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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고 받은 충격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이 장면을 모두 아실 겁니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건넵니다. 그 중에 빨간 약을 골라 먹은 네오는 세상의 본질을 깨닫고 목 뒤에 꽂혀있는 플러그들을 뽑으면서 캡슐에서 나오게 됩니다. 영화 속 네오에게 있어서 빨간 약을 먹기 전의 세계와 빨간 약을 먹은 후의 세계는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 시공간입니다. 빨간 약을 통해 본질을 깨닫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마르크스 <자본론>은 제게 네오의 빨간 약이었습니다. 마르크스 <자본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 메커니즘이 머릿속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현상 뒤의 본질들이 눈에 들어왔으니까요.

전기전자 분야를 전공하던 저는 주변에 이런 사회과학과 관련한 내용을 공유하고 함께 토론할 친구들이 없었습니다. 다들 전공 관련 수업을 듣고 과제 제출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고 바쁜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인터넷 공간에서 사회과학 학습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안에 자본론 학습모임을 꾸려서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나름 인터넷 홍보에는 자신이 있었던 터라 자본론 학습모임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에도 불구하고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자본론 학습 모임을 진행하면서 항상 반복되는 패턴이 있었습니다. 첫 모임에는 적지 않은 사람이 모여서 다들 열심히 해보자고 분위기가 달궈지지요. 첫 모임에서 과제를 냅니다. 두 번째 모임에서 자본론 제1권의 '상품과 화폐' 부분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할 테니 그 부분을 미리 읽어오라는 것이죠. 그런데 첫 모임에서는 20명 넘게 모였던 사람들이 두 번째 모임에서는 10명 내외로 줄어듭니다. 막상 '상품과 화폐' 부분을 읽어보니 분량도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억지로 읽어 내려가도 내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두 번째 모임부터 탈락자가 속출합니다. 세 번째 모임에서는 '잉여가치의 창출' 부분을 다루게 되는데 이때는 5명 정도로 감소하죠. 그리고 '자본의 시초죽적' 부분을 다루는 네 번째 모임쯤 되면 저를 포함해서 2명 정도만 남죠. 여기까지 가면 자본론을 함께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학습 모임 자체를 지속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됩니다. 모임을 진행할 때마다 참가자가 산술급수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니 모임에 힘이 빠질 수밖에요.

계속 반복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뭔가 수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련한 해결책은 자본론 학습 첫 모임에서 제가 마르크스 <자본론>의 제반 내용을 참가자들에게 우선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마르크스 <자본론>의 전체 구조와 내용을 개략적으로나마 이해하면, 실제로 <자본론>을 읽어나갈 때 해당 내용을 <자본론>의 전체 구조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러면 좀 더 이해도 잘 되고 흥미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다행히 이 방법이 효과가 있어서 예전에 비해 모임 탈락자도 줄어들고 참가자들이 본문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 사실 제 책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이때 자본론 학습 모임용으로 작성했던 강의노트 초안을 토대로 살을 붙여서 쓴 책입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대학에 와서 마르크스 <자본론> 등의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고 세계관이 바뀐 사람들 중 몇몇은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독서토론모임 등을 만듭니다. 이런 모임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상대방에게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서 전달하면, 상대방 역시 자신처럼 개안을 하고 세상을 보는 새롭고 올바른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소위 '운동권'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상대적으로 책을 많이 읽고, 그래서 남들보다 사회과학 지식이 더 많다고 자부하는 운동권일수록 이런 기대가 강합니다. 자신이 잘 아는 만큼 상대방에게 더 쉽고 조리 있게 설명할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떤가요? 자신이 알고 있는 사회과학 이론을 쉽고 조리 있게 설명하고 가르치면 정말로 상대방이 '오! 놀랍네요'라고 하면서 설득이 되던가요? 대부분의 경우 이런 시도는 예상과는 다르게 썩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떨떠름한 반응이거나 심한 경우는 극도의 반발심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 나는 정말 누가 뭐라고 해도 쉽고 조리 있게 잘 가르치고 전달했는데 왜 상대방은 내가 바뀌었듯이 변화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그래! 네 똥 굵다'라는 냉소적인 반응만 돌아올까요?

