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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입니다. 그러니까 날짜로는 7월 13일쯤이었던 것 같네요. 저녁, 식탁에서 온가족이 밥을 먹는 중에 둘째 딸 진하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저, 그런데요. 옛날 변소 있잖아요. 재래식 변소요..."

밥먹다가 갑자기 변소 이야기를 꺼낸 둘째 딸 때문에 나머지 식구 셋은 순간 동작을 멈췄습니다. 각자 숟가락을 든 채로 또는 젓가락을 든 채로 일제히 시선을 둘째 딸의 입을 향했죠.

둘째딸은 일순 얼어붙은 우리 식구들의 모습에 약간 놀란 듯했지만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 변소에 빠지면 죽어요?"

아니나 다를까. 역시 엉뚱한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저것이 꼭 밥먹을 때 저런 지저분한 얘길 해야 하나? 변소 이야기만 해도 거시기 한데 변소에 빠진 이야기라니...'

순간 면박을 줄까 하는 마음도 올라왔지만 기분을 잘 다스렸습니다. 둘째 딸이 요즘 극심한 사춘기거든요. 모처럼 식구들에게 먼저 말 걸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죠. 이때 면박을 주면 힘들게 찾아온 대화의 기회마저 날아가 버릴 것 같았습니다.

큰딸은 동생을 한번 째려봤지만 다행히 별말은 하지 않고 계속 밥 먹는 데 열중하더군요.

이럴 때 잘해야 하는 걸 압니다. 개떡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찰떡같이 답해줘야 합니다. 사춘기잖아요. 저는 재빨리 표정관리부터 했습니다. 이깟 한 끼 밥이 문제겠습니까. 바야흐로 딸과 가족들의 대화가 이뤄지려는 마당에요. 그래서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하게 설명해줬습니다. 아내도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답변해준 내용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옛날 변소에는 똥이 계속 쌓여 있었다. 그러니 그곳에 빠지면 위험하다. 몇 년 동안 쌓인 똥은 깊이도 깊다. 가스도 많고 독성이 강하다. 어린애가 빠지면 죽을 수도 있다. 사람은 피부로도 호흡하는데 그런 곳에 빠져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으면 정말 위험하다..."

다행히 둘째딸은 빨리 이해했고 추가 질문 없이 끝날 수 있었습니다. 더 적나라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파고들까 걱정했는데 그 정도 선에서 봐준 것 같습니다. 물론 이미 식욕은 좀 떨어졌지만 어쨌든 저녁 식사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고요.

빌려온 책에도 똥 이야기가...

상처를 치유하는 심리학 이야기
▲ <가족의 두얼굴> 상처를 치유하는 심리학 이야기
ⓒ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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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 읍내에 있는 지역도서관에 갔습니다. 저번에 빌린 책도 반납하고 새 책을 몇 권을 빌려왔는데요. 빌린 책 중에 한 권을 읽다보니 '똥통에 빠진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신기하더군요. 이럴 때 '딱 맞아 떨어진다'는 표현을 하지요. 바로 전날 저녁 우리 가족이 나눈 대화를 누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런 책이 우연히 손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제목은 <가족의 두 얼굴>. 저자는 최광현이라고 돼 있네요. 책에는 주로 심리학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자는 '트라우마가족치료 연구소'라는 걸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족심리 전문가라는 얘기지요.

그래서인지 이 책은 가족 간의 심리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 사이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참 많잖아요? 사랑한다면서도 아픔을 주기도 하는 관계가 가족이기도 하니까요. 이 책은 그런 가족 간의 심리문제를 풍부한 예를 통해 잘 다루고 있습니다. 일단 재미도 있고요.

책을 읽던 중에 중간 정도에서 '변소' '똥통'에 빠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책 내용은 똥통에 빠지면 죽느냐 죽지 않느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 역시 심리치료와 관련지어 풀어놨습니다.

둘째 딸에게 이 부분만 보여줄까 하다가 블로그에 글을 하나 올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딸들이 한 번씩 아빠 블로그에 들어오니까 그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냥 책에 있는 글 몇 페이지를 보여주는 것보다 아빠가 그 대목을 읽고 느낀 점을 적어 두면 언젠가 딸이 찾아서 읽을 테니까요.

자 그럼, 문제의 그 '똥'과 관련된 대목을 한번 보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일단 그대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똥떡'은... 우리 조상들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지혜를 엿 볼수 있는 풍습입니다. 똥떡은 어린이가 똥을 누다가 똥통에 빠졌을 때 부모가 급하게 만들어 주는 떡을 말합니다. 구덩이를 파서 만든 똥통, 즉 재래식 변소에서 어린아이가 똥을 누다가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기곤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똥통에 빠지면 얼마나 놀라고 두렵겠습니까. 혐오스러운 냄새, 수치스러움과 불안감까지 뭉쳐져 아이는 변소 가는 일에 대해 커다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변소에 안 갈수도 없는 일. 변소에 갈 때마다 아이는 똥통에 빠졌을 때의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트라우마가 증폭되는 과정입니다.

