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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최규석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야기해보니까 잘 살았더라고요."

"최규석씨 집이 부자예요? 의외네요."

"아니, 집이 부자라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잘 살았다'. 바른 문제의식을 갖고 바르게 살았다는 거죠."

 

예전에 어느 기자와 나눈 대화의 일부분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만화가 최규석 이야기가 나왔고, "최규석이 잘 살았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최규석씨 집이 부자예요?"란 질문을 던졌다. '잘 산다'는 말이 빚은 오해였다.

 

기자의 대답을 듣고, 별 말은 안 했지만 '잘 산다'는 말을 듣고 경제적 풍요만을 떠올린 자신이 속물 같아 부끄러웠다. 동시에 '잘살다'라는 동사가 어째서 경제적, 물질적인 풍요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건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한국사회가 모범으로 여기는 삶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이고, 그 목표를 달성한 사람들에게만 사회적 성공이라는 명찰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안분지족, 안빈낙도 같은 말은 고전시가에나 등장하는 것이고, 현실에서는 항상 더 많은 연봉과 더 큰 집, 남들이 부러워할 외제차와 명품을 좇는 것이 도시인들의 삶이다. 

 

그러나 물질적 욕망을 좇아 아등바등 살다가도 회의가 드는 순간이 온다.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것일까. 행복하려고 돈을 벌려는 것인데, 돈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한가. 그런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은 그런 회의에 빠진 이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저자 송성영은 10여 년을 머문 정든 집을 떠나 전남 고흥에 새집을 짓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과 사소한 행복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먼저 욕심부터 버려라'

 

충남 공주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저자는 집 뒤에 호남고속철도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터전을 찾아나선다. 몇 년간 전국을 떠돌며 새로운 터를 찾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아내와 자주 싸운다. 아내는 새 집에서 민박을 하고 싶어 하지만, 그는 숙박업자 노릇이 썩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아내의 요구대로 민박집을 차리기로 하지만, 아내의 욕심은 멈추지 않는다. 아내는 새 집을 지은 김에 빚까지 내며 변기와 세면대를 새로 설치한다.

 

10여 년 전 공주에서 빈 시골집을 구했을 때 용감무쌍하게 들어가 헌 장판지를 끄집어내 냇물에 씻고 또 씻으며 재활용했던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내부 공간 설비에 대한 눈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업자들과 흥정하며 물품과 설치비를 깎고 또 깎았습니다. - <모두가 기적 같은 일> 193p

 

욕심에 사로잡힌 것은 아내만이 아니다. 소박하게 농사지으며 살 땅을 찾아 앞으로 이웃이 될지도 모를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문화 사업을 벌일 건물을 어디에 짓고, 사업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따위만 이야기한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개발' '사업' 따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리산을 택했는데 '지금 내가 여기서 뭔 짓거리를 하고 있나' 싶었습니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25p

 

심지어 고흥에 가까스로 자리를 잡은 뒤에도 마을에 핵발전소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들려와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에 맞서 싸운다. 저자는 그저 소박한 삶을 살고 싶을 뿐이지만, 더 크고 화려한 집을 짓고 싶은 아내의 욕심, 개발로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의 욕심 등이 끊임없이 그의 바람을 방해한다.

 

그러나 자연은 욕심 부리지 않는 자에게 베푸는 법이다. 저자는 새로운 터전에서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배운다. 그는 봄 내내 생선을 잡으려 바다를 헤매지만 허탕만 친다.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정작 고기가 많이 나오는 곳은 집 앞 해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래도록 헤맨 끝에 자신이 눈먼 장님이었음을 깨달은 저자는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흐릅니다. 최소한의 것에 만족하고 생활에 대한 두려움 없이 낮은 자세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바다는 그만큼 내줄 것입니다. 바다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큰 고기를 잡겠다고 욕심 부리자 아무것도 내주지 않던 바다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욕심부터 버려라.' - <모두가 기적 같은 일> 222p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풍족해지는 역설. 이것이 바로 자연이 베푸는 '기적 같은 일'이다.