사회과학 지식이 충만해서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이 사람이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방'에 대해서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20년을 살았다면, 시간으로 환산하면 17만 시간을 넘게 살아온 셈입니다. 30년을 살았다면 26만 시간을 넘게 산 것이고요. 가령 당신이 30살 먹은 사람과 마주 앉아서 1시간 내지 2시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서 '당신은 사실 속고 살아왔어, 사실 우리는 모두 착취당하며 살고 있어'라고 조리 있게 설명한다고 해 봅시다. 만약 이 정도 설명해서 상대방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세상에 그것만큼 오만한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당신은 상대방이 살아온 26만 시간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의 한두 시간 만남이면 이 사람은 눈을 뜨고 새로운 세계관을 얻을 수 있어!' 이것보다 더 오만한 생각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상대방이 살아온 26만 시간은 뭐가 되는 거죠? 사회과학 지식이 넘친다고 자부하고 신나게 떠들고 있는 이 사람은 정작 정말 중요한 것, 즉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사실은 무식한 것이죠. 26만 시간 동안 형성되어 온 뇌세포의 복잡한 연결 구조를 어떻게 한두 시간 정도의 자신의 혀 놀림으로 바꿀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죠? 내 조리 있는 설명을 들은 상대방이 설득되지는 않고 오히려 강하게 반발을 하는 이유는 사실 당연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26만 시간을 한 순간에 부정하고 있는데 그 누가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저는 2006년에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지방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글 쓰는 것은 몰라도 말하고 연설하는 것에는 꽤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다니며 사람이 몇 명만 모여 있어도 바로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보수 양당들의 잘못된 행정을 폭로하고 왜 민주노동당이 대안인지를 나름 설득력 있게 연설했습니다. 노숙자가 박수를 치고 어떤 할머니는 연설을 듣다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지요. 그러다보니 뭔가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착각을 한 번에 날려버린 경험을 하게 됐는데요. 어떤 아파트 놀이터에서 즉석연설을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제 바로 앞에서 연설을 열심히 듣던 할머니 두 분이 연설이 끝나자 조용하게 박수를 쳐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뭔가 통했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때마침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당시 한나라당의 로고송을 튼 선거홍보차량이 지나갔습니다. 그 로고송을 듣자마자 두 할머니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음악에 맞춰 어깨와 무릎을 흥겹게 흔드시는 것 아닙니까? 그때 저는 큰 충격을 받았고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고작 5분에서 10분 정도의 연설이 반응이 좋다고 그 짧은 연설로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정말 오만이었구나, 라고 말입니다. 저는 앞에서 연설을 듣고 계신 두 할머니가 살아온 최소 60년 이상의 그 긴 인생역정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고작 5분 동안 나불거리는 세치 혀로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상대방을 설득해야 할까요? 우선 상대방이 살아온 수십 만 시간에 대한 존중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속으로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대방으로 존중하고 있음을 직접 표현해야 합니다. 마음이라는 관념은 그 자체만으로 직접 전달되지 않으니까요. 예컨대 상대방의 의견이 내가 보기에 어리석고 틀려 보인다고 하더라도 '네에,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라고 긍정하고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해야 합니다. 왜냐면 상대방의 의견은 수십만 시간이라는 삶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와의 한 두 시간 남짓한 인연이 상대방의 수십만 시간이라는 삶 속에서 기억에 남는 소중한 순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진정 상대방을 바꾸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온 수십만 시간과 상대방이 살아온 수십만 시간이 서로 진실 되게 만나야 하는 것이죠. 뭐가 이렇게 어렵냐고요? 당연히 어렵습니다. 수십 만 시간을 살아온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쉽다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필요한 조건에 딱 들어맞는 단어를 말이죠.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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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청춘에게 딴짓을 권한다>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국가의 거짓말>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몇 권의 책을 쓴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