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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들은 고려인을 "바위 위에 앉아도 풀이 돋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최근에 해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구소련 스탈린 치하에서 고려인 20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고, 이 과정에서 2만5000여 명이 숨졌다. 바제므스키지역 고려인은 남카자흐스탄의 아랄해 쪽으로, 아무르주와 하바롭스크 한인들은 카자흐스탄으로, 연해주 한인들은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됐다.

 

고향땅에서 6000km를 떠밀려와 황량한 늪지에 버려진 한인들이 스산한 늦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처음 한 소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제 살았다'였다고 한다.

 

갈밭 아래로 고인 물이 반짝였기 때문이란다. 갈밭을 베고 물길을 내자. 벼를 심을 수 있으니 이 겨울만 버티면 그래도 살 수 있겠다는 참으로 질긴 농부의 숨으로 뱉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일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적처럼 살아난다. 땅굴을 파고 토굴 속에서 겨울을 버티며 매일 아침 머리위로 거적을 들어 올리며 누가 죽었는지 확인하는 게 안부를 묻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에는 가산을 다 버리면서도 생명처럼 품고 온 씨앗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3년이 지나니 마을에 어린아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땅에서 고려인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집을 짓고 뿌릴 내리며 농업의 기적을 일구어 낸다.

 

소련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집단농장들을 만들어 수많은 노동 영웅들을 배출한다. 그들은 소련 농업사의 전설이 되어갔고 러시아 사람들은 그런 그들에게 "바위 위에 앉아도 풀이 돋게 하는 사람들"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 김승력 동북아평화연대 연해주사무국장 <초기연해주 한인 이주사와 독립운동>

 

우스리스크에 있는 '고려인이주 140주년기념관'을 방문하고 난 뒤에서야 알게 된 고려인들이 겪은 비참한 삶과 그것을 이겨낸 강인함이다.

 

1863년에 농민 13세대가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정착한 이후 150년 동안 극동지역과 중앙아시아로 흩어져 살아야 했던 한인들은 일제강점기에는 나라를 찾기 위한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구소련 시대에는 강제이주로 2만5000여 명이 사망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황무지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 CIS(독립국가연합) 국가들로 분리된 지금 연해주로 돌아왔지만 굴곡진 역사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민족의 무속신화 중엔 '바리데기' 이야기가 있다. 이씨주상금 대왕은 아들을 낳고자 치성을 드렸지만 7번째에도 딸을 낳았다. 대왕 부부는 아이를 옥함에 담아 강물에 버렸다.

 

바리공덕 할아비와 할미에게 구출되어 자란 바리데기는 열다섯 살 무렵. 친아버지인 대왕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천 서역국으로 불사약을 구하러 떠났다. 저승과 신선세계에서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바리데기는 약을 구해 대왕을 살렸다.

 

사회적기업 '바리의 꿈'은 척박한 땅 러시아의 고려인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들이 신화 속 바리데기의 삶과 닮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에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해방을 위해 기금을 모으고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의 희생정신이 바리데기와 같다.

 

연해주 고려인의 희망 '바리의 꿈'

 

연해주에서 만든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 한국에 수출하는 회사. 그렇게만 알았다. 전등불도 제대로 켜지 않는 사무실에서 전화기를 들고 러시아 말로 끊임없이 주고받는 대화. 고려인 2세와 3세, 한국에서 온 직원, 모든 것이 일반 사무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메주공장과 콩을 심을 농지, 게스트하우스, 아그로 상생농장을 둘러보는 동안 보이는 것 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러시아에서 최소한 3년은 살아야 무엇인가가 보인다. 우리 살림을 이해하고, 러시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관련단체의 업무패턴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살림은 재정이 아니라 사소한 인간관계 이웃, 고려인과 러시아인들의 사고방식 등 아무 미묘하고 다양한 것들이다."

 

'바리의 꿈' 김윤령 부장의 연해주에서 일한다는 것에 대한 간단하고 명료한 설명이다. 한국에서 일하던 방식으로는 고려인과 러시아인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윤령 부장은 방문객들이 묵을 숙소를 살피고, 겨우내 파손된 것을 일일이 점검하고 청소와 보수 계획을 세웠다. 또 메주공장과 돼지사육장을 둘러보고, 콩을 파종할 농지를 직접 찾아가고, 한국에서 업무차 방문하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협력 사업을 논의한다.

 

윤령씨의 딸 유새임양은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이다. 한국의 졸업식이 그러하듯 교장 교감선생님의 말씀이 길어지고, 재학생과 졸업생의 공연이 준비됐다. 졸업생들은 어깨띠와 고유의 의상을 입고 하루종일 거리를 누비며 리무즌을 타고 파티를 연다. 우스리스크 전체가 같은 날 졸업식을 하기에 시내 곳곳에 무리지은 졸업생들이 보인다.

 

쑨얏센 고향마을의 최까짜와 최니끼타

 

최까짜 아주머니는 아침 9시가 되면 묵다바르와 함께 농장에 나타난다. 점심 도시락인 빵과 치즈, 야채 샐러드를 비닐 하우스 한쪽에 걸어두고 담배 피우는 시간 외에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부모님에게 농사일을 배웠고, 농사일을 하는 시간이 제일 즐겁단다.

 

환갑이 지난 나이지만 음정 박자 모두 갖춘 가수다. 우리나라의 대중 가요를 구성지게 부르며 부지런히 호미자루를 끌어당긴다. 하우스 안의 풀을 모두 뽑아내고 밭이랑을 만들어 무를 심는게 하루 일과다.

