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24일 금요일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는 안 집사의 제안에 흔쾌히 승낙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더욱이 고건물(古建物) 관찰에는 사진 촬영이 필수인데, 시간을 내 보겠다는 서울의 박 목사에게서 그 시간에 다녀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연락이 왔다. 하마터면 일정이 연기될 뻔 했다. 어느 곳을 방문하든 비는 반가운 동행자가 되지 못한다.

안 집사는 우리끼리라도 가자고 했다. 그 교회 목사에게도 연락을 취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리가 없다. 오후 4시로 약속을 잡았다. 그런 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박 목사에게서 무리해서라도 동참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KTX를 타고 와서 그 기차를 타고 올라간다면 밤 9시 30분 심야기도회에 닿을 수 있겠다고 했다. 먼 거리 방문 치고 교통비가 다소 부담이 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하지 않겠느냐며 넉넉한 마음을 내비쳤다.

1921년에 건축된 이 기와집 예배당은 잘 관리하고 보존하려고 애썼지만 비가 새고 벽 사이 틈새가 벌어져 빠른 돌봄이 요구된다.
▲ 후평교회 구 예배당 전경 1921년에 건축된 이 기와집 예배당은 잘 관리하고 보존하려고 애썼지만 비가 새고 벽 사이 틈새가 벌어져 빠른 돌봄이 요구된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우리 몇 명이 방문하기로 한 곳은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153번지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후평교회'이다. 주소지로 봐서는 잘 와 닿지 않겠지만, 두메산골에 위치해 있는 교회다.

1899년에 창립되었다고 하니 금년 113년의 전통을 가진 교회이다. 우리나라의 초창기 교회들은 그 나름대로의 발생 배경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로 알려진 솔내(松川)교회는 서상륜이 고향 장연에 1884년 세운 자생 교회로 알려져 있다. 교회사가 백낙준 박사는 솔내교회를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잊을 수 없는 요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장로교 최초의 교회는 1887년 9월 선교사 H.G. 언더우드가 세운 서울 새문안교회이고, 감리교 최초의 교회는 1887년 10월 H.G. 아펜절러가 창립한 정동제일교회다. 장연의 솔내교회는 자생적 성격과 가족적 성격이 강한 교회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문안교회나 정동제일교회는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서울 한복판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방문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교회는 선교 토양으로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경상도 두메산골에, 그것도 19세기 마지막 해인 1899년에 세워졌다는 데 우리는 관심을 모았다.

개신교의 전래를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입국을 기점으로 삼을 때, 후평교회는 그 14년 뒤에 설립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슨 연유가 있을 법하지만, 그것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고증을 해 줄만한 분이 생존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담임을 맡고 있는 이영룡 목사에 의하면 후평교회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보존할 필요성이 있어 지방 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관계 기관에 신청을 두 번이나 했지만 뚜렷한 사유 없이 반려되었다며 아쉬워했다.

1994년 7월 24일 붉은 벽돌로 새로 건축한 교회 건물은 구 예배당에 바짝 붙여 지어 사택과 함께 1921년에 지은 기와집 예배당을 관리 보존하는데에 오히려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 신축 교회 건물 머릿돌 1994년 7월 24일 붉은 벽돌로 새로 건축한 교회 건물은 구 예배당에 바짝 붙여 지어 사택과 함께 1921년에 지은 기와집 예배당을 관리 보존하는데에 오히려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두메산골 교회의 어려움이 교회에 그대로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을 테지만 팍팍한 현실에 쫓기다 보니 보존되어야 할 기와집 구 교회 건물에 바짝 붙여 사택과 교회 신축 건물을 세워두고 있었다. 머릿돌에 '1994년'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신축 예배당도 지은 지 18년이 된 건물이었다. 현대와 과거의 조화라고나 할까, 하지만 널려 있는 게 현대의 시멘트 건물이고 전통 한옥 기와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세태에 교회 신축 건물과 양옥 사택이 기와집 예배당을 포위하고 있는 듯해 아쉬움이 밀려왔다.

이영룡 목사가 정리해 준 연혁을 보니 한일병탄(韓日倂呑) 이전, 농촌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경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으로 지역 청소년들에게 신앙과 학문을 지도했고, 일제 치하 1919년 3.1운동 때는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고, 그 해 4월 2일 성주 장날을 기하여 만세독립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깨어있는 지역의 생활 센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것이 된다.

