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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이 하도 투명해 쓰러진 나무마저 온통 비치던 구채구의 호수
 물빛이 하도 투명해 쓰러진 나무마저 온통 비치던 구채구의 호수
ⓒ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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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 여기 완전 동화 속 세상이다!"

Y가 비명까지 지르며 환호했다. 정말 그랬다. 생각처럼 아니 생각보다 구채구는 아름다웠다. '하이타이'를 쏟아놓은 듯 부글거리는 수십 개의 장대한 폭포도 놀라웠지만 영롱한 빛깔의 호수들은 말 그대로 환상이고 동화였다. 고상하게는 에메랄드 빛, '싼티' 나게는 '파워에이드' 색 호수도 있었고 하늘색, 옥색, 남색, 쪽빛, 코발트색, 청록색 등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푸른빛과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푸른빛 호수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어떤 호수는 표면이 햇빛에 반짝이는 육각형 물비늘이 가득해 Y로부터 '뱀피호수'라는 별명을 헌사받기도 했다. 색도 색이지만 투명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진한 푸른빛의 호수도 쓰러진 나무와 조약돌들까지 선명하게 비칠 정도로 투명했다. 시선을 멀리 보내면 앞산이 고스란히 비쳐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알 수 없었다.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그 물빛들은 왜 중국 최고의 여행지로 구채구가 손꼽히는지 말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엔 중국 정부의 노력도 큰 기여를 하고 있는 듯했다. 곳곳에서 장족 사람들이 쓰레기를 줍고 있었고 호수마다 '입수금지'란 표지판과 함께 관리 직원들의 삼엄한 경비가 있었다. 그러니 손 끝 하나 담글 수 없음은 물론이요 물수제비조차 뜰 수 없었다. 관광객들은 손끝에 물 한 방울 느껴보지 못하고 그저 눈과 사진기에만 그 물빛을 담아야 했다.

철저한 관리 속에 태고의 숨결을 그대로 품은 물빛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나에게는 물빛보다 장족들의 삶이 관심사였다. 쓰레기를 줍는 장족들도 신기했고 호숫가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어느샌가 곁에 나타나는 전통 옷을 입은 장족들도 그랬다.

곁에 다가온 이들은 한쪽 팔에 자신들이 입은 것과 비슷한 전통의상 몇 벌씩을 걸치고 있었는데 자꾸만 옷을 들이밀며 입어볼 것을 권유했다. 신기한 마음에 대충 걸쳐보자 얼른 내 머리에 전통모자까지 씌우고는 빛의 속도로 사진을 찍어줬다. 고맙다는 말을 건네자 돌아온 것은 쑥 내민 손과 함께 "우콰이"란 말이었다. 사진 찍어준 비용 5위안을 달라는 것.

한 아주머니는 새끼양 한 마리를 안고 다니다가 나에게 안겨주었는데 역시나 사진 한 방 찍어주곤 '우콰이!'를 외쳤다. 뭔가 당했다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화장기 하나 없이 순박하게 씌익 웃는 그분들의 얼굴은 번번이 내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나는 이분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돈을 받고 나면 재빠르게 다른 관광객들에게 로 가버려 단 한 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내가 이들을 다시 만나 조금이나마 얘기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저녁 무렵이나 되어서였다.

구채구 장족 민가 '잠입'을 감행하다

장족 전통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자마자 아주머니는 '우콰이'를 외치셨다.
 장족 전통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자마자 아주머니는 '우콰이'를 외치셨다.
ⓒ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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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그날 저녁 우리는 버스에서 자연스레 한 팀이 되어버린 중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장족 전통 공연을 보러가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상업화된 전통춤을 보느니 어떻게든 장족 민가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구채구는 이름 그대로 아홉 개의 마을을 의미한다. 전쟁통에 떠밀려 온 장족들이 작은 마을 아홉 개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구채구의 아홉 개의 말뚝이 발견된 데서 이름이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정부에서 만든 안내문 글귀를 보면 1975년 어느 벌목공이 산을 헤매다 이 계곡에 발을 디딘 게 구채구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라고 한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이 계곡에 살던 장족들도 구채구 밖의 한족들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뒤 구채구는 중국 정부의 공식 '국립공원'이 되고 그곳의 아홉 마을 장족들은 '중국 인민'이 됐다.

