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벌진트

버벌진트 ⓒ 브랜뉴뮤직


온 국민이 힙합을 통 큰 바지와 워커로 배웠던 20세기 말. 혜성처럼 등장해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조PD를 감히 디스(Disrespect)한 랩퍼가 있었다. 당시 막 스무 살을 넘긴 '어린 MC' 버벌진트(Verbal+Jint)는 4WD와 함께한 곡 '노자'에서 "길지 않은 verse(버스; 노래의 절)에도 flow(플로우; 는 호흡 곤란 조PD he's wack 초보자"라고 비웃었다. 강산이 변한 10년 뒤, 버벌진트는 조PD와 사이좋게 합작 앨범 <2 The Hard Way>(투 더 하드 웨이)를 발표했다.   

서로를 씹고 뜯고 맛보고 다시 손잡기도 하는 것이 일종의 문화로 여겨지기도 하는 힙합신에서 버벌진트 역시 다사다난한 11년을 보냈다. 그동안 힙합 리스너들과 옥신각신이 있었고, 그들을 겨냥한 <누명>이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를 '라임 4대 천왕'으로 추앙하는가하면, 누군가는 '재수 없어'했다.

올해 다섯 번째 정규 앨범을 내기까지 버벌진트는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와 대중과 가까워졌다. 2009년에는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힙합 음반상을, 올해에는 같은 시상식에서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음악인 남자 아티스트상을 받았다. 얼마 전 발표한 <10년 동안의 오독>은 그 치열했던 10여 년을 회고하고 기념하는 앨범이다.

"힙합 리스너가 아닌 쪽의 반응이 더 흥미롭다"

- 일반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유난히 힙합이라는 장르에는 '진짜 가짜' 논쟁이 심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이건 진짜 발라드야'라는 건 없지 않나.
"진짜냐, 가짜냐 논쟁은 미국 힙합신에도 있다. 힙합 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티스트들도 스스로 의식을 많이 한다. 애초 힙합 음악이 다른 장르에서 요소들을 훔쳐 편법적으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흑인, 히스패닉 등 음악을 정규적으로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거기서 힙합의 멋이 생겨났다.

진짜냐 가짜냐는 갈수록 중심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매력 있는 다른 장르의 스타일을 가져오다 보니, 그 속에 아무거나 집어넣어도 소화가 되는 큰 그릇이 된 것 같다. 내 음악도 그런 흐름을 보여 왔다. 예전에는 나도 '저게 무슨 힙합이냐' 할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다. 나부터도 내가 하고 싶은 음악만 한다. 누가 곡 써달라고 '주문 받은' 음악은 못 만든다.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 안에서 만들고 싶은 만큼만 작업하고 있다는 데서 스스로 '진짜'라고 느낀다."

- 버벌진트는 피아노를 치며 랩을 하는 등 힙합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점점 대중이랑 친숙해지는 단계에 있다. 순수 힙합만 진짜라고 여기는 리스너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건가?
"한국의 힙합 마니아, 리스너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되게 많다. 그들에게는 증명하고 싶지도 않고, 아예 의식하고 싶지도 않다. 무시하고 싶다. 내가 받은 배신감도 크다. 음악을 듣는 건지, 뭘 듣는 건지. 오히려 편견 없이 와 닿는 대로 안 와 닿는 대로 듣는 마니아가 아닌 쪽의 반응이 나는 훨씬 더 흥미롭고 재밌다. 소위 마니아나 힙합 리스너들과 옥신각신하기에는 인생이 아까운 것 같다. '오독', '누명'이라는 단어 역시 그들 때문에 생겨난 느낌이다. 이번 앨범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인트로 등 한 두곡에 들어갔다."

 버벌진트

버벌진트 ⓒ 브랜뉴뮤직


"성우… 한때는 목소리도 내기 싫어 전화 안 받았다"

- 성우 일도 하고 있다. 버벌진트의 장점 중 하나는 목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왜 음악 외적인 활동으로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건지 궁금하다. 각종 CF에서 버벌진트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요즘에는 광고 쪽에서도 그렇게 많이 불러주지 않는다. 내가 몇 번 튕긴 적이 있어서. 스케줄 때문에 시간이 안 된다고 몇 번 했더니 광고 쪽에서 소문이 났나보다. 앨범 마무리 단계에서 편집증을 앓는 것처럼 힘들었던 게, 음악 외적인 일들이 겹치다 보니 전화가 오면 목소리도 내기 싫었다. 기계를 귀에 대는 것조차 피곤하게 느껴져서 일부러 전화 안 받고 문자로 오길 유도한 적도 있다. 어쨌든 요새는 성우일은 좀 줄었다."

