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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력원자력이 지난 2일 자사 홈페이지에 공개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고리 1호기 정전 사고 최종 보고서' 표지
 한국수력원자력이 지난 2일 자사 홈페이지에 공개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고리 1호기 정전 사고 최종 보고서' 표지

안전 규정조차 무시하는 직원들의 '자만심', 일단 여론 비판부터 피하고 보자는 무사안일주의, 이를 위해 조직적 은폐도 가능한 '상명하복' 문화.   

어느 '반핵 단체'의 성명서가 아니다. 한국수력원자력(아래 한수원) 의뢰를 받아 지난 2월 9일 발생한 고리 원전 1호기 정전 은폐 사고를 조사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고서 행간에 담긴 쓴소리다.

최종보고서 슬그머니 공개... 언론은 물론 직원도 몰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지난 4일 고리 1호기 재가동을 승인한 가운데 한수원이 IAEA 최종 보고서를 지난 2일 자사 홈페이지에 '슬그머니' 공개한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 <오마이뉴스>가 4일 오후 한수원 홍보팀에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언론은 물론 시민단체, 전문가, 심지어 일부 한수원 직원조차 공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난달 4일부터 11일 8일간 IAEA 전문가 안전점검을 마친 뒤 설명회까지 열어 "정전사고 원인이었던 비상디젤발전기를 포함한 발전소 설비 상태가 양호하다"고 떠들썩하게 자랑하던 때와는 딴판이다.

앞서 미로슬라브 리파르 IAEA 안전점검단장은 지난달 11일 "이번 조사는 정전 사고에 국한됐다"면서 "보고서에는 정전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운전 개선 사항과 권고 사항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실제 이번에 공개된 67쪽짜리 영문 보고서에는 ▲ 운영, 조직, 관리 문제 ▲ 안전 문화 ▲ 운전 ▲ 유지 보수 ▲ 전기 시스템 ▲ 운전 경험 등 한수원 내부의 안전 의식과 운영 체계 점검에 초점을 맞췄다. 그나마 대부분 원론적인 문제 지적이나 '권고' 수준에 그쳤지만, 원전 안전성에 대한 직원들의 지나친 자만심과 안전 불감증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직원 자만심과 안전 불감증이 정전 사고 불러"

부산 기장군 장안읍 소재 고리원전 1호기(오른쪽)와 2호기.
 부산 기장군 장안읍 소재 고리원전 1호기(오른쪽)와 2호기.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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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 원전 1호기 정전 사고는 '계획 예방 정비'를 위해 원자로 가동을 멈춘 지난 2월 9일 오후 8시 34분에 발생했다. 한수원 협력업체 직원이 발전기 보호계전기 시험 도중 실수로 외부 전원을 차단한 게 계기가 됐지만 비상디젤발전기 2대가 가동되지 않아 12분간 발전소 전원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그 사이 원자로 냉각장치가 멈춰 고온관 냉각수 수온이 36.9도에서 58.3도로 20도 이상 올랐지만 방사선 위험을 경고하는 '백색 비상'조차 발령하지 않았다.

문제는 당시 발전소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는 바람에 한 달을 넘긴 3월 13일에야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지난 3월 12일 고리 1호기 가동 중단을 명령했고 4개월 만인 지난 4일에야 재가동을 승인했다.

그런데 IAEA는 고리1호기 정전사고와 은폐 원인을 지나친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안전 불감증, 보고 체계 결함에서 찾았다. 우선 협력업체 직원이 외부 전원을 차단한 건 단순 실수가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나온 자만심(Overconfidence)이 안전 규정을 어기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앞서의 한수원 설명회에서는 없었던 지적이다.

