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나라는 더 이상 해외입양을 보내야 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부터 해외입양을 통해 확고하게 만들어진 해외입양산업 이윤창출 제도를 통해 우리는 지끔까지 아이를 외국에 팔아서 수입을 챙기는 해외입양 세계 4위 송출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해외입양인과 미혼모의 인권증진을 위해 일하고 있는 '뿌리의집' 김도현 목사는 지금도 여전히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친모와 자녀를 강제이별하게 만드는 우리나라 해외입양의 실태를 국가폭력의 하나라고 정의한다.

"국가폭력에는 학살, 고문과 같은 가시적이고 명백하며 가혹한 폭력이 있는가 하면 비가시적이고 그 폭력의 성격이 분명하지 않은 일종의 연성(軟性) 폭력 혹은 저강도 폭력도 있다. 입양은 어디까지나 친생가족과 아동의 결별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인권유린 혹은 훼손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해외 입양과 한국 민족주의>의 저자이자 스웨덴 입양인인 이삼돌(스웨덴명 토비아스 휘비네트) 박사는 "한국은 왜 OECD 국가 중 유일한 해외입양국인가?"라는 질문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자랑한 한다는 오늘 우리 한국인들에게 던진다. 이삼돌 박사의 이런 질문에 우리 사회와 정부는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하기보다는 이제라도 뼈저리게 반성하고 책임 있는 답변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이삼돌 박사의 질문을 가슴에 담고 지난 23일 '뿌리의집'에서 덴마크 입양인 김소피씨를 만났다.

1973년 서울 동교동에서 발견... 1년 뒤 덴마크로 입양

덴마크 입양인 김소피씨
 덴마크 입양인 김소피씨
ⓒ 김소피

관련사진보기


김소피씨는 1973년 1월 8일 오후 9시 서울 동교동 5-21번지 길가에서 행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날은 그녀의 생일로 기록된다.

기록에 따르면 해외입양 보내지기 전 소피씨는 영양실조에 걸렸고 홀트병원에 얼마간 입원해 있었다. 그녀 왼쪽 엉덩이에는 길이 2cm 깊이 1cm의 흉터가 있다. 그리고 생후 18개월째인 1974년 9월 28일 그녀는 홀트를 통해 덴마크로 해외입양 보내졌다. 소피씨는 자기가 어떻게 해서 덴마크로 해외입양 보내졌는지 전혀 모른다. 다만 소피씨는 1970년대 친모가 미혼모나 가난한 여성으로서 생활고와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 때문에 자신의 양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덴마크에서 입양인으로 자라면서 소피씨가 직면했던 가장 어려웠던 일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 '내가 속한 나라는 어디인가'라는 소속감, 그리고 부모로부터 아이들이 떨어 졌을 때 느끼는 분리불안감이었다.

특별히 소피씨는 십대에 자신에 대한 정체성, 소속감 그리고 이에 대한 혼돈으로 심한 내적 번민과 갈등을 겪었다. 그녀는 입양부모의 지원과 주위 친구들 덕에 이런 혼돈을 그나마 큰 탈 없이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피씨에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을 준 것은 음악이었다.

"음악이 나를 살렸어요. 난 음악을 연주했고 미친 듯이 들었지요. 음악을 통해 나는 현실의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소피씨에게 음악은 마치 구원자와도 같았다.

소피씨가 9세 때 덴마크 가족이 호주의 아들레이드로 이민을 갔다. 그녀가 타향살이에 또 다른 타향살이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덴마크 입양부모님과 아주 화목한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양부모는 소피씨를 입양 한 후 딸 둘을 낳았고 그녀는 여동생 둘과 지금까지도 다정다감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청소년기 '혼돈' 극복하게 해준 음악, 이제는 직업으로

덴마크 입양인 김소피씨
 덴마크 입양인 김소피씨
ⓒ 김소피

관련사진보기


소피씨 직업은 라이브 음악 프로듀서다. 그녀가 10대 때 음악은 자신의 '구원자'였고 이제 음악은 그녀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한 반려자다. 소피씨는 11년 전부터 호주의 인디 밴드와 락 밴드들과 함께 일하며 라이브 뮤직 제작과 뮤직 라이센싱에 관계된 일을 하고 있다. 특별히 최근에는 한국과도 교류하며 호주 락밴드들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소피씨가 어릴 때부터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결국 직업도 음악분야에 몸담게 됐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다. 소피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호주에서 문화예술의 메카라고 알려진 멜번으로 이사와 살고 있다. 멜번에서 소피씨는 '론에스키모(Loneeskimo)프로덕션'이라는 음악회사를 차린 어엿한 사장님이다.

회사 이름을 론에스키모라고 지은 동기에 대해 "어릴 적 덴마크 코펜하겐에 살 때 덴마크는 위에 그린란드와 가까웠어요. 그린란드에는 에스키모인들이 많이 살아요. 에스키모인들이 덴마크로 자주 왔는데 아시아인 같은 외모 때문에 덴마크인들은 종종 저를 '에스키모인'이냐고 물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때를 회상해 소피씨는 자신의 음악회사 이름을 '외로운 에스키모'라고 지은 것이다.

2009년에 소피씨는 미국 동포들로 구성된 뉴욕의 펑키록 밴드 '검정치마(The Black Skirts)'를 호주의 유명한 일일드라마 <네이버(Neighbor)>에 출연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어서 2010년 8월에는 인천 펜타포트(Pentaport) 락 페스티벌에 호주 음악밴드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호주 밴드를 한국에 알리고 동시에 한국 인디밴드들을 호주 무대에 서게 해 알리는 등 한국과 호주 간의 '음악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친부모 찾아 지난 9년 동안 6번 방한

김소피씨, 1974년 입양 보내지기 전
 김소피씨, 1974년 입양 보내지기 전
ⓒ 김소피

관련사진보기


이런 음악적인 성공에도 소피씨는 한시도 자기를 낳아준 친부모가 누구인지 그 궁금증을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지난 9년 동안 소피씨는 오직 친부모를 찾기 위해 자기 모국인 우리나라를 무려 여섯 번이나 방문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꿈에 그리던' 친부모를 찾을 수 없었다.

다음은 소피씨가 한국 친부모님에게 보내는 사연이다.

부모님 저는 당신들을 무조건 용서합니다. 부모님이 저를 1973년 1월 8일 겨울 밤 동교동 5-21번지 길가에 두고 간 것은 제 삶이 조금 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랑과 친절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님의 영원처럼 저는 지금 행복한 음악가로 어엿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제 마음 한편에는 지금까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공허감, 불안감, 그리고 버림받은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부모님을 만나는 그날이 오면, 제 공허감은 충만함으로, 불안감은 안정감으로, 버림받은 느낌은 따스함으로 채워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올 때 까지, 저를 이 세상에 낳아주신 너무도 그리워하는 당신들을 찾아서, 저는 한국을 계속해서 방문할 것입니다...

당신의 딸 김소피 올림

덧붙이는 글 | 김소피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02-3210-2451) 으로 연락 바란다



태그:#김소피, #입양, #김성수, #홀트, #호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