겨우 몇 십 년 전에야 문명, 중국 정부, 그리고 한족들과 만난 장족들.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중국 정부에 대한 그들의 생각도 궁금했다. 하지만 공원 직원에게 민가로 가는 길을 안내받고 찾아갔을 때 내가 만난 것은 인위적인 무엇이었다. 장족들의 전통가옥 모양으로 집 몇 채 만들어놓고 전통적인 술이나 음식, 옷가지나 장신구 따위를 팔고 있는 일종의 민속촌이었다.

성에 안 찬 나는 다시 직원을 찾아 "진짜 장족 마을에 가고 싶다"며 길을 물었지만 그는 그곳엔 절대 갈 수 없다며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번개처럼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쳤다. 우리가 구채구의 계곡과 계곡 사이를 이동하기 위해 타던 소형버스였다. 버스는 구채구의 모든 곳을 갈 테다. 그렇다면 쓰레기를 줍거나 옷을 들고 다니는 장족들도 그 버스로 집에 가질 않겠나. 나는 일행에게 버스를 타고 그들을 따라가 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둘의 반응은 싸늘했다. 특히 Y는 "중국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절대 불가능이야. 가봐도 아무것도 못 본다고"라며 나를 순진하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해보기 전엔 모르는 법. 나는 이번에도 말 잘 듣는 J를 내 편으로 만들어 "몸만 고생할 것"이라는 Y를 뒤로한 채 구채구로 오르는 버스에 다시 올랐다.

구채구 장족 민가 '잠입'을 감행하다

벽마다 전통문양이 가득했던 장족들의 집
 벽마다 전통문양이 가득했던 장족들의 집
ⓒ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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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엔 장족들 몇몇이 앉아 있었다. 그 중 검은 옷을 입은 아저씨가 나를 보며 알 수 없이 벙싯거렸다. 아저씨의 얼굴엔 '사람좋음'이란 네 글자가 씌어 있어 그 웃음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얼른 다가가 그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흔쾌히 "우리 마을에 가자"고 하셨고 우리는 그분을 따라 어딘지는 전혀 알 수 없는, 하지만 장족들의 진짜 마을이 분명한 어느 곳에 내릴 수 있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 사는 냄새가 훅 풍겨왔다. 너무 깨끗하고 정돈돼 있어 인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던 좀 전의 민속촌과는 달랐다. 손으로 밀면 떼가 밀릴 듯 꾀죄죄하지만 새까맣고 반짝거리는 눈빛만은 너무 예쁜 꼬마들이 마을 입구에서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겼고 가는 내내 졸졸 따라왔다.

아저씨는 일이 있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다. 따라가 보니 그 일이란 집 짓는 일이었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이층 높이의 집을 짓고 있었다. 아직은 나무 골격만 올리고 지붕을 얹고 있는 수준이었다. 집을 만드는 이들이 일꾼들이 아닌 마을 주민들이라고 했다.

이렇게 큰 집인걸 보면 돈이 많은 사람 집인 것 같다고 하자 아저씨는 껄껄 웃었다. 그 집은 마을 주민들 수십 명이 함께 살 공동주택이라는 설명이었다. 방 한 칸씩을 한 가족씩 사용하게 된다며 손가락으로 공간을 짚어주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큰 집은 커녕 고시원만큼 좁다란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 한 가구씩 살게 된다는 말에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웃옷을 벗고 본격적으로 공사현장에 들어선 아저씨와 헤어져 우리끼리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듣는 하지만 왠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새소리가 울려 퍼지고 굴뚝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시골마을. 넉넉한 무언가가 가슴 속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골목골목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 한 아주머니가 짐을 들고 걸어가시는 게 보였다. 한걸음에 달려가 아주머니의 짐을 들었다. 지금 필요한 건 뭐? 바로 '애교'!

"아이~, 워먼 쓰 한궈런. 워먼 씨앙 칸 니더 지아. 커이마?(아주머니이~, 저희는 한국인인데 어주머니 집을 보고 싶어요. 괜찮나요?)"

