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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가명·53·기혼)씨는 지난해 결혼 20년 만에 처음으로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비록 서울 외곽 작은 평형대의 오래된 주공아파트라 5인 가족이 다함께 살기에는 좁은 편이지만, 온 가족의 기쁨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했다. 가구나 가전제품 등을 갖고 있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오히려 충분히 넓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희가 아이가 셋이다 보니 참으로 돈 모으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정말 온 가족이 합심해서 절약하고 살았기 때문에 뭐하나 제대로 구비하고 산 적이 없어요. 내 집 한 칸 마련할 수 있었던 건 누구보다 제 아내의 공이 크죠. 뭐하나 누린 적 없이 고생 많았거든요."

박재철씨는 젊은 시절부터 쭈욱 보일러를 설치하거나 수리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 수입은 비교적 꾸준했던 편이긴 하나 200만 원을 조금 넘게 번 지 이제 5년 정도 밖에 안 되었다 하니 고소득자는 아니다. 휴일, 밤 따지지 않고 일하면야 돈을 좀 더 벌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박재철씨는 항상 오후 6시가 되면 정시 퇴근을 한다. 두 딸 그리고 막내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저희 부부는 돈 많이 버는 데 욕심낸 적 없어요. 결혼하고부터 쭈욱 전 6시에 퇴근하고 휴일엔 반드시 쉬면서 집도 여기저기 손보고 아이들과 시간을 같이 보냈어요. 제가 애들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제가 열심히 일하고 돈 버는 이유도 다 애들과 가족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너무 돈돈 하다가 정작 가족들과 같이 보낼 시간이 없어서 어느 순간 사이가 멀어지게 되는 친구들도 많아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거 같아서 제가 아내에게 말했죠. 난 무조건 정시에 퇴근해서 애들하고 지낼 거다, 그러니 큰 돈 벌이는 기대하지도 말아라. 하하하."

돈 욕심 버리고 가족과 함께... 적게 버는 대신 적게 쓰며 살기

포털 사이트에 에어컨을 입력하자 다양한 모델의 제품들이 검색된다.
 포털 사이트에 에어컨을 입력하자 다양한 모델의 제품들이 검색된다.
ⓒ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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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내도 박재철씨의 계획에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부부는 적게 버는 대신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쓰고 살기로 결정했다. 웬만하면 안 사고 안 입었고, 외식은 거의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결혼할 때 장만한 냉장고, 세탁기가 가진 가전제품의 전부인데 이젠 고장 나도 부품이 없어 수리할 수 없을 지경이란다. 그래도 박재철씨가 수리공이다보니 이렇게 저렇게 대충 고쳐서 앞으로도 10년은 너끈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며 두 부부는 함께 웃었다.

"저희도 마냥 알뜰하기만 한 건 아녜요. 4년 전이었던가, 여름이 너무 습하고 무더웠던 때 살던 빌라가 너무 더워 가족 모두 한동안 밖에 나와 밤을 보낸 적이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은 정말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더워서 에어컨 하나 사야겠단 생각이 절로 들더라구요. 가족들 다 데리고 OO마트에 가서 에어컨도 둘러보고 시원하게 이것저것 구경도 했죠. 그리곤 결심했어요. 그래 사람이 뭐 그렇게 아등바등 아끼고 사냐. 에어컨 하나 정도 들여놓고 산다고 뭐 큰일 나겠어?"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에어컨을 사서 들여놨을 테지만 박재철씨 가족은 여기서 달랐다. '사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돈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신용카드를 쓴다거나 빚을 내는 것에 대해 금기시하기 때문에 박재철씨 가족은 절대로 돈이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 6개월 모으니까 얼추 150만 원 정도 모이더라구요. 돈이 모이니까 막상 더위는 다 지나간 상태고. 사람이 참 간사해서 당장 덥진 않으니까 에어컨을 사는 게 조금 망설여지데요. 그래서 가족들끼리 의논을 해봤죠. 에어컨 살까 아니면 다른 더 좋은 게 있을까?"

결국 가족들 의견은 아내의 강력한 주장으로 '김치냉장고' 사는 게 더 낫겠다는 결론으로 수렴되었다.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건 가족들로서도 솔깃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전세 사는 집에 에어컨을 설치하려면 창가에 구멍을 내야 하는 등 실외기 설치 때문에 큰 공사가 이어진다. 집주인에게도 양해를 구해야 하고 또 이사 나갈 때 원상복구도 해야 한다.

게다가 이사갈 때 에어컨 철거 및 재설치는 별도의 비용이 발생된다. 옆집 얘길 들어보니 정작 에어컨을 사더라도 맘껏 시원하게 틀 수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옆집 꼬마가 "우리 엄만 참 이상해요, 에어컨 사 놓구선 못틀게 해요, 그럴거면 왜 산 건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는 말을 듣고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1년 중 정말 에어컨을 트는 시간이 얼마 정도 될까. 그 며칠 몇 시간 때문에 이래저래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해보니 왠지 다시 생각해보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은 집 사는 친구보다 우리가 더 넉넉한 것 아닐까요"

에어컨 대신 김치냉장고를 사도 30만 원 정도 돈이 남았다. 그 돈으로 성능이 괜찮아 보이는 냉풍기를 한 대 샀다. 그리고도 남는 돈으로 가족 모두 전례 없는 외식을 했다. 그날 너무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아내를 보면서 괜시리 부자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같이 '여름은 더워야 제맛'이라며 웃었다고 한다.

"저희는 정해놓고 쓰기 때문에 이렇게 예산을 정한 데서 돈이 남게 되면 곧바로 여유자금이 되요. 지금까지는 남는 돈도 나중을 위해 일단 모았었는데 지금은 가끔 그런 식으로 기분 내기도 합니다."

너무 절약하고 살면 아이들이 기가 죽진 않을까 싶어 여쭤보았다. 요즘처럼 너무 좋은 물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박재철씨 부부야 그렇다쳐도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은 현재 그러한 혜택들을 충분히 누리고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는 않을까.

"저는 아이들에게 항상 이야기합니다. 안 되는 건 없다. 다 할 수 있다구요. 그저 지금 당장 모두 다 할 수가 없을 뿐입니다. 뭔가가 사고 싶으면 그때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1만 원이든 2만 원이든 그냥 시작할 수 있는 금액으로 모아요. 그래서 돈이 모일 때까지 이리저리 알아보며 가장 괜찮은 물건과 적정 가격을 알아내게 됩니다.

때론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보다 그 물건이 그리 필요하지 않을 때도 많아요. 그러면 돈이 굳기도 하고, 또 다른 걸 알아보기도 하고… 우리 가족은 굉장히 쪼들린다거나 너무 구질구질하다거나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떨 땐 좋은 집에 살면서 매일매일 빚에 시달려 헉헉대는 친구놈들에 비해 우리가 더 넉넉하게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기로 결정하였기에 포기하게 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경제란 결국 우선 순위에 따른 한정된 재화의 배분 문제인 것이다. 누구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박재철씨 가족은 거짓 풍요 속에서 오히려 더 곤궁해진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덧붙이는 글 | 박미정 시민기자는 현재 생활경제상담센터 푸른살림에서 지속가능한 경제적 자립을 돕는 교육활동가 및 생활경제상담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생활경제상담센터 푸른살림에서는 소중한 돈 잃지 않고 제 때 잘 쓰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과 안정을 위한 자세한 정보는 네이버 '푸른살림'카페를 참고해주세요.



태그:#에어컨, #현명한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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