지금은 쇠락하여 상주하는 주민이 50여명 남짓 된다고 한다. 그중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그 영세성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1980년대 초 한 때는 출석 교인이 70명 가까이 되었고, 출향인들도 고향 교회에 관심을 가져서 활성화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목사는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고 했다.

역사는 말이 아니라 사료(史料)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무리 오래 된 건물도 그것에 대한 기록이 없으면 역사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나는 후평교회 구 예배당 건물에 무슨 기록이 있을 것 같아 구석구석을 살폈다. 한옥엔 상량문(上樑文)이라는 게 있다. 상량문은  집을 신축할 때 연·월·일·시·좌향(坐向)·축원문 등을 적은 글을 일컫는다. 다행히 천정 마룻대에 희미한 글자가 보였다. 눈을 몇 번이나 닦고 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救主降生 一千九百二十一年"  (구주강생 일천구백이십일년) 

후평교회 구 예배당 천정 마룻대에 씌어 있는 상량문. '救主降生 一千九百二十一年 三月 一十五日'이라고 적혀 있다. 이 예배당의 나이가 91세가 되는 셈이다.
▲ 후평교회 기와집 예배당 상량문 후평교회 구 예배당 천정 마룻대에 씌어 있는 상량문. '救主降生 一千九百二十一年 三月 一十五日'이라고 적혀 있다. 이 예배당의 나이가 91세가 되는 셈이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동행한 박 목사가 1920년대는 단기(檀紀)를 주로 사용하던 때인데, 서기(西紀)를 사용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며 탄성을 자아냈다. 그러니까 이 예배당 건물의 건축 연대가 밝혀진 것이다. 건물의 연수가 올해 91세가 되는 셈이다. 한 세기가 다 되어가지만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옥 건물이 세월의 무게를 홀로 지고 있는 듯해 마음이 아파왔다.

연혁을 보니 교회 신축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1903년에 교회 설립을 위해 충북 황간으로 교인을 파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21년에 기와집 신축 예배당이 헌당되었다.

1903년은 후평교회가 창립된 후 4년이 지난 때였고, 1921년은 22년이 지난 뒤이다. 문헌의 제시가 뒷받침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일 추진의 자연스런 이치를 따져보더라도 후평교회의 1899년 창립 설은 설득력을 가진다. 10평 남짓한 장방형 예배당 가운데 교회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우람한 사각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것은 남녀 성도들이 나뉘어 예배드린 기준이 되는 기둥이라고 한다. 초창기 예배는 남녀유별(男女有別)의 관습에 따라 예배당 가운데를 커텐으로 막고 예배를 드렸다. 정말 천정엔 커텐을 달았던 못 압핀 등의 흔적들이 오밀조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기둥을 중심으로 커텐을 쳐서 서로 볼 수 없게 막고 남녀가 좌우로 나누어 앉아 예배를 드렸다. 이런 것에서도 교회의 역사적 연륜을 읽을 수 있다.
▲ 남녀유별의 예배당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중간 기둥. 이 기둥을 중심으로 커텐을 쳐서 서로 볼 수 없게 막고 남녀가 좌우로 나누어 앉아 예배를 드렸다. 이런 것에서도 교회의 역사적 연륜을 읽을 수 있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오래되었다고 다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래 되어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을 방치하는 것도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이 교회가 도회지에 있는 큰 교회의 사적(史蹟)이라면 이렇게 방치해 두지 않았을 것이다.

후평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교(통합) 소속이라고 하니 먼저 그 교단 관계자들이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쓰러져가는 113년 된 후평교회 구 예배당 건물에 애정을 갖고 정성을 모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감히 해 본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의 기적은 이런데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랜 세월을 교회와 함께 했을 종탑. 신앙의 열정을 잔잔하게 일깨우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 후평교회 종탑 오랜 세월을 교회와 함께 했을 종탑. 신앙의 열정을 잔잔하게 일깨우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후평교회를 중심으로 그곳을 선지동산으로 꾸며 내놓음으로써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도 담금질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지 않겠는가. 전통은 양에서 가늠하기보다 질에서 드러내야 옳다. 질은 외화(外華)가 아니라 내빈내빈(內貧) 속에서 찾을 때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형 교회로 지역에 위화감(違和感)을 주는 것보다, 10평 남짓한 한옥 예배당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이 세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 아닐까. 두메산골에 위치해 있는 113년 된 후평교회를 다녀와서 내 마음이 더 무거운 것은 허술한 관리와 보존의 책임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태그:#후평교회, #1899년 창립, #두메산골 교회, #지방 문화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