- 출연 중인 Mnet <쇼미더머니>는 어떤가? 힙합 서바이벌인데.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 MC 스나이퍼와 가리온, 버벌진트 등이 어떤 주제로 섭외가 되어서 쇼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경험인 것 같다. 힙합이라는 키워드를 잊고 살았던 시청자들도 힙합을 저런 식으로도 하는구나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 같다. 또, 투지를 가지고 임하는 혈기왕성한 도전자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어준다.

반면, 의구심이 드는 부분은 과연 <나는 가수다>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나가수>에 참여하는 분들의 기술이나 음악성이 훌륭하고 그중엔 내가 진짜 좋아하는 뮤지션도 있지만, 경연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는 감정이입이 안 되어서 관심이 가지 않는다. <쇼미더머니> 참여하면서 난 떨어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일등하든, 꼴등하든 나 스스로 의식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꾸미고 싶었던 무대를 방송사가 주는 돈으로 카메라 앞에서 펼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힙합이라는 게 나 잘난 맛으로 '이 구역에서는 내가 제일 잘 나간다'는 마인드가 담겨 있는 음악이지 않나. 그런 음악을 하면서 '평가해주세요, 투표 좀 해주세요' 하는 것이 어색하다. 출연은 하고 있지만 100% 감정이입이 되는 건 아니다. 나와 팀을 이루는 친구에게는 미안한 생각이겠지만. 특히 앨범 마무리 시점에 나와 팀을 이뤘던 랩퍼 치타는 신경을 많이 못 써줬다."

 버벌진트

버벌진트 ⓒ 브랜뉴뮤직


"'잡탕'이 됐으면… 거기서 새로운 게 나오든 말든"

-요새 부쩍 방송 출연이 늘었다. 꽤 바쁠 것 같은데, 음악 작업할 시간이 있나?
"방송은 좀 더 편하게 음악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프로그램이면 마다할 필요가 없다. EBS <스페이스 공감>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아, 여름 공연들이 좀 있다. 원래는 지산밸리록페스티벌도 출연 이야기가 오갔는데, 내가 라디오헤드 팬이라 혹시라도 그 시간대에 겹쳐서 공연 못 볼까봐 그냥 빼달라고 해서 지산은 취소됐다. 이외에 워커힐에서 비키니 페스티벌(7월 7일), 그린 그루브 페스티벌(7월 21~22일) 등이 잡혀 있다. 그리고 여름이 끝날 쯤에 단독 콘서트를 한 번 더 할 것 같다.

작년보다는 시간 관리를 잘 하고 싶다. 밀려오는 스케줄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 적당한 선까지만 하고, 다시 작업 모드로 들어갈 것 같다. 무엇보다 올해 <10년 동안의 오독> 파트2를 꼭 내고 싶다. 가을쯤이면 좋겠다. 다음 앨범은 <Go Easy> 때 생각해놓은 <Go Hard>가 될 것 같다. 사이코반(<장마> 피처링)과 내 색깔을 합쳐서 콜라보레이션 앨범으로 낼 예정이다. <Go Easy>와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 천사와 악마를 보여주는 느낌이 될 것이다." 

- 30대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건강관리를 잘 해서 많은 곡을 내고 싶다. 어제 저작권협회 사이트를 검색해봤더니 260곡이 나왔다. 앞으로 10년 동안 그만큼 더 만들고 싶다. 탐험하고 싶은 영역들이 아직 너무 많다. 다양한 것들을 야금야금 해보고 싶다. 지난 앨범을 통해 조금씩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를 테면 밴드음악이다. 운 좋게도 2~3년 전부터 함께 하는 밴드가 생겼다. 돈만 받는 세션맨들이 아니라 같이 가는 동생들이다. 합주를 통해서 나오는 곡들이 있는데, 끄집어낼 게 많을 것 같다.

많은 곡을 내고 싶은 바람과 좀 모순되는 바람이 있다면, 많이 놀러 다니고 싶다. 또,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기자 주- <완벽한 날>의 가사 중 양고기 샌드위치·고수·커민·코코넛 등이 나온다)만 모아서 가게를 차리고 싶다. 은근히 한국에서 파는 곳이 별로 없는데, 나처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되게 재밌는 게, 한국의 여름이 점점 더워져서 그런지 더운 나라 음식들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다. 요새 길거리에서 코코넛도 파는데, 나는 그게 되게 반갑다. 한국에 외국인이 많아지는 것도 좋다. 뭐든, '잡탕'이 됐으면 좋겠다. 거기서 새로운 게 나오든 말든."

버벌진트 10년 동안의 오독 쇼미더머니 GO EASY 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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