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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의 주요 등장인물. 왼쪽에서 두 번째 및 세 번째가 공민왕(류덕환 분)과 노국대장공주(박세영 분).
 <신의>의 주요 등장인물. 왼쪽에서 두 번째 및 세 번째가 공민왕(류덕환 분)과 노국대장공주(박세영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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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판타지 사극 <신의>에서, 공민왕은 부인인 보탑실리의 안위를 끔찍이 염려하고 있다. 몽골 출신인 부인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중태에 빠지자, 공민왕은 우달치(경호실) 대장인 최영을 시켜 하늘나라(미래세계)에 가서 명의를 데려오도록 했다. 참고로, 보탑실리의 고려 측 시호는 인덕왕후, 몽골 측 시호는 노국대장공주다.

판타지 요소가 섞여 있기는 하지만, 이 드라마는 공민왕에 관한 대중의 시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가 부인을 끔찍이 사랑한 나머지, 부인이 죽은 뒤로 식음을 전폐하고 국정을 방치한 탓에 요승 신돈이 국정을 전횡했다는 것이 대중의 인식이다.

공민왕이 부인 때문에 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칭찬이면서 욕이다. 평범한 남자에게는 욕보다는 칭찬이 되겠지만, 일국을 책임진 통치자에게는 칭찬보다는 욕에 가까울 수도 있다. 정말로 그랬다면, 그는 좋은 남편이지만, 훌륭한 통치자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인 잃은 공민왕, 국정을 방치했을까

그런데 공민왕이 사별의 아픔 때문에 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공민왕의 객관적 행보와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공민왕은 몽골을 몰아냈을뿐만 아니라, 개혁 성향의 선비 그룹인 신진사대부들을 새로운 지배층으로 만드는 일에도 성공했다. 아내 때문에 국정을 방치했다면, 과연 이런 업적이 가능했을까?

이 의문을 해결하자면, 노국대장공주에 대한 공민왕의 애정을 해부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남의 부부관계를 파헤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민왕이란 군주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고려사> 곳곳에 산재한 기록들이 증언을 해줄 것이다.

공민왕이 등극하기 전에 결혼한 노국대장공주는 오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공민왕 14년에 드디어 임신을 했지만, 난산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고려사> '공민왕 세가'에 따르면, 이때는 공민왕 14년 2월 16일(1365년 3월 8일)이었다.

부인을 잃은 공민왕을 두고 <고려사> '노국대장공주 편'에서는 "왕은 공주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두고 밤낮으로 초상화와 마주앉아 음식도 먹고 슬피 울기도 했으며 삼년간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참고로, 공민왕이 직접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화가였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부인을 열애했다는 인식의 출처는 바로 위 기록이다. 위 기록에서는, 공민왕이 부인을 잃은 뒤로 거의 폐인처럼 살았다고 했다. 이것을 보면, 공민왕이 부인을 사랑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폐인처럼 살았다는 그 기간에 그가 매우 활력적인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SBS드라마 <신의>에 나오는 공민왕(류덕환 분)
 SBS드라마 <신의>에 나오는 공민왕(류덕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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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폐인처럼 살았다는 그 기간에 공민왕은 아주 적극적으로 재혼 상대방을 구했다.

<고려사> '신돈 열전'에서는 "(부인과 사별한 지 1년 뒤에) 왕이 후계자가 없으므로 왕비를 구하고자 덕풍군 왕의, 산기상시 안극인, 정랑 정우, 판관 정양생의 딸들을 궐내에 데려다가 직접 골라 뽑았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왕비 후보를 심사하는 일은 왕실 여성 어른들의 몫이었다. 이런 자리에 신랑 후보가 나타나는 것조차 관행에 어긋난 일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단순히 참관하는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신붓감을 직접 심사하기까지 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다. 이 점은, 부인을 잃은 뒤에도 그가 왕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둘째, 폐인처럼 살았다는 그 기간에 공민왕의 개혁은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다. 공민왕의 개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몽골과 친몽골파를 몰아낸 것이다(A). 또 하나는 수구세력인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신진사대부들을 앉힌 것이다(B). 개혁 A는 집권 초반에, 개혁 B는 집권 후반에 크게 성취되었다.