현명한 부모들은 이런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재빨리 집에 있는 재료로 똥떡을 만들었습니다. 똥떡으로 부모들은 제를 올려 부정한 귀신이 타지 않기를 빈 뒤 온 동네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는 직접 떡을 들고 동네를 돌며 '똥떡, 똥떡' 하고 크게 소리를 칩니다.

예기치 않은 간식거리를 받아든 이웃들은 아이에게 좋은 덕담을 해주기 마련입니다. '녀석 놀랐겠구나'라며 머리도 쓰다듬어 줍니다. 아이는 이웃들로부터 관심과 격려를 받으면서 자연히 똥통에 빠진 황당한 경험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극복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직면'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없었던 일로 애써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마주보는 것을 말합니다. 똥떡은 변소에 빠진 아이의 불안, 수치, 공포를 치유하는 놀라운 트라우마 치료메커니즘 이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만들어준 똥떡을 통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음날 다시 변소에 갈수 있었습니다."(본문 중에서)

이 대목은 '똥떡'이 가진 심리치료의 효과를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한 단어는 '직면'입니다.

'똥떡'은 '직면'이다

오랜만에 식탁에서 아빠의 손위에 작은 딸의 손이 포게졌다.
▲ 딸과 잡은 손 오랜만에 식탁에서 아빠의 손위에 작은 딸의 손이 포게졌다.
ⓒ 서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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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면'. 직면은 피하지 않고 마주서는 걸 말합니다. 이 책의 저자뿐 아니라 많은 심리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트라우마가 왔을 때 빠른 시간 안에 '직면'을 통해서 풀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사람은 자동으로 방어기제를 발동합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숨거나 도망치려 합니다. 그건 본능입니다. 저도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그게 터질 수도 있습니다. 뭐냐면, 사건의 원인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자책하는 겁니다. '자책', 이건 더 위험한거죠.

그러므로 이런 일이 생기면 가족이나 의지가 되는 사람들이 잘해야 합니다. 피해자 스스로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합니다. 옛날식으로 말하면 '똥떡'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제때 '똥떡'의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 대부분은 평생 내내 그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선택적 기억상실'과 같은 부분 기억상실을 앓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기억은 생생한데 딱 그 사건과 관련된 기억만 나지 않는 거지요. 끔찍한 기억이니까 '잊고 싶다, 잊고 싶다' 하다가 진짜로 그 부분 기억을 잃어버리는 거죠.

성폭행 피해를 당한 어린이나 여성들이 유독 이런 선택적 기억상실 환자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때에 필요한 '직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직면'을 통해서 우린 이렇게 말해줘야 합니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괜찮아. 다 괜찮아"라고요.

영화도 있었잖아요. 로빈윌리엄스와 맷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굿 윌 헌팅>을 보셨는지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쯤에 그런 대화가 나옵니다.  수학천재인 청년 맷데이먼은 성장과정에서 어떤 트라우마를 입은 후 그 천재성을 숨기고 평생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런 맷 데이먼에게 수학교수 로빈윌리엄스가 어느 날 위로를 하죠. 이 장면에서 저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It,s not your fault!"(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먼 나라 영화 이야기할 필요있나요.  공지영 소설의 <도가니>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 사건의 모델이 되었던 실제 학생들은 '직면'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된거죠. 오히려 학교 측에 의해, 교육당국에 의해, 경찰들에 의해, 판사들에 의해, 아주 아주 오랫동안 트라우마를 덧 키워나갔지요.

스스로에게 말해 보세요... "네 잘못이 아냐!"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군요. 둘째 딸의 '변소' 질문 때문에 생긴 이야기가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네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똥떡'은 우리 조상들 때 있었던 좋은 풍습이었습니다.  지금은 재래식 변소가 거의 다 사라져 버려 이런 '똥떡'도 덩달아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이름이 '똥떡'이 됐든 '위로'가 됐든 여전히 우리에게 그런 장치는 필요합니다.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요즘 더 절실한 지도 모르지요.

다들 많이 힘들다고 합니다. 그건 도시에 사는 사람이나 저처럼 농촌에 귀농한 사람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아요.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마음의 상처도 참 많은 것 같고요.

잘못된 제도나 정치에 큰 문제가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겠지요. 제도나 정치가 바뀔 때까지 치유를 미룰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전에라도 상처받은 사람들에겐 지금 당장의 위로가 필요할 테니까요. 저부터 스스로에게 먼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넌 지금 잘하고 있어."

덧붙이는 글 | <가족의 두 얼굴> (최광현 씀 | 부키 | 2012.02 | 1만3800원)
- 이 글은 제 블로그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가족의 두얼굴, #트라우마, #직면, #똥떡, #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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