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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들어도 뭔지 딱 떠오르는 시(詩)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가곡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이 노래를 안 불러 본 사람, 한 번도 안 들어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중략) 그런데 이 노래가 실은 그동안 겨레를 속여 온 친일 노래다. 참 속상한 일이다..."

 <시로 쓰는 한국근대사> 2권 겉표지
 <시로 쓰는 한국근대사> 2권 겉표지
ⓒ 작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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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쓰는 한국근대사> 2권이 나왔다. 저자인 신현수(54·부광고)씨는 현직 국어교사이자 시인으로, 시와 역사를 한 데 엮어 이미 여러 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 지난 3월 근대의 시작을 다룬 <시로 쓰는 한국근대사> 1권에 이어, 이번 책에서는 그 후 일제강점기 당시 지어진 작품들을 다루고 있다. 책 분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친일시와 저항시의 극명한 대조는, 당시 시인들에게 주어진 두 갈래 길의 빛과 어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위에서 언급한 '시'는, 놀랍게도 <선구자>다. 가곡 <선구자>는 윤해영의 시에 조두남이 곡을 붙인 것으로, 그동안 독립운동가의 기상과 꿈을 표현한 노래로 알려져 '제2의 애국가'라 불릴 만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저자는 책에서 윤해영을 "당시 만주에서 노골적으로 일제를 찬양하고 옹호하는 작품 활동을 하던 친일 시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주국은 1932년 일본이 만주사변으로 점거한 중국 동북지방에 세운 괴뢰국이다. 윤해영은 이곳에서 만주 최대 친일단체인 오족협화회 간부로 활약했다. 윤해영이 쓴 만주국을 찬양한 '락토만주'에도 선구자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선구자란 만주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니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가 독립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설명은 적절해 보인다.

윤해영뿐만 아니라 서정주·이광수·모윤숙·주요한 등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들이 친일시를 썼다. 이 책에 등장하는 친일시는 일제 침략을 정당화하거나 찬양하고 미화한 것, 젊은이에게 지원병으로 나가기를 부추기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한다.

친일-저항, 두 갈림길에 드리워진 명암

친일시 다음으로, 저항시를 쓴 홍사용·한용운·이육사·이상화·윤동주·김소월·김광섭 등의 삶이 그려진다.

"나는 2223번 / 죄인의 옷을 걸치고 / 가슴에 패를 차고 / 이름 높은 서대문형무소 (중략) // 3년하고도 8개월 / 일천사백여일 / 그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 나는 시간을 헤이고 손꼽으면서 / 똥통과 세수대야와 걸레 / 젓가락과 양재기로 더불어 / 추기 나는 어두운 방 / 널판 위에서 살아왔다"

잘 알려진 시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씨가 쓴 <벌>(罰)이란 시의 첫 부분이다. 그는 중등학교 교사 재직 중 학생들에게 아일랜드 시를 강의하며 반일 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1941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아일랜드는 오랜 기간 영국 식민지였다가 1921년 독립한 국가인 만큼 우리나라 처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친일 시인들이 두려워 한 저항의 대가를, 김광섭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톡톡히 치렀다.

저자는 이육사의 시 <절정>을 "수난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은 저항시의 백미"로 소개하고 있다. 이어 이육사가 항일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해방을 일 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일제의 식민정책은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가혹해져 백성들이 큰 고통을 당했고, 신문과 문예지도 모두 폐간됐다. 이 상황에서 시인 대부분은 친일을 하거나 붓을 꺾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제에 항거하는 시를 쓴 이들도 있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에서 쉽게 사라진다. 친일의 기록뿐만 아니라 생생한 저항의 기록 또한 남아 있다는 것은 불행일까 다행일까?

책을 덮은 후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역사가 기억하는 두 갈래의 길 중, 지금까지 따뜻한 햇볕이 비춘 쪽은 어디일까. 모윤숙과 서정주는 각각 1990년과 2000년 죽기 직전까지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리고 일본 형무소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윤동주의 묘는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가 용정에서 찾아낸 것이라 한다. 저자는 이를 두고 "아이러니"라고 평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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