개혁 B가 큰 성과를 거둔 시점은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지 10개월 뒤인 공민왕 14년 12월부터였다. 공직에 진출한 지 1개월 밖에 안 된 승려 신돈이 이때부터 공민왕을 대신해서 수구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공민왕 폐인'설의 진실

무명의 승려가 공직 취임 1개월 만에 단독으로 정계개편을 단행하는 일은 누가 보더라도 무리다. 행정·정치 경험이 전혀 없을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반도 없는 인물이 1개월 만에 국정을 장악하는 것도 힘든데, 1개월 만에 적과 동지를 가려내어 숙청작업을 벌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코치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 신돈의 정치투쟁으로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를 계산해보면, 이 투쟁의 지휘자가 실은 신돈이 아니라 공민왕이었다는 점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돈의 숙청작업으로 쫓겨난 이들은 공민왕의 적인 권문세족들이었고, 그 덕분에 이익을 얻은 것은 공민왕의 우군인 신진사대부들이었다. 유학자인 신진사대부들의 득세는 불교 승려인 신돈 자신에게는 별로 이롭지 않은 일이다. 신돈은 그저 공민왕의 일을 했을 뿐이다.

이것은 신돈의 정치투쟁이 신돈보다는 공민왕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공민왕이 폐인처럼 살았다면, 그의 이익이 자동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을까? 공민왕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의 이익이 실현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신진사대부는 공민왕이 죽은 지 18년 뒤에 조선을 세웠다. 그들이 공민왕에게 항상 감사했다는 점은,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공민왕의 신당이 세워진 이례적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신돈이 아니라 공민왕이 신진사대부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셋째, 폐인처럼 살면서 국정을 방치했다는 그 기간에 공민왕은 신돈을 감시하고 제어했다. 이 점은 신돈이 이상 조짐을 보이자 공민왕이 즉각 그를 제거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명성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신돈은 독자노선의 조짐을 보였다. 행정조직을 임의로 개편하려 하고 충주로 천도할 계획까지 세운 것이다. 이런 기운이 감지되자, 공민왕은 즉각 개입했다. 정부 관리들을 움직여 신돈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성한 뒤 신돈을 전격적으로 처형했다. 공민왕이 상심에 빠져 정치에서 손을 뗐다면, 이런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공민왕의 교서. 1360년에 공민왕이 복주목사(안동시장) 정광도의 공로를 치하하는 내용이다. 사진은 경기도 남양주시 몽골문화촌에 전시된 복제품.
 공민왕의 교서. 1360년에 공민왕이 복주목사(안동시장) 정광도의 공로를 치하하는 내용이다. 사진은 경기도 남양주시 몽골문화촌에 전시된 복제품.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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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백성들이 보기에는 신돈이 권력을 잡은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공민왕이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민왕이 적시에 정부를 움직여 신돈을 제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인의 초상화나 쳐다보며 상심에 빠져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권력의 향방을 예의 주시하며 정적뿐만 아니라 신돈까지도 관찰하고 있었던 셈이다.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상심에 빠져 폐인처럼 살았다고 하는 그 기간에 공민왕은 재혼 상대방을 직접 고르고 정적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대리인인 신돈까지도 치밀하게 감시했다. 부인을 잃고 슬퍼했고, 또 그렇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폐인까지 된 건 아니었다. 

공민왕이 부인을 잃고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수구세력이었다. 그런 '소문' 때문에 그들은 공민왕을 쉽게 생각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민왕은 신돈을 내세워 그들을 척결했다. 대리인인 신돈 역시 그런 소문의 피해자였다. 그 역시 공민왕을 쉽게 생각했다가 뜻밖의 화를 입은 측면이 있다.

부인 죽음까지 이용한 이 남자의 치밀함

만약 공민왕이 정말로 폐인이 되었다면 재혼 상대방을 구하거나 수구세력을 척결하거나 신돈을 토사구팽 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은 그렇게 했다. 이것은 공민왕이 정말로 폐인이 된 게 아니라, 폐인처럼 행동했을 뿐이란 걸 의미한다.

공민왕은 부인의 죽음이 슬프긴 했지만, 그 죽음을 이용해 정적들을 안심시키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숙청작업을 단행했다.

사실, 공민왕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몽골의 지지를 얻지 못해 두 차례나 왕위 계승 경쟁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고려왕에 책봉되기 위해 몽골 황실과 기황후(고려 출신 황후)에게 충성을 다할 듯이 행동했다.

그런 과정에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결혼이 성사됐다. 몽골의 환심을 얻고자 노력한 결과로 그것이 성취된 것이다. 그래서 이 결혼은 처음부터 다분히 정략적인 것이었다. 두 사람의 부부관계가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인을 대하는 공민왕의 태도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이 부인을 잃은 뒤에 폐인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여 그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그가 부인을 덜 사랑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부인의 죽음을 이용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행위를 도덕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확실히 한 것은, 공민왕이 부인을 잃은 뒤에 폐인이 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항상 의식했다는 점이다.


태그:#신의, #공민왕, #노국대장공주, #신진사대부, #권문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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