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당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신을 원망하기 보다는 스스로가 진정으로 준비가 됐는지를 먼저 반성하기 바랍니다. 위대한 신께서는 진정으로 준비가 된 자에게는 기꺼이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말 여자 친구와 들른 대형서점에서 우연히 힌두 경전의 격언을 읽었을 때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면서 처음 그녀를 만나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3월의 한 주말에 있었던 일입니다. 토요일 저녁. 샤워를 하던 중 갑자기 물이 세게 나오면서 방향이 틀어진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이 닿은 곳에는 하필 핸드폰이 있었습니다. 기존 핸드폰보다 침수에 훨씬 약하다는 스마트 폰에 그것도 더운 물이 쏟아졌으니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지인들의 연락처야 다시 구하면 된다지만 일정 관리를 전적으로 스마트 폰에 의존한 나머지 당장 내일 누굴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지 조차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다음 날이 일요일이었기에 A/S 센터가 휴무에 들어간 것 역시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밤늦게 까지 인터넷을 통해 수소문해서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사설 A/S 센터가 집에서 꽤 먼 신도림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달려갔지만 가는 내내 계속 착잡한 기분이었습니다.

남들 모두 주5일 근무를 하지만 한주의 예외도 없이 토요일도 오후 4시까지 환자를 돌봐야 하고 주말이라고 해도 토요일·일요일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맞선에 나가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공연하듯 쏟아내야 하는 일상. 주말이 와도 설레지 않고 월요일이 와도 아쉽지 않은 그렇게 매일을 버텨나가는 일상 중에 달갑지 않은 일까지 생겼으니 우울함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A/S 센터에서는 2시간 정도의 수리 시간이 소요된다고 하였습니다. 집에 다시 돌아갔다 오기도 그렇다고 그곳에서 기다리기도 애매한 시간. 무엇보다도 점심 때 만나기로한 맞선 장소까지 정시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까지 했으니 그 2시간이라는 기다림이 무척 야속했지만 수리 기사를 탓한다고 나아질 것은 전혀 없었기에 같은 건물 안 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일상에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읽은 지도 오래됐고 글 다운 글 한 편 못 쓰고 지내던 것이 늘 마음에 걸리던 차였으니 기왕 시간이 난 김에 책이라도 읽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구입하고 조용히 독서할 곳을 찾던 중 건물의 한 귀퉁이에 야외 테라스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파트의 베란다처럼 건물 한쪽을 열어서 창을 내고 그 안에 벤치와 간단한 음료수 자판기를 마련해 놓은 장소였습니다. 아무도 없이 조용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잘 들어오지 않는 책을 한 장 두 장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따스한 바람이 불어 몸 전체를 감싸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찾아 온 봄바람.

어느새 저도 모르게 읽고 있던 책을 덮고는 두 눈을 감고 봄의 내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 좋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바쁘다, 큰일이다, 어떡하지?' 같은 부정적인 탄식이 입에 붙었던 제가 긍정적인 혼잣말을 한 것이 과연 얼마만이었는지요.

딱히 급한 일도 바쁠 일도 없이 시간에 쫓겨 매일 매일을 보내느라 인지하지 못했던 도중에 바깥에는 어느덧 봄이 와 있었습니다. 그 따스함과 포근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전적으로 제가 그걸 느끼지 않기 위해 도망을 쳤기 때문이었죠. 글을 쓰지 못했던 원인 역시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 관념 탓에 스스로를 몰아댄 것이 되레 글을 쓰는 데 방해를 줬다는 것도 그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라 헌강왕 때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저자에서 놀다 들어와 역신이 아내와 불륜 중인 것을 발견하고 마당에서 춤을 추며 불렀다는 처용가는 심리학적으로 '외적인 것에 쫓겨 자신을 돌보지 않다 보면 열등한 인격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 생각한다면 토요일 저녁 핸드폰에 샤워기의 더운 물을 끼얹었던 것은 내면의 아픔을 치료하려는 무의식의 발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핸드폰의 수리를 기다리는 2시간 동안 정작 수리가 되었던 것은 아팠던 스스로 였으니까요. 그리고 그 날 오후.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할 진정한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었는지 드디어 저는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를 맞선을 볼 수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자유칼럽그룹 중복게재입니다.



태그:#봄, #준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