역시 되도 않는 중국어로 혀 짧은 소리까지 내며 아양을 떨자 아주머니는 큭큭 웃으시며 따라오라고 했다. 뒤에 선 J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는데 그의 얼굴엔 '으이구, 저 여우'가 가득했다.

아주머니의 집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빨래였다. 마당을 길게 가로지른 빨랫줄엔 원색의 전통 옷들이 주륵주륵 걸려 있었다. 다음은 부처며 꽃이 그려진 벽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출하고 작은 집이지만 하얀 벽에 그려진 선명하고도 정교한 원색 벽화 덕에 집은 알 수 없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앞으로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한어를 한 마디도 못하시던 장족 할머니는 직접 실을 짜내 옷을 지으셨다.
 한어를 한 마디도 못하시던 장족 할머니는 직접 실을 짜내 옷을 지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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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당에 앉아 나물 말리는 일을 시작하는 아주머니 곁에서 칭얼대는 아이들처럼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곳의 장족 사람들은 대체 무얼 하며 사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 질문에 대한 아주머니의 답은 아주 짧았다.

"이푸."

'이푸'라면 옷이란 뜻인데 옷을 만드는 게 직업? 아니면 파는 게 직업? 감이 잡히질 않아 다시 그 뜻을 물어야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관광객에게 우리 옷을 입혀주고 돈을 받는 게 내 일"이라고 보충 설명을 하셨다. 그제야 나는 푸른 저수지들마다 곁으로 다가와 전통의상을 내밀던 장족 아주머니들과 이 집 빨랫줄에 잔뜩 걸린 전통의상들의 관계가 이해됐다.

아주머니 남편의 직업은 호숫가 청소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통 옷은 직접 만든다며 우리를 작은 방으로 안내하셨다. 방문을 열자 놀랍게도 그곳에선 인디언처럼 머리카락을 여러 가닥 땋은 장족 할머니가 직접 실을 짜고 계셨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셨다. "어머니는 한어를 한 마디도 못하신다"는 아주머니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것이 장족들의 고유 언어임을 알았다.

아주머니는 친절했다. 우리에게 간식도 가져다 주셨고 내일은 황룡에 가느냐며 그곳에 갈 땐 숨이 가쁠 테니 천천히 올라가라는 조언도 해주셨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특히 "이곳이 관광지가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전엔 어떻게 사셨어요?"라는 질문에 아주머니는 나물 널던 손을 멈추고 멀리 산을 가리키며 "저기 저곳에서 마오뉴(쓰촨 지역 고유의 가축)를 몰면서 이곳저곳 다니며 살았다"고 할 때엔 아득한 눈빛이 됐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쩌면 하지 말았어야 할, 실례가 될 질문을 하고 말았다.

"지금 행복하세요? 앞으로도 계속 이푸 일을 하면서 사실 건가요?"
"행복? 글쎄… 앞으로를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우리가 뭘…."

말끝을 흐린 뒤 아주머니는 우리를 내버려둔 채 부엌으로 쏙 들어가 버리셨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시질 않아 크게 인사를 드린 뒤 우리는 집을 나서야 했다. 아주머니는 친절했지만 충분한 만남은 아니었다. 그래서 옆집에 들어가 보려고 폼을 잡는데 J가 "그만하자"며 내 팔을 잡았다.

"너라면 집에 외국인이 무작정 들어와 이런저런 질문 하는 거 좋겠어? 넌 왜 그렇게 멋대로야?"

지금까지 말 잘 듣던 J의 느닷없는 반격이라니. 게다가 같이 들어가고 같이 질문해놓고 이제 와서 나만 예의 없는 사람으로 만들다니. 화가 난 나는 쿵쿵 소리를 내며 혼자 저만치 걷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여행사연 쓰고 공정여행 가자' 응모 글



태그:#장족, #쓰촨성, #여행,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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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사회과 교사였고, 로스쿨생이었으며, 현재 [법률사무소 이유] 변호사입니다. 무엇보다 초등학생 남매둥이의 '엄마'입니다. 모든 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행복할 권리를 위한 '교육혁명'을 꿈꿉니다. 그것을 위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씁니다. (제보는 쪽지나 yoolawfi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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