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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쿠데타를 모의하던 박정희가 1차 거사일로 잡은 날짜는 1960년 5월 8일이었다. 그 무렵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가 극에 달해 민심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거사를 20일가량 앞두고 '4·19혁명'이 일어나 1차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전열을 재정비한 박정희 일파가 2차 거사일로 잡은 날은 이듬해 4월 19일이었다. 4·19혁명 1주년을 기념해 전국에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면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동원해 정부를 전복시킬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상과 달리 당일 별다른 집회 없이 조용히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앞서 두 차례나 실패한데다 군부 안팎에 박정희 일파가 '거사'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날 대로 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박정희는 주변상황에 개의치 말고 주체적으로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하고는 제3차 거사일을 5월 16일로 잡았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하루 전 날인 5월 15일 오후 9시 30분경, 박정희는 신당동 자택을 나서면서 아내 육영수에게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집을 나섰다. 도중에 거사에 참여하기로 했던 몇 사람이 이탈하였고, 군 첩보기관에서 그를 압박해오면서 박정희는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 시각 문래동 6관구사령부에서는 김재춘 참모장 등이 박정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택을 나선 박정희는 그곳으로 향하는 대신 장경순과 한웅진과 함께 청진동 골목의 한 대폿집을 찾았다. 막걸리 술상이 나오자 박정희는 연거푸 세 대접을 한 숨에 들이켰다. 불안함과 초조함을 술 한잔으로 달래려 했던 것이다.

밤 0시를 넘겨서야 박정희 일행은 6관구사령부에 도착했다. 반란군 핵심들은 지휘부격인 김재춘 참모장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입에서는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황이었다. 마침내 오전 3시, 박정희는 만취한 상태에서 3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다리를 건넜다.

최고회의 유일의 '비행동대'... 박정희의 경제참모 '박태준'

 5.16쿠데타 3개월 뒤인 1961년 9월 21일 춘천댐 기공식에 참석한 박태준(왼쪽끝)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왼쪽 세번째)
 5.16쿠데타 3개월 뒤인 1961년 9월 21일 춘천댐 기공식에 참석한 박태준(왼쪽끝)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왼쪽 세번째)
ⓒ 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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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소장의 '5·16쿠데타'는 김동하·박임항·김윤근·이주일 등 만군(滿軍) 선후배 인맥과 김재춘 등 육사 5기생, 김종필 등 8기생들의 주도하에 성사됐다. 이들은 사전에 거사를 모의하거나 직접 병력을 동원, 지휘한 '행동대'였다. 그래서 흔히 이들을 '혁명주체세력'이라고 부르며, 거사가 성공한 후 이들은 최고회의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거사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최고회의에 위원으로 낀 사람이 하나 있다. 그가 바로 박태준 전 포철 회장이다. 육사 6기생 출신의 박태준은 대체 어떻게 5·16 후 최고위원에 발탁됐으며, 또 박정희의 경제참모 역할을 맡게 됐을까?

1947년 초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를 졸업한 박정희는 첫 부임지로 춘천 8연대에 배속됐다. 그해 9월 중위를 거치지 않고 대위로 승진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해 10월 제5기생이 입교했는데 당시 박정희는 1중대장 겸 전술학 교관을 맡고 있었다.

5·16 당시 그를 최측근에서 보좌한 김재춘(5기생)을 만난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27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부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하였으며,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 일제가 패망하자 학업을 중단한 채 귀국하여 당시 2년제였던 육사에 입학했다. 박정희가 6기생 박태준을 만난 것도 바로 육사에서였다.

육사 중대장 시절 박정희는 수학 실력이 우수한데다 자기 규율에 엄격한 박태준을 눈여겨보았다. 박태준이 임관한 후 한동안 교류가 없었던 두 사람은 박태준이 육군본부 인사과장(대령)으로 근무하던 시절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은 박정희가 "참모장으로 나를 보좌해달라"고 요청한 데 대해 박태준이 이를 수락하면서 다시 인연이 시작됐다.

그 후 '군사혁명'을 준비하던 박정희는 어느 날 박태준에게 "임자는 이 일에 참여하지 말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내 식구들이나 좀 돌봐줘"라며 만에 하나 '거사'를 실패할 경우 가족의 안위를 박태준에게 부탁했다. '10세 연하의 제자'인 박태준을 박정희는 마치 동지나 형제처럼 여겼다.

