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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운무에 싸인 대관령 옛길, 그 황홀한 숲으로 걸어갔다.
▲ 바우길의 나그네 짙은 운무에 싸인 대관령 옛길, 그 황홀한 숲으로 걸어갔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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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대관령 옛길 그 안식의 숲으로요. 순식간에 눈앞을 가로막는 하얀 모시 커튼처럼 온통 주위를 자욱하고 신비롭게 만들어 놓은 태백준령의 운무를 만났습니다. 그 야릇하게 꿈같은 짙은 운무를 서서히 몸에 바르고 적셔 가며 황홀한 느낌으로 걸어갔습니다.

백두대간 선자령 아랫자락의 치마폭을 에둘러 대관령 옛길의 정서와 심상을 체험하러 조심스럽게 향했습니다. 안개와 구름에 덮여 쉽게 속살을 드러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숲은 음산하리만치 고요했습니다. 그 오묘한 느낌의 길을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마치 알 수 없는 미지에 대한 떨리는 호기심으로 걸어갔습니다. 오로지 몸으로 걸으면서 이 옛길이 가진 모든 품성을 체감하고, 그가 가진 실존의 본성을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대관령 옛길은 헤어짐과 만남의 경계...

'강릉 바우길' 14개 구간 중 제2구간인 대관령 옛길은 옛 영동고속도로 휴게소부터 그 출발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양떼목장길과 국사성황당을 거쳐 반정과 옛주막터를 지났고, 상제민원과 잡곡마을을 경유하여 성산면 게스트 하우스까지 이어진 약 14km의 고즈넉한 길이었습니다.

대관령은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과 강릉시 성산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높이가 해발 832m인 고개로 영서와 영동지방의 관문이기도 합니다. 주변이 황병산과 선자령, 노인봉과 발왕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고위평탄면이자 아흔 아홉 굽이로 태백산맥을 넘어 이어진 고개입니다. 그 고갯길을 걸으며 대관령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기쁨을 누려보는 것은 그 길을 걷는 자들에게만 부여된 행복일지도 모릅니다. 대관령에 대한 실존적 의미를 마음대로 상상하고 질문해 보는 것 또한 괜찮은 즐거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의 대관령은 헤어짐을 나누는 경계이자 만남을 이어주는 연결의 매개로서의 뭐 그런 고개...   

이 고개는 오래 전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넘었던 어미와 자식의 애틋한 사친의 길이었고, 조선의 화원 김홍도가 고개를 넘다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절로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렸던 길이었으며,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을 읊었던 옛 일화가 고스란히 발자국으로 남겨진 추억의 길이었습니다.

짙은 구름과 안개가 석여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길을 걸었다.
▲ 운무 속의 걷기 짙은 구름과 안개가 석여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길을 걸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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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을 초월한 생명과 삶의 역사가 심오한 인연으로 맺어진 길...