 

양파를 실어 나르고, 풀을 같이 뽑는 동안 살아온 이야기가 절로 나온다. 딱딱하게 굳은 땅을 괭이로 파헤칠려고 해서 헛간을 뒤져 로우터리를 끌고 나왔다. 시동을 걸고 굳은 땅을 모두 갈아엎어 놓자 "손님 일 잘해"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덕분에 시간도 벌고 일도 수월해졌단다. 이랑을 짓고 무씨 파종을 함께하고 나니 더욱 친해졌다.

 

최까짜 아주머니는 1998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비행기 조종사였던 남편 덕에 집을 몇 채씩 가졌을 정도로 잘살았다. 하지만 90년대 초 우즈베키스탄이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돈은 휴지조각이 됐다. 당시 7세 된 딸과 함께 우수리스크로 돌아온 최씨는 돈도, 집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였다. 10년간 최씨는 2차대전 당시 러시아군의 막사와 공사가 채 덜 끝난 교회 예배당, 그리고 동북아평화재단이 마련한 임시 거처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도시 생활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어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 생각을 하던 중 농업정착 프로그램을 듣고 찾아와 함께 살게 되었다.

 

최니키타(61세)와 부인 남류바는 2008년 고향마을로 이주했다. 러시아 정부의 고려인 연해주 귀환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라즈돌노예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열악한 생활환경과 생계대책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났다.

 

그러나 최니키타 부부는 개인 복지사업가의 고아원에서 일하면서 40여 명의 고아들과 생활했다. 농사도 50헥타를 지어 자체 부식도 해결하고, 블라디보스톡에 내다 팔기도 하며, 축사 수리, 건물 수리 및 증축, 아이들에게 영농기술 가르치기 등 다방면의 일을 했다.

 

최까짜 누나의 소개로 고려인이 모여 마을을 만들어 가는 고향마을로 오게 됐다. 지금은 마을 이장 일을 맡아 고려인들의 큰 어른으로, 또 한편으로는 목수로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아그로상생의 한국인들

 

아그로상생은 종단 대순진리회가 2000년부터 연해주에 진출, 2002년 현지에 설립한 영농법인이다. 매년 줄어드는 국내 농경지와 갈수록 높아지는 대외 식량 의존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해주 농지개발에 나선 것이다. 연해주 전역에 걸쳐 제주도 면적인 8개군, 17개 농장, 총면적 13만923ha(4억 평)의 농지를 확보하여 대순농장과 대형 물류 시설 및 제조 가공 시설을 설립해 대규모 복합영농사업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유기농 벼농사를 위해 오염원이 없는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하러온 사람들과 러시아인 중국인들이 협력하여 대규모 농업을 경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건초를 생산 국내축협에 수출하고 있다.

 

연해주의 중국인들

 

중국인들은 연해주에서도 끊질긴 생활력을 보인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쉬지 않고 일한다. 이들은 남동쪽은 비닐을 씌우고 북서쪽은 움집 형태의 북방식 비닐하우스를 지어 놓고 애채를 재배하고 닭과 돼지를 키운다. 도로주변 공터에 집에서 키운 야채와 과일, 각종 모종을 내다팔아 러시아인보다 경제력이 높다.

 

논농사를 하는 이들은 경작지를 세내어 수확의 1/3을 갖는다. 논농사를 위해 중국에서 건너와 가을걷이가 끝날 때 까지 논 근처에 움막을 짓고 생활한다. 바람과 태양에 구릿빛으로 그을린 모습에 눈빛만 반짝인다.

 

컨테이너, 혹은 비닐과 천막으로 비바람을 막고 주방과 잠잘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한참 떨어진 곳에 화장실을 지어 놓았다. 일하는 틈틈이 미꾸라지와 메기 잉어 등을 잡아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한다. 아그로 상생의 현지법인장은 이들은 정말 훌륭한 일꾼이라고 칭찬한다. 맡겨진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반드시 해내고, 곳곳에 있는 동료들을 모아 잡초제거 등 인력으로 하는 모든 일을 말끔히 해낸다고 한다.

 

바리의 꿈

 

경기도와 함께 연해주에 장공장을 설립하기로 한 일이 틀어졌다. 동북아평화재단에서 마련된 기금을 반납한 것이다. 김현동 이사장은 이것이 현 정부의 경직된 동북아정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연해주의 고려인 정착사업이 위축되고, 또 있는 사업마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윤령 부장은 한국에서는 세일즈우먼이다. 전국에 있는 장공장을 찾아 다니며 고려인들이 생산한 콩과 메주를 팔고, 자원봉사단을 유치하고, 여행객을 모은다. 연해주에서는 각종 시설을 둘러보고 청소하고 보수해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유관단체의 모임에 참석하고 고려인 정착촌 마을 구성원들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건강문제에까지 신경을 쓴다.

 

"고려인 2세들은 사회주의식 교육과 생활방식에 익숙해 책임자가 직접 나서서 말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곳에 직접 찾아가 얼굴을 맞대고 얘기해야 하는 일이 힘들다"고 고충을 털어 놓았다. "한국에서 정말 열심히 일해야 여기있는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다. 메주와 청국장이 많이 팔리면 연해주에 일자리가 많아지고 고려인들이 행복해진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여행사연 쓰고 공정여행 가자!' 응모 글


태그:#블라디보스톡, #연해주고려인, #바리의 꿈, #러시아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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