'거사'가 성공하자 박정희는 임시통치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고는 장도영에 이어 두 번째로 의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의장 비서실장에 '비(非) 행동대'인 박태준을 전격 발탁했다. 그해 9월에는 박태준을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담당 최고위원에 임명했는데 이때부터 박태준은 사실상 박정희의 최고 경제참모 역할을 하게 됐다.

현역군인들이 대부분인 '혁명주체' 가운데 이공계 출신은 박태준이 유일했으며, 여기에는 박정희의 두터운 신임도 작용했던 것이다. 집권 후 박정희는 전국을 돌며 발전소, 비료공장, 항만, 도로 등 각종 기공식 및 준공식엘 바쁘게 다녔는데, 박태준은 늘 그림자처럼 박정희를 보좌하며 동행하곤 했다.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오노를 만나 길을 찾아라"

1963년, 박정희에 이어 박태준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김종필, 김재춘 등 '주체세력' 대다수가 정계로 진출하였으나 박태준은 경제인으로 변신하였다. 이듬해말 박태준은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만성적자에 허덕이고 있던 대한중석을 부임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바꿔놓았다.

 1970년 4월 1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착공식에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부총리(왼쪽부터)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1970년 4월 1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착공식에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부총리(왼쪽부터)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 포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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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67년 9월 박 대통령으로부터 포항제철을 창립하라는 '특명'을 받고는 이듬해 4월 포항제철 사장으로 임명돼 '철강한국 건설'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후 박태준의 삶은 '쇳물'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됐고, 그의 이름 앞에는 '철강왕'이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군홧발 출신들이 대부분인 '혁명주체'들이 종합 제철소 건설을 처음 입에 담았을 때 다들 무모한 일이라고 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를 두고 박 정권의 "과시용 사업(Prestige Project)"라며 비웃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채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종합 제철소를 만들 수 있는 기술도, 자본도 없었다.

국내 자본조달을 위해 주식을 공모했더니 모인 돈이 목표액 33억 원의 0.4%인 1300만 원에 불과했다. 그래서 외국자본을 유치하려고 시작했지만 그 역시 퇴짜만 맞았다. 1961년 당시 총 수출액이 4200만 달러에 불과했는데 제철소 건설비만도 그 4배인 1억5000만 달러나 들었기 때문이다.

 포항제철 준공식(1973. 7. 3)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사장(뒷줄 왼쪽)
 포항제철 준공식(1973. 7. 3)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사장(뒷줄 왼쪽)
ⓒ 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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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63년부터 추진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는 제철소 건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차 5개년계획을 구상 중이던 1965년 5월 박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한 길에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둘러보고는 다시 제철소 건설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귀국하자마자 박 대통령은 박태준 당시 대한중석 사장을 찾았다. 박태준은 7세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 일본어가 능통한데다 와세다대학 기계공학부에 다닌 인연이 있어 '주체세력' 가운데 거의 유일한 일본통이었다. 박 대통령은 박태준을 통해 일본 쪽을 두드려볼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당시 한일관계의 막후 인맥인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였다. 오노는 박 대통령 취임 축하사절로 방한해 "자식의 성공을 보는 아버지의 기쁨을 느꼈다"는 망언을 했던 인물이다. 박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오노를 만나 길을 찾아보라고 '특명'을 내렸다.

"오노 부총재가 지금 시점에서 한일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네마와시(根回, 나무를 옮겨 심기 위해 주변을 파서 잔뿌리를 쳐내는 일, 사전 정지작업이란 뜻)'가 중요하다고 하더군. 그걸 하기 위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적합한 인물의 조건을 얘기하는 데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적임자는 임자밖에 없어."

오노가 밝힌 '적합한 인물'이란 '박 대통령이 신임하고 의중도 잘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통역 없이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라면 당시로선 박태준이 유일했다. 결국 박태준이 박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일본이 야하다 제철을 지을 때 채산성을 따졌는가?"

일본으로 건너가 오노 부총재의 후원을 받아 8개월간 일본 내 정재계 인사들을 두루 접촉한 박태준은 귀국해 박 대통령에게 가와사키(川崎) 제철소의 니시야마(西山) 사장이 일본 철강업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얘기를 전해주면서 조언을 받을 것을 권했다.