 

"거봐, 비우니까 채워지잖아"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은 사람들이 베푸는 인정이다. 불과 5000만 원으로 집을 지으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번듯한 목조주택을 완성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집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 짓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다. 그래서 고생 끝에 완성된 집을 가족들과 함께 바라보며 저자는 "이건 그냥 우리 가족들만의 집이 아닌겨"라고 말한다.

 

인건비를 적게 받으며 집짓기에 나서준 윤구씨, 목재를 대준 처가, 집 짓는 데 부족한 거금을 선뜻 내준 사람들, 10여 년 동안 아내에게 그림을 배운 수많은 아이들…. 한 달에 2만~3만 원씩 지불하며 아내에게 그림을 배운 수많은 아이들이 없었다면 집짓기는 불가능했습니다. - <모두가 기적 같은 일> 124p

 

사람들의 도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새집 옆에 마을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만들자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서 책을 보내 한 달 만에 1000권이 넘는 책이 모인다. 일 주일도 안 돼 꽉 찬 책장을 보며 저자는 책을 보내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고맙다고 말한다.

 

책이 들어오자마자 고마움에 대한 인사를 건네기 위해 전화를 걸었는데, 모두들 책을 받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건네왔던 것입니다. (중략) 책을 보내기 위해 일일이 포장하고 택배비를 부담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도 헌책을 보내 미안하다며 받아줘서 오히려 고맙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를 위해 많은 책을 선물하는 것이 처음이라며 이런 기회를 줘서 너무 고맙다고 했습니다. - <모두가 기적 같은 일> 234p

 

그 광경을 보며 저자는 자신이 쓴 책 제목이기도 한 "거봐, 비우니까 채워지잖아"라는 말을 새삼스레 떠올린다. 아무 생각 없이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비워놨지만, 그 공간을 책으로 채워준 고마운 사람들. 그리고 책을 기증함으로써 책장은 비웠지만, 그 이상의 뿌듯함으로 마음을 채운 사람들. 비우니까 채워지고, 욕심을 버릴 때에야 비로소 풍요로워지는 역설은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욕심을 버릴 때 풍족해지는 '기적 같은 일'

 

저자 송성영은 이 책 전반에 걸쳐 욕심을 버릴 때에야 비로소 풍요로워지는 '기적 같은 일'을 이야기한다. 욕심을 버리니 자연이 아낌없이 먹을 것을 내주고, 가진 것은 없지만 사람들이 베푸는 인정으로 새집과 작은 도서관을 완성한다. 가진 것은 없지만 자연과 사람들에 둘러싸여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마음으로 살아간다.

 

물론 욕심을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한 사람을 승리자로 우대하는 한국사회에서 혼자 마음을 비우는 일은 간단치 않다. 충남 공주에서 10여 년간 농사를 지었던 저자와 가족들도 때론 집을 더 크고 화려하게 꾸미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 별 필요도 없는 노트북을 순간의 편리 때문에 구입하기도 한다. 하물며 각박한 도시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이들에게 욕심을 버리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그러나 욕심이 자신을 짓누르고, 욕심 때문에 불행해지는 순간에 한번쯤 이 책을 꺼내들기 바란다. 한순간에 욕심을 버릴 수는 없어도 욕심의 실체를 응시하고, 얼마나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는지 확인한다면 욕심에 맞서 싸우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풍요로워지는 역설, 저자가 겪었던 것과 같은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기계가 아닌 풀과 흙과 인정에 둘러싸여야 한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땅 위에서 한때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녔듯이 이제 아들이 아버지를 뒤따라 걸어가는 것, 이것이 삶의 행진이다." - 웬델 베리

덧붙이는 글 |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송성영 씀, 오마이북 펴냄, 2012년 6월, 1만3000원


모두가 기적 같은 일 - 바닷가 새 터를 만나고 사람의 마음으로 집을 짓고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송성영 지음, 오마이북(2012)


태그:#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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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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