대관령 옛길은 사람과 자연의 필연적 연관관계와 시공을 초월한 생명과 삶의 역사가 심오한 인연으로 맺어진 길이었습니다. 대관령 옛길을 걸으며 길바닥의 돌이나 흙을 밟았고, 만지기도 했습니다. 길가에 서 있는 나무를 어루만지거나 졸졸 흐르는 좁은 계곡 시냇물의 촉감을 몸속으로 흡수하기 위해 손을 씻기도 했습니다. 푹신한 침대의 쿠션처럼 부드러운 부엽토로 덮인 촉촉한 땅의 두께를 상상했습니다. 숲에는 바람을 따라 흐르는 신비로운 운무의 바다가 있었습니다. 숲이 미동으로 떨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정적을 깨는 새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소나무로 빽빽이 가득한 향기로운 숲길을 걸었습니다. 무릎과 발목을 가볍게 스치는 길가의 들풀들은 이슬을 머금어 찰랑거렸고, 꽃들은 아무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미소로 수줍게 웃어주었습니다. 한량없는 자연의 향기와 신비로운 숲의 음성이 은은하게 메아리치는 길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천상의 세계를 걷고 있는 듯, 스스로 감지할 수 없는 해맑은 몽롱함이 소름으로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바우길 안개 속으로 걸어갔어요...
▲ 안개 속으로 향하다. 바우길 안개 속으로 걸어갔어요...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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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향하여 걸었고, 길을 추종하며 걸었으며, 길을 흠모하여 걸었습니다. 길에서 유희를 누렸고, 걸으며 명상에 빠졌으며, 걷다가 스스로에게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과연 걷는다는 것이 인간의 육체인 발과 다리로 몸을 이용하여 공간을 이동하는, 고작 그런 정도의 의미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 서문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리며 책의 가슴을 열어보았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 아니 길이 거기에 있기에 걷는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과연 걷기 예찬의 대가답게 유려하게 풀어내는 보행의 미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관령 옛길에 스며든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과 짐승들의 발자국, 숲길에 뿌려져있을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존재들의 사연들, 나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반정을 지나 암반계곡에서 씩씩하고 청량하게 흐르는 맑은 계곡물을 만났습니다. 땀에 젖은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발과 다리를 담그고, 발가락 끝에서 발목, 종아리를 거쳐 장딴지와 허벅지를 타고 오르는 짜릿한 느낌은 이내 척수를 거쳐 정수리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대관령 바우길 몽유고원(夢遊高原) 계곡의 황홀한 유희를 즐겼습니다.

암반계곡에서 발과 다리를 물에 담가 청량한 에너지를 충전하며 피로를 풀었다.
▲ 몽유고원의 계곡 암반계곡에서 발과 다리를 물에 담가 청량한 에너지를 충전하며 피로를 풀었다.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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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주막터 초가집을 지났고, 시커멓게 익은 달콤한 오디가 잔뜩 열린 산뽕나무 아래를 걸었습니다. 산채잡곡마을 어귀에서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깔깔거리며 따먹었으며, 금강송 숲을 헤치고 파도처럼 잔잔히 불어오는 천연의 바람을 실컷 볼에 맞았습니다. 튼실한 토종닭 울어대는 호젓한 산골마을 농가를 지났고, 예쁘고 가지런하게 심어놓은 콩밭을 감상하며 걸었습니다. 평화로운 길 위에서 노래를 나누었고, 시를 나누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바우길 위에서 함께 동행한 너와 나, 당신과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순간, 혼연(渾然)의 끈으로 묶이고 말았습니다.

대관령 옛길은 '몽유고원도'

'바우'란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리킵니다. 강원도 사람들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바우길 역시 강원도의 산천답게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겠지요. 게다가 바우(Bau)는 바빌로니아 신화 속에 등장하는, 손으로 한 번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죽을병을 낫게 하는 아주 친절하고 위대한 '건강의 여신'이라고 하니 그 이름에 담긴 뜻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개망초밭 한가운데 피어난 루드베키아...꽃말이 '평화로운 공존'이다.
▲ 바우길에 피어난 곷 개망초밭 한가운데 피어난 루드베키아...꽃말이 '평화로운 공존'이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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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매혹적인 운무에 젖은 대관령 옛길(강릉 바우길 2구간)을 걸으며 느꼈던 향기와 소리, 촉감과 감탄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 나의 심장을 깊숙이 파고듭니다. 마치 몽환적인 꿈속에서처럼 대관령 고원 구름 속을 맨발로 거닐며 해매는 상상... 대관령 옛길은 바로 자유로운 나그네들이 걸어가는 몽유고원도(夢遊高原道)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7일<고양올레>에서 강릉 바우길 2구간 도보여행 다녀온 후 쓴 글입니다.
# 강릉 바우길 2구간 : 대관령 신재생 에너지 전시관~국사성황당 이정표~반정~옛주막터~암반계곡~우주선 화장실~야생화마을~산채 잡곡마을~바우길 게스트 하우스까지 약 14.5km, 약 6시간 소요.



태그:#대관령 옛길, #강릉 바우길, #바우길, #고양올레, #대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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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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