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한 니시야마 사장은 울산, 포항 등을 둘러 본 뒤 "한국이 발전하려면 제철소를 가져야 합니다. 철광석을 수입하기 위해 바닷가에 공장을 지어야 하고, 규모는 적어도 50만 톤에서 100만 톤은 되어야 채산이 맞습니다"라고 조언했다. 직후 박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제철업을 맡을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철강조사단 파견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1965년 9월 일본 철강회사들이 연합으로 구성한 조사단이 방한하여 3주간 머물면서 포항 등을 둘러보고는 '100만톤 규모 제철소 건립'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듬해 7월 경제장관회의에서 이를 토대로 제철소 건설을 제2차 경제개발5개년사업의 '전략사업'으로 결정했다.

사업이 진행되는 중에 혼선도 없지 않았다. 제철소 건립을 미국 3개사, 일본 3개사, 독일 2개사 등 8개 회사 연합체에 위임하기로 했는데 경제기획원에서 '미국 회사인 코퍼스를 중심으로 구성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 철강협회가 불참을 선언하면서, 일본을 빼고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4개국 회사가 만든 연합체가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다.

KISA와의 협상 끝에 1967년 7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었고 그해 9월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이듬해 4월 1일 자본금 4억 원(정부 3억 원, 대한중석 1억 원)으로 국영기업 포항제철이 창립되었고 그해 10월 3일, 포항 영일만 해안가에서 포항제철소 기공식이 열렸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제철소 건설비 마련이었다. KISA는 선뜻 자금을 내놓지 않았다. 당시 세계은행의 한국 담당자인 영국인 자페는 포철이 경제성이 없다고 본 것이었다. 결국 박태준은 1969년 1월 KISA의 모기업인 코퍼스의 포이 회장을 만나 한국의 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설명했지만 차관을 조달하는 데 끝내 실패하였다.

자금 지원을 못해 미안해하던 포이 회장은 박태준에게 하와이의 고급콘도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했다. 할 수 없이 이곳에서 며칠 휴식을 취하던 박태준은 우연히 포철 건설자금으로 대일청구권 자금을 떠올렸다. 이른바 '하와이 구상'이 그것이다. 당시 8000만 달러 정도의 대일청구권 자금이 남아 있었는데 문제는 '용처'였다.

박태준은 앞서 안면을 터둔 양명학자 야스오카(安岡正篤)와 미쓰비시 상사 후지노(藤野) 사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제철 사업인 만큼 일본정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철강업계를 먼저 설득해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 정부, 그 중에서도 통산성의 오히라(大平) 장관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는 김종필과 함께 '김-오히라 메모'로 한일 청구권 협상을 타결 지은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박태준 일대기 드라마? '박정희 찬양' 불보듯 뻔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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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오히라는 청구권 자금의 '전용'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농업분야에만 쓰도록 돼 있던 청구권 자금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데 반대했다. 오히라는 "우선 식량을 자급자족하기 위해 농촌에 더 투자를 하고 농기구 개발이나 비료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채산성도 없는 제철소 건설을 무리하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박태준은 언젠가 박 대통령에게 들은 일본 역사 얘기를 꺼냈다.

"일본이 청일전쟁 뒤에 군수산업을 위해 야하다 제철을 지을 때 채산성을 따졌는가? 한국은 지금 휴전상태라 방위문제로 제철소가 필요하다."

이 말에 오히라는 "우리 삼촌이 포항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며 우회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을 통해 제철소 건설자금이 확보되자 본격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를 독려하면서 박태준은 직원들에게 "이 제철소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박정희는 3년여에 걸친 공사기간 중에 13번이나 포항 현장을 방문했으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사 과정에서 박태준이 정치인과 관료들의 압력에 시달리자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종이 마패'를 써줬다. 그 마패에는 '박태준을 건드리면 누구든지 가만 안 둔다'고 적혀 있었다. 포철은 가동된 지 1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빚을 다 갚고 흑자를 기록했다.

1992년 10월, 박태준은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가 박정희 무덤 앞에 섰다.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의 건설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성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 드립니다. 빈곤 타파와 경제부흥을 위해 제철소 건설이 필수라는 각하의 의지에 탄생된 포항제철이 바로 어제 조강 생산 2100만 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해 박태준은 세계적 철강상인 '윌리코프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철강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최근 KBS에서 박태준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강철왕>을 준비하고 있어서 대선을 앞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포철의 성공신화는 부인할 순 없지만 '박정희 찬양' 또한 불을 보듯 뻔한 것임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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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