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포스터.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포스터.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장마철 휴일 오전 영화관에 관객이 제법 들었다. 잘 살펴보니 낯설고 놀랍다. 40~50대 관객이 주류다. 이런 현상은 한국 영화관에서 이례적이다. 중년관객을 겨냥하고 제작되는 한국영화는 없다. 할리우드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디 알렌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희한할 정도로 관객의 역전현상을 가져왔다. 흥미로운 일이다.
우디 알렌은 소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영화감독이자 배우, 음악가이자 코미디언으로 '순이'와 결혼하여 화제를 뿌렸던 문제적 인간. 올해 77세인 그는 지난 1966년부터 지금까지 40여 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빌려와 일상생활과 밀접한 현실적 주제를 변주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이번에 개봉된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극적인 사건도 기막힌 반전도 없는 영화다. 영화의 장르도 '희극, 판타지, 로맨스, 멜로'까지 합성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는 '판타지 멜로드라마' 정도로 규정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영화의 방점은 황금시대에 찍혀 있으니, 그것을 따라가는 시간여행 정도로 영화를 생각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역사가 깃든 '파리의 명소' 보여주는 영화

결혼을 앞둔 미국인 남녀 길과 이네즈가 파리에 온다. 길은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잘 나가는 대본작가지만, 시대를 대표하는 진정한 장편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파리에서 그는 낭만과 영혼이 어우러진 뜻 깊은 날을 맞이하고 싶다. 하지만 이네즈 생각은 다르다. 이네즈는 여행지 파리의 화려함과 은성(殷盛)함을 즐기려는 마음뿐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유쾌한 것은 파리의 명소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때는 세계의 유행을 주도한 도시로서, 예술가들의 꿈과 낭만과 우정이 피어났던 예술의 메카로서, 68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혁명의 본산으로 이름을 날렸던 파리. 그런 파리가 2010년대의 길과 이네즈에게 어떻게 비춰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적잖게 재미있다.

관객은 카메라렌즈가 포착하는 파리 곳곳의 풍광과 거리와 인총과 문화유산을 따라가면 된다. 감독은 우리를 베르사유로, 에펠탑으로, 센 강으로, 몽마르트 언덕으로, 개선문으로 인도한다. 각각의 장소는 이런저런 사건과 결합하면서 입체감을 가진다. 감독은 파리가 파리 시민들과 프랑스 국민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계인의 것임을 강조한다. 

파리에 반한 길은 소설이 대박을 터뜨리면 파리로 아예 이주할 심산이다. 이네즈는 그런 길을 이해할 수 없다. 이네즈의 섹시함에 반해서 약혼까지 했지만, 길의 마음 한구석에는 무엇인가 허전함과 공허가 자리하고 있다. 작가 특유의 방랑벽 혹은 낭만성 내지 철학적 사유가 원인이다. 길의 마음과 이네즈는 겉돌고 그것은 사건으로 비화한다.

기분 좋게 취한 길이 호텔로 돌아가는 길. 낯선 길을 걷던 그는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는다. 그때 로마식 포장도로 위를 달리던 클래식 푸조의 문이 열리고 파티에 동참하라는 취한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이람?! 일면식도 없는 길을 태우고 승용차는 레스토랑에 도착한다. 길을 태운 사람들은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 내외!

레스토랑에서는 사랑을 권하는 콜 포터의 달콤한 노래가 춤과 함께 흐른다. 1920년대 파리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노인과 바다>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이런 식으로 길은 1920년대 파리를 풍미했던 예술가들과 만난다. 파블로 피카소, 살바르도 달리, 거트루드 스타인 등등. 영화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헤밍웨이와 투우사 벨몬테, 그리고 불멸의 화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아드리아나와 길이 연결되면서 영화는 복잡한 관계망을 구축한다. 동경해 마지않던 1920년대를 '황금시대'로 생각하는 길. 그러나 1880년대부터 1914년에 이르는 '벨 에포크'를 황금시대로 동경하는 아드리아나. 인상파 화가 로트렉과 고갱을 만나 거기 머물려는 아드리아나.

