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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도시, 이렇게 집이 많은데 어째서 세입자는 이리도 많은 것일까!
 도시, 이렇게 집이 많은데 어째서 세입자는 이리도 많은 것일까!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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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태양이 기울고 있었다. IMF가 온 나라를 뒤흔들던 1998년 여름 휴가철 막바지, 우리 부부는 여행 가방 대신 이삿짐을 싸야 했다. 제자리에 있으면 꼭 그렇지 않은데도 꺼내 놓으면 남루한 게 살림살이였다. 남루한 살림살이만큼이나 우리 부부 신세도 처량했다.

짐 보따리를 트럭에 싣고 거리로 나서니 아스팔트가 후끈후끈 거렸다. 여름은 마지막 남은 열정을 뜨거운 아스팔트에 쏟아 붓고 있었다.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지간해서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 무던한 아내도 그 날만은 무거운 속내를 얼굴에 고스란히 달고 있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반지하 셋방이었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반지하에서 돌도 안 된 딸을 키울 생각을 하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반지하라도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집이라서 눅눅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됐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사를 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집 주인은 전세금을 돌려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근 한 달 정도를 채근하자 집주인은 어디서 구했는지 전세금의 절반을 돌려줬다. 그 돈 가지고 구할 수 있는 것은 반지하 셋방뿐이었다.

아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든지 이사를 해야 했던 이유는 아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부부가 살던 곳은 너무 외진 곳이라 갓난아기를 키울 수가 없었다.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시장도, 병원도, 변변한 슈퍼마켓도 없었다. 내가 차를 가지고 출근하면 아내와 아이는 그야말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전세금을 절반만 받고 이사를 한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해서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IMF 한파는 세입자뿐만 아니라 건물주까지 사지로 몰아넣었다. 집값은 폭락했고 은행대출금을 갚지 못한 집들이 경매 시장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세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알몸으로 쫓겨나는 세입자가 허다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리 부부는 그야말로 감지덕지하며 그 돈을 받았다. 그동안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 혹시 전세금을 몽땅 날릴까봐 잠 못 이루던 터였다. 당시 집 주인은 실업자 신세였다. 수십 년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무척 곤란한 처지였다. 그러니 감지덕지 할 수밖에.

나머지 절반은 형편이 좋아지면 돌려준다고 했으나 우린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나라 전체가 부도가 났고, 다니던 회사가 폭삭 망한 마당에 어떻게 형편이 좋아질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부부는 집 주인이 써 준다는 차용 증서도 마다하고 결혼해서 2년 동안 살던 집을 '야반도주' 하듯 무거운 마음으로 떠났다.

반지하도 살만하다는 생각, 물난리 한방에 '싸악~'

2011년 안양천, 폭우가 올 때 마다 매년 이런 일이 되풀이 된다. 이 또한 물난리.
 2011년 안양천, 폭우가 올 때 마다 매년 이런 일이 되풀이 된다. 이 또한 물난리.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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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여름에 덜 덥고 겨울에 덜 춥다는 장점이 있어, 그럭저럭 살 만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정작 우릴 괴롭힌 것은 '반지하'가 주는 불편함이 아니라 부부싸움 선수인 3층에 사는 중년 부부였다. 부부싸움 경진대회 같은 게 있다면 분명 그 부부가 금메달을 땄을 것이다. 어찌나 심하게 부부 싸움을 해대던지, 한 번 터졌다 하면 건물 전체가 고함과 비명 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다가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끝내는 경찰 사이렌 소리가 울린 다음에야 조용해졌다.

그 일은 딸아이가 세 살 되던 해 여름에 일어났다. 곤한 잠에 빠져있는 새벽녘, 급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졸린 눈을 비비고 간신히 눈을 떠 보았지만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그때!

"하천이 넘쳤어요. 빨리 일어나세요."

이 소리를 듣고 얕은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침대에서 내려오니 물이 무릎까지 차올라 있었다. 기절초풍 할 노릇이었지만 미처 놀랄 새도 없이 건넌방으로 달려갔다. 세 살배기 딸이 건넌방에서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넌방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가 천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천 번 넘게 '제발 무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천 번 넘게 아기를 바닥에 재운 걸 자책했는데도 내 몸은 딸아이가 자고 있는 방에 다다르지 못했다.

