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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이주여성 추모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18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이주여성 추모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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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무개(32·강원 철원군)씨는 이주여성이었다. 김씨는 21살 때 한국 남편과 결혼해 입국했다. 결혼 12년 차였고, 딸 4명을 낳아 키웠다. 남편은 일을 안 했다. 김씨는 함께 사는 시부모와 아이들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식당, 닭집 등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런 김씨를 남편은 자주 괴롭혔다. 술 마시고 때리는 건 기본이었다. 일터에 하루 10여 차례 전화를 걸어 방해하기도 했다.

참을 수 없던 김씨는 한국에 살고 있는 친언니 집으로 피신했다. 남편은 아이들이 울고 있는 사진을 휴대전화로 보냈다. 집에 돌아오라는 협박이었다. 김씨는 집을 나간 지 10일째, 아이들을 위해 다시 집에 돌아갔다.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술을 마시고 들어와 김씨를 때렸다. 시부모는 침묵했다. 2012년 6월 30일 결국 김씨는 남편에게 맞다가 기절했다. 이후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사상태였다. 사흘이 지난 7월 4일 오전 김씨는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 때문에 맞아도 참았는데... 이렇게 비극일 줄 몰랐다"

18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이주여성 추모집회'에서 참가자가 울먹이고 있다.
 18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이주여성 추모집회'에서 참가자가 울먹이고 있다.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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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낮 12시 서울 덕수궁 대한문 광장 앞에서 김씨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하늘은 어두웠고 굵은 빗줄기가 떨어졌다. 비를 맞으며 추모사를 읽는 최아무개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최씨는 김씨의 친구다.

"친구는 남편에게 폭행당하면서도 꽃 같은 아이들 때문에 참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참고 살아온 결과가 이렇게 비극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낯선 땅에서 외국인이라는 신분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가까이 사는 남편에게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건 엄청난 비극입니다. 다문화 가족을 위한다고 그렇게 많이 떠드는데, 왜 제 친구는 죽었을까요?"

이날 추모집회는 김씨 외에 지난 2일 사망한 재중동포 이아무개씨(60·서울 강동구) 등 그동안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9명의 결혼이주여성(이하 이주여성)의 명복을 비는 자리였다. 다들 이름과 국적은 달랐지만 '남편에게 살해당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남편을 피해 임신한 몸으로 아파트 9층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 떨어지거나, 남편의 폭력으로 갈비뼈 18대가 부러져 사망한 이주여성도 있었다. 어느 남편은 보험금을 노리고 이주여성에게 수면제를 먹였고, 칼로 아내를 난자한 남편도 있었다.

집회가 열린 대한문 앞은 한마디로 '눈물바다'였다. 사회·추모노래·발언 등을 맡은 참가자들도, 함께 고인의 넋을 기리러 온 120여 명의 참가자들도 비 섞인 눈물을 닦고 있었다. <고향의 구름>이란 중국 노래를 부르기로 한 대구지역 중국 유학생들은 반주에 맞춰 목 놓아 울 뿐이었다. '이주여성은 노예가 아니다'라는 팻말을 든 참가자는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이주여성을 대표해 발언하러 나온 행복랭(캄보디아)씨도 울음 때문에 몇 번이나 원고 읽기를 멈췄다. 그래도 계속 숨을 고르며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을 이어갔다.

"이주여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알코올 중독, 정신병력 등 위협이 되는 남성과 국제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우리도 한국에서 남편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

이주여성 체류 권리, 한국 남성에게 있어... 법 개정 절실해

18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이주여성 추모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펼침막을 들고 있다. 펼침막에는 '이주여성들이 죽지 않을 권리'라 적혀 있다.
 18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이주여성 추모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펼침막을 들고 있다. 펼침막에는 '이주여성들이 죽지 않을 권리'라 적혀 있다.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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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 참석한 인권단체 대표자들은 우리 사회의 다문화정책이 겉만 화려하고 속은 부패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주여성이 한국인 배우자를 통해서만 국적과 체류권을 갖도록 한 제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꼽았다. 한국 남편이 체류 권리를 쥐고 있기 때문에 폭행을 당해도 이주여성들은 참을 수밖에 없기 구조라는 지적이다.  

현재 출입국관리법 시행규칙상 귀화 허가 신청을 하는 이주여성은 남편과 함께 방문하길 권고받는다. '신원보증서' 등을 제출해야 하는 의무규정은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선 출입국관리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최근 6~7월까지 귀화신청을 하는 이주여성들에게 신원보증서를 받는 일이 발생했다. 최근 살해당한 이씨 역시 남편에게 이 점을 빌미로 폭행당해왔다.

또한 다문화 가정의 재산이 총 3000만 원이 안 될 경우, 체류기간 2년을 채워도 이주여성은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 문제는 이주여성과 결혼하는 남성 중 기초생활수급자들은 이 조항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 이들과 결혼한 이주여성도 덩달아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강혜숙 대구 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법무부가 이주여성의 체류 안정을 보장해야 한다"며 "이주여성에게 불평등한 법을 개정해 이들이 독립적으로 한국에서 살아갈 권리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주여성은 상품취급... 이들의 권리 지켜줘야"

18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이주여성 추모집회'에서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비례대표)가 한국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와 인사하 있다.
 18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이주여성 추모집회'에서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비례대표)가 한국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와 인사하 있다.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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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은 위험소지를 지닌 남성들의 국제결혼을 제한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점도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동안 이주여성들이 알코올 중독이나 정신질환 등을 앓는 남편에게 살해당한 만큼 이를 예방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현미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 교수는 "한국은 국제결혼중매업이 소비자보호법에 기반하고 있다"며 "남편은 소비자고 이주여성은 상품 취급을 당한다, 한 중매업체는 이주여성이 마음에 안 들면 '반환·보상'이 가능하다고 홍보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미국의 경우 국제결혼중매법상 이주여성에게 남편의 범죄기록을 보내줘야 한다"며 "한국 사회에도 이주여성이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지켜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추모집회에는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비례대표), 배우 유지태씨도 방문했다. 이자스민 의원은 "그동안 이주여성 문제 관련해 여러 대안이 나왔지만 진행과정에서 중단된 경우가 많았다"며 "이것들을 다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지태씨는 "이주여성 관련 영화를 준비하던 차에 이곳에 오게 됐다"며 "앞으로 이주여성들이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태그:#이주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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