영원불멸한 '세계의 도시' 파리의 의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길과 아드리아나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고 양립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과거가 현재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발흥한 일부 철없던 대중을 제외하면 이런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날 수 있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조선시대 관련서적 출간열풍은 위대했던 지난날에 대한 향수가 불러일으킨 면이 적잖다.

아드리아나가 머물고자 하는 '벨 에포크'의 대표자들은 르네상스를 동경한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그 시대를 황금시대로 생각할까.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가 공존했던 불멸의 시기를 동시대인들은 인간역사의 가장 위대한 시기라고 생각했을까.

"거인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난쟁이지만 거인의 무동을 탄 난쟁이다. 우리시대의 식자들은 난쟁이의 무동을 탄 또 다른 난쟁이일 경우가 많다."

<장미의 이름>에서 에코는 과거에 대한 인간의 영원한 향수를 이렇게 말했다. 1920년대 파리든,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든 혹은 고갱이나 로트렉이 말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파리든 파리는 세계문화와 예술의 수도로 기능했다. 우디 알렌은 관객들에게 이 점을 여러 차례 각인하려 한다. 21세기 세계를 대표하는 명품도시 뉴욕이 아무리 해도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파리의 역사성과 품위와 도저한 문화예술을 상찬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2012년 서울과 동경 그리고 북경을 떠올렸다. 동아시아 세 나라의 수도와 시간대를 결합시키면서 문화와 예술의 공통분모를 연상해본 것이다. 1920년대에는 현해탄을 건너온 사람들이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경성을 거쳐 신의주를 지나 북경까지 갈 수 있었다. 혹은 이르쿠츠크를 경유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예카테린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지나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과 파리까지도 갈 수 있었다.

문화와 예술의 전파속도는 오늘날이 과거보다 비상하게 빠르지만, 그것은 아메리카 생산물의 천편일률적인 복제품에 다름 아니다. 1920년대 경성에는 '백조'와 '창조' 동인들이 나래를 폈고, '카프'가 결성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공산문학과 예술이 득세했으며, 중국에서는 장개석과 모택동이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준비하는 약동의 시대였다.

1920년대 시공간을 누빈 거인들의 무동을 탄 왜소한 21세기 한국인들은 부동산과 주식에 탐닉한다. 공무원 같은 안정된 일자리에 인생을 걸고, 맞벌이능력 있는 신붓감 고르기에 여념이 없다. 삶은 거침없이 속물화되고, 인간관계는 나날이 피폐해진다. 진정 위대하고 가치 있는 사람과 삶을 향한 몸부림은 지난날의 사치와 추억이 되고 말았다.

미국인들의 속물근성에 대한 풍자와 조롱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우디 알렌의 영화가 재미나 시간 죽이기와 거리를 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드나잇 인 파리>도 예외가 아니다. 길과 이네즈의 관계를 헤살 놓는 배후에 이네즈의 부모가 자리한다. 그들은 돈은 많되 지적이나 영적 내지 문화·예술적으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다. 모든 것을 경제와 결부하여 사유하는 전형적인 속물들.

"싼 게 비지떡이야!"를 주문처럼 되뇌는 이네즈의 어머니나, 남다른 사윗감 길의 뒤를 캐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하는 아버지는 21세기 미국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네즈. 우디 알렌은 그들을 통해 아메리카 관객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조금 더 고상하고 의미있게 그리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없을까요? 파리 시민들과 비교할 때 미국인들은 너무 재수 없는 게 아닌가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시간여행을 전면에 배치하지만, 그 배후에 즉물적이고 즉자적이며 속물적인 미국인들의 뿌리 없는 일상을 풍자한다. 속되먹은 미국인들의 저급한 삶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넘쳐나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자, 이제는 우리가 대한민국의 오늘과 서울과 한국인들의 자화상을 한 번 들여다보는 시간여행을 준비하면 어떨까?! 가능하면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면서 말이다!

파리 황금시대 벨 에포크 시간여행 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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