건넌방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세찬 빗소리를 뚫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분명 딸아이 울음 소리였다. '아! 살았구나…' 그 울음은 분명 생명의 소리였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라고 되뇌이며 방문을 열었다.

천운이었다. 아니!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의 보살핌이었다. 아기는 담요를 타고 물 위에 둥둥 뜬 채 엉엉 울고 있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담요가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서 가벼운 아기 몸을 거뜬히 떠받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하천이 넘친 게 아니었다. 게릴라성 폭우에 토사가 밀려와 하수구를 막아 버렸고, 하수구로 빠지지 못한 물이 반지하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그 당시에 마을 뒷산을 깎아서 터널을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건설회사에서 방호벽도 세우지 않고 공사를 진행한 탓이었다.

물난리를 겪고 난 이후 반지하도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워졌다. 그 때부터는 어떻게 해서든 지상으로 올라가자는 생각 밖에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우리 가족은 그로부터 1년 후에 물난리 걱정 없어 보이는 지상 3층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전세금 절반 들고 온 집주인

내게 딱 맞는 집은 어디에.
 내게 딱 맞는 집은 어디에.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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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난리를 겪으면서 세상의 냉정함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고, 자기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건설회사, 집주인 모두 자기들 이익이 우선이었다. 배려, 정의 같은 것은 '이익'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건설회사는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하기에 급급했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배상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욕심 많은 일부 집 주인들은 미래에 나올 배상금이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치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세입자들은 건설회사와 집주인을 상대로 큰 싸움을 하고 나서야 배상을 받을 수 있었다. 피해를 당한 세입자들이 뭉쳐서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다면 배상은커녕, 물난리 원인조차 밝히지 못했을 것이다.

해서, 그 때부터 사람들을 믿지 못해 가재 눈을 뜬 채 살고 있느냐고? 그건 아니다. 난 두 번의 시련을 겪으면서 너무나 소중한 것을 얻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난 지금도 사람을 잘 믿고, 사람 사귀는 것을 밥 먹는 일보다 더 좋아한다.

내게 가장 큰 믿음을 심어준 건 이사할 때 전세금을 반만 돌려준 바로 그 집주인이다. 그가 내 인생 최고의 집주인이다. 그는 약속대로 나머지 절반을 1년여 만에 돌려 줬다. 아직 IMF를 탈출하지 못한 힘든 시기였는데, 어떻게 그 돈을 마련했는지 모르겠다. 차용증 한 장 없기에, 안 갚아도 법적으로 하등의 문제가 없는 돈이었는데도 그는 약속을 지켰다.

물난리가 났을 때는 이웃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문을 두드려 나를 깨운 것도 이웃이었고, 무릎까지 차올라온 물을 밤새 퍼내준 것도 이웃들이다. 세 살 배기 딸아이를 위해 보송보송한 잠자리를 내준 것도 이웃이었고, 우리 가족에게 그날 아침밥을 차려 준 것도 이웃이었다. 그러니 어찌 사람이 믿음직스럽지 않겠는가!

부부싸움 금메달감인 3층 사람(남편)에 대한 선입견도 물난리를 겪으면서 180도 바뀌었다. 난 그를 벌레 보듯이 했었다.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어쩌다 마주쳐도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눈인사만 하고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사람은 오래 사귀고 볼 일이라고, 그 사람은 대단히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가장 열심이었다. 제 몸 축나는지 모르고, 허리 한 번 펴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물을 퍼냈다. 그 밤에 어디서 구했는지, 양수기를 가져와 일을 마무리 지은 것도 그 사람이다. 아마 그 양수기가 아니었다면 우린 그 다음날 까지 꼬박 물을 퍼내야 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물을 퍼내면서, 그 동안 그를 벌레 보듯한 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돌이켜 보니 세입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시간이었다. 그 힘든 세월을 무던히도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며 다 잘될 거라는 열렬한 응원이기도 했다.

길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물난리가 났던 그날, 빗소리와 함께 들렸던 딸의 울음소리, 생명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때 그 좋은 사람들, 지금도 어디선가 환한 웃음으로 주변을 온통 환하게 밝혀주고 있겠지.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에 응모하는 글입니다.



태그:#세입자,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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