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주연배우 크리스챤 베일과 앤 해서웨이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주연배우 크리스챤 베일과 앤 해서웨이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다크 나이트 라이즈>(이하 <라이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줄어든 배트맨의 분량이다. 러닝타임은 전작에 비해 늘어났지만 오히려 주인공인 배트맨의 비중은 이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검은 슈트를 입고 고담을 가로지르며 활약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던 관객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아쉬운 일이었을 터. 그러나 이 부분이 바로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다.

전작 <다크 나이트>에서 시간상 8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하는 <라이즈>에서 모습을 드러낸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 분)의 상태는 끔찍했다. 배트맨으로서의 활약은 그의 몸과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거듭된 악당들과의 사투로 그의 몸은 양쪽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상했고, 정신은 오랜 연인이었던 레이첼 도스(메기 질렌할)의 죽음으로 붕괴했다.

무너진 배트맨... 이런 영웅 영화는  없었다

지팡이가 없으면 자유로이 보행이 불가능하고,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감춘 채 저택 안에 은둔하기를 8년. 지금까지 히어로를 다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에게 영웅의 고난을 다룬 적은 많았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필수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반드시 삽입되어야만 했던 장면들이기도 했다. 영웅의 비상과 추락, 그리고 부활이야말로 영웅 서사시에서 빠져서는 안 될 흐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영웅을 막다른 길로 몰아세운 적은 없었다. 아이언맨은 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스파이더맨은 초능력이 사라질 뻔했으며, 엑스맨은 뜻을 달리하는 동족과 싸워야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극복할 여지가 있었다. 악당들은 딱 그들이 극복 가능할 정도로만 괴롭혔다. 그러나 배트맨은 아니었다. 몸이 망가져 거동이 불편해졌고, 사랑하는 연인이 악당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이것은 그가 영웅이기 이전에 평범한 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히어로지만 초인이 아니었다. 라스 알 굴(리암 니슨 분)의 밑에서 어둠의 사도가 되기 위해 각종 무술을 전수받고 훈련을 쌓았지만,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뛰어난 과학자 루시어스 폭스(모건 프리먼 분)의 도움으로 각종 신무기를 몸에 둘렀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영화에서 존 블레이크(조셉 고든 레빗 분)가 그에게 "왜 마스크를 쓰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대답한 장면은 영웅이기 이전에 한 명의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절대자나 초인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배트맨 활동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들에게 실제 위험이 닥쳤을 때, 그 때마다 완벽하게 구해낼 수 없으리란 것도 자각하고 있다. 그가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가렸던 건 악당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느 영화 속 히어로들과는 다르게 늘 '자신 이후의' 일을 고민하고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초능력으로 나이를 먹어도 그 힘이 줄어들지 않는 여타의 히어로들과는 다르게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자신의 배트맨으로서의 활동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영화 속에서 그는 언제나 '고담의 상징'으로서의 자신의 영역을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싶어 했다.

<다크 나이트>에서 그는 정의감, 냉철한 두뇌, 뜨거운 심장 등 이상적 영웅의 조건을 두루 갖춘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 분)를 만나고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어둠의 기사)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빛의 기사'가 될 적임자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를 브루스 웨인의 얼굴로 공개적으로 후원하고, 배트맨의 얼굴로 사건을 해결해 힘을 실어줌으로써 배트맨 이후 새로운 고담의 상징, 질서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하비 덴트는 사랑하는 여인 레이첼의 죽음으로 반미치광이 악당 투 페이스로 변해 버리고, 끝내 배트맨의 손에 처단 당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미화하고 배트맨을 악의 축으로 매도한 토대 위에 세워진 '하비 덴트 특별법'은, 고담시의 모든 범죄자들을 가석방 없이 감옥에 가둬 들이면서 적어도 그 후 8년 동안은 고담시를 평화롭게 만들어주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은퇴한 배트맨의 걱정도 한 시름 더는 듯해 보였다.