IAEA는 지난 5월 고리 1호기 직원 안전문화 조사 결과 "안전 문화가 모든 활동에게 가장 우선 순위로 간주된다"거나 "안전을 중시해야 사업 환경이 창출된다"는 질문에 긍정적 답변이 각각 23.2%, 19.5%에 그친 사실을 거론, 직원들 안전 불감증에 우려를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또 사고 은폐 문제와 관련해선 당시 발전소장 말을 빌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악화된 국민 여론과 발전소 신뢰 추락이 부담으로 작용했고 한수원의 과도한 '무사고 운전' 압박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직장 상사 권위에 도전하기 어려운 기업 문화 탓에 안전 규정을 어기는 은폐 지시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IAEA 최종 보고서 가운데 고리 1호기 직원들의 안전문화 조사 내용을 언급한 대목(빨간 밑줄)
 IAEA 최종 보고서 가운데 고리 1호기 직원들의 안전문화 조사 내용을 언급한 대목(빨간 밑줄)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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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EA조차 안전불감증 지적... 자만했다간 큰 코 다쳐"

<오마이뉴스> 요청으로 IAEA 최종 보고서를 분석한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5일 "IAEA 보고서는 고리 1호기 운전원, 외주 직원들의 원전 안전성에 대한 지나친 자만심을 지적하고 있다"면서 "기술 절차, 운전 절차, 예방 절차 다 무시하고 순차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려는 바람에 사고를 부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IAEA가 외부 감시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것과 관련 서 교수는 "아무리 교대 근무라고 해도 냉각수 온도가 20도 이상 오른 기록이 남아 있는데도 원자력안전위원회 주재원이 몰랐다는 건 직접 확인하지 않고 앉아서 보고만 받았다는 얘기"라면서 "이런 보고 체계라면 위에서 오는 압박감이나 공론화에 대한 두려움은 계속 남아있을 수밖에 없어 한수원이 통째로 바뀌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다만, 서 교수는 "그렇다고 33세로 아직 중년에 불과한 고리 1호기를 매장하는 것도 대안은 아니다"라면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처럼 원자로에 구멍이 난 적은 있지만 원자로 압력용기가 파괴된 적은 없는 만큼 주민들도 이 문제를 기술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정부 당국을 향해서도 "원전을 수출하고 지금까지 운영 실적이 좋다고 자만하다 큰 코 다칠 수 있다"면서 "폐쇄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를 버리고 국민과 소통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글 번역본 보내 달랬더니 '우수 사례'만 달랑

한국수력원자력에서 5일 IAEA 최종 보고서 가운데 번역해 보내준 내용.
 한국수력원자력에서 5일 IAEA 최종 보고서 가운데 번역해 보내준 내용.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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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수원은 현재 IAEA 보고서 한글 번역본을 준비하고 있으며 7월 말쯤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한수원에서 지금까지 번역했다며 보내온 보고서 내용은 ▲ '정전사고의 원인이었던 비상디젤발전기를 포함한 발전소의 설비상태가 양호함을 확인' ▲ '고리1호기는 계속운전을 위해 노후설비에 대한 교체와 설비개선 등을 꾸준히 수행' ▲ '2007년 수행된 IAEA의 SALTO(계속운전안정성) 점검시 계속운전에 대한 국제기준을 만족하였고 이후의 이행 또한 우수',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폭넓은 안전대책이 수립되어 이행중' 등 '우수 사례'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김제남 통합진보당 의원실 이헌석 정책특보는 "IAEA 보고서에는 고리 1호기 전체 안전성에 대한 기술적 점검이 빠져 있어 국민 관심과는 동떨어진 한계가 있다"면서도 "시민단체가 아닌 IAEA조차 한수원의 뿌리 깊은 안전 문화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이 보고서를 자신들의 '면죄부'로만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환경운동연합 전국 회원들이 지난 2011년 7월 10일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백사장에서 설계수명을 연장해 재가동중인 고리원전 1호기 폐쇄를 요구하며 'STOP GORI'를 글자를 펼쳐 보이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전국 회원들이 지난 2011년 7월 10일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백사장에서 설계수명을 연장해 재가동중인 고리원전 1호기 폐쇄를 요구하며 'STOP GORI'를 글자를 펼쳐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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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리 원전, #IAEA, #한국수력원자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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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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