1시간의 시차가 발생한다. 브레큰리지 카운티(Breckinridge county)에서 하딘 카운티(hardin county)로 넘어가면서 대륙시간대를 하나 지난 것이다.

17마일을 달리고 달려 맥다니엘스(McDaniels)에 이르렀을 무렵 반대편에서 친숙한 인영이 보인다. 동쪽을 향해 진격하는 여행자다.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멈춰 통성명을 시작했다.

내게 자전거 여행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 패트릭 기어리(patrick Geary) 내게 자전거 여행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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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기어리(patrick Geary)는 영국 출신으로 이번 횡단을 위해 벼르고 벼르던 미국에 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버지니아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까지 3000마일이 목표다.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요크타운(york town)까지 가지 않는 이유는 윌리엄스버그에 미국인과 결혼한 여동생이 살고 있기 때문. 이른바 남매의 상봉이다.

목적지인 호겐빌(hodgenville)까지는 84마일 정도다. 평균속도가 시속 12마일이니 대략 7시간이면 충분히 돌파 가능하다. 시속 9.8마일을 내는 나와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패트릭의 자전거를 매의 눈으로 살펴보았다. 앞 페니어백이 없다. 핸들바에는 작은 백을 장착해 지도와 핸드폰, 지갑 등 자주 쓰는 물건을 넣어두었다. 뒷 페니어백의 크기도 그다지 크지 않은 걸로 미루어 필요한 물건을 최소 한도로 준비한 모양이다. 클릿슈즈를 장착한데다 그를 뒤에서 밀어주는 서풍의 위력이 큰 도움이 되었을 법하다.

상대방을 통해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내게 부족한 부분과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자전거 여행은 자만할 수 없다. 조언을 듣지 않고 자기 혁신을 게을리하면 그 결과는 바로 육체의 피로로 나타난다. 굉장히 정직한 여행이다.

자전거 여행자들을 위해 실내 공간을 제공해준다.
▲ 소방서 in Utica 자전거 여행자들을 위해 실내 공간을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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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티카(Utica)에 도착. 마을 소방서에서는 자전거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를 제공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짐을 몽땅 풀고 선별작업을 시작했다. 버릴 것과 남길 것. 이소룡은 그의 저서 <절권도>에서 버리기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긴다.

어떤 박식한 사람이 선에 관해 알아보려고 저명한 선의 스승을 찾아갔다. 그는 "아! 예. 저도 이미 거기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라는 예지를 들면서 번번이 선인(仙人)의 말을 중단시켰다. 선의 스승은 말을 멈추더니 박식한 사나이에게 차를 권했다. 선의 스승은 찻잔 가득히 차를 붓고는 그 잔이 철철 흐르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됐습니다! 충분합니다!"

찻잔을 받던 사람이 외쳤다.

"더 이상 차를 부으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알고 있소."

선의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자네가 자기 잔을 비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 차 맛을 음미할 수 있겠소?"

버린 만큼 여행은 더 깊은 맛으로 채워진다. 한결 가벼워질 내일을 기대하며 유티카(Utica)의 소방서에서 잠이 든다.


태그:#미국,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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