배트맨 출연 분량이 줄어든 이유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주인공 배트맨과 악당 베인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주인공 배트맨과 악당 베인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그러나 새로운 악당 베인(톰 하디 분)의 등장으로 사정은 변했다. 거짓 위에 세워진 하비 덴트 특별법은 그의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세상은 다시금 배트맨을 필요로 하기에 이른다. 망가진 몸을 고성능 신무기의 힘을 빌려 회복시키고, 피폐해진 정신을 마스크 아래 감춤으로써 겨우 적 앞에 선 배트맨에게는 당면한 적과 맞서 싸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책무가 존재했다. 자신 이후의 고담을 대비하는 것.

<라이즈>에서 배트맨의 분량이 줄어든 것은 바로 그래서다. 영화 속에서 고담시를 점령한 악당 베인과 맞서 싸우는 건 배트맨 혼자가 아니었다. 경찰국장인 짐 고든(개리 올드만 분)과 신참 형사 존 블레이크(조셉 고든 레빗)는 배트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들끼리 잃어버린 고담시를 되찾으려 동분서주한다. 영화는 더 이상 배트맨 혼자에게 모든 책무를 떠맡기지 않고, 공권력, 즉 경찰에게 그 짐을 나눠들라 말한다.

영화 마지막 시가지 전투 장면에서 배트맨과 경찰들이 베인 일당과 맞서 싸우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는 경찰과 공조를 했어도 주로 어두운 밤에, 고든 국장 한 명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악당을 잡아 넘겨주는 선에서 그쳤던 그가 이제는 환한 대낮에, 경찰 3000명의 백업을 받으며 적진으로 돌진한다.

베인의 고담시 침략에 대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경찰 부국장이 마지막엔 제복을 갖춰 입고 선두에 서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는 대목은 이제 더 이상 고담시를 악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책임을 배트맨 혼자 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더 나아가 더 이상 배트맨이 필요 없는 고담시가 완성되어 간다는 말해준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고담시는 악으로 뒤덮인 세상이었다. 도시는 마피아 두목 팔코니에 의해 황폐해졌고, 정의를 실현해야 할 판사, 경찰은 그에게 매수당했으며, 검사는 그의 위세에 겁을 먹어 그를 처단할 엄두를 못 낸다. 배트맨의 등장과 활약으로 <다크 나이트>에서의 고담시는 전보다는 한결 나아졌지만, 여전히 경찰은 악당에게 매수당하고, 정의로운 관료들은 살해의 위협 속에 몸을 사린다.

그리고 <라이즈>에 이르러, 공권력은 악당에게 힘없이 휘둘려지고 이용당하는 처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힘으로 고담시를 지키는 존재로 우뚝 선다. 배트맨이라는 초법적인 존재로 인해 기능이 유지됐던 고담시가 경찰이라는 합법적인 존재로 작동하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리즈의 완결편으로서 <라이즈>가 갖는 가장 큰 의미이다.

이렇게 배트맨이 필요 없는, 하나의 상징이 불필요한 고담시를 만들면서도 블레이크를 브루스 웨인의 저택 아래 기지로 가게끔 안배해 훗날 또 한 번 고담시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로빈'이라는 새로운 상징으로 활약할 수 있게 한 것, 그리고 브루스 웨인과 똑같은 처지였던 고아들을 웨인 저택에 머물게 해 제2, 제3의 배트맨의 탄생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관객에게 선사한 작은 반전이다.

그래서 <라이즈>는 후반부에 비해 느슨했던 전반부, 많은 등장인물로 인해 좀처럼 하나로 응축되지 못하고 분산되었던 이야기, 실종된 캐릭터에 대한 설명 등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 볼 때 단점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하지만, <다크나이트> 3부작 시리즈의 완결편으로 봤을 때, 이보다 더한 감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작품이다. 무려 8년에 걸쳐 대서사시를 완성한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다크나이트 라이즈 크리스토퍼 놀란 크리스찬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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