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스카이론 타워에서 찍은 나이아가라 폭포. 왼쪽이 미국의 Goat(염소)섬이고 오른쪽이 캐나다의 테이블 록(Table rock)임. 그 사이에 케이블이 설치돼 닉 월렌다가 고공 줄타기로 건넜음.
 스카이론 타워에서 찍은 나이아가라 폭포. 왼쪽이 미국의 Goat(염소)섬이고 오른쪽이 캐나다의 테이블 록(Table rock)임. 그 사이에 케이블이 설치돼 닉 월렌다가 고공 줄타기로 건넜음.
ⓒ Ujjwal Kumar(저작권 해제)

관련사진보기



'세상에 영감을 던지고 싶었다.'고?
그가 한 말은 아무래도 재음미의 대상이다.

그가 도착하는 캐나다 쪽에는 10만 이상의 관중이 운집했다. 이것은 기록상 나이아가라 폭포의 최대 인파다. 그가 출발한 미국 쪽에도 발 디딜 틈 없게 관중들이 몰려 있었다. 전 세계 10억 이상의 인류가 잠시 일손을 놓고 그의 동작에 숨을 죽여야 했다. 그렇다면 그는 그의 행위가 무슨 '영감'을 주기 위한 것이었는지 해명할 책임이 있지 않은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조망하는 스카이론 타워(Skylon Tower)
 나이아가라 폭포를 조망하는 스카이론 타워(Skylon Tower)
ⓒ 이상묵

관련사진보기



6월 15일은 내게는 남북공동선언의 날로 각인돼 있다. 역사의 기록 사진들은 이제 희미해 졌지만 매년 나오는 달력에 그렇게 인쇄돼 있다. 그 때문인가. 같은 날 추가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이제 불멸의 추억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리하는 주정부는 폭포 주위에서 생명을 도박하는 어떤 모험도 금지하고 있다.

고공 줄타기 이벤트가 벌어지는 폭포 쪽으로 향하는 관중들
 고공 줄타기 이벤트가 벌어지는 폭포 쪽으로 향하는 관중들
ⓒ 이상묵

관련사진보기


기념 티 셔츠를 팔기 위해 잽싸게 등장한 노점상
 기념 티 셔츠를 팔기 위해 잽싸게 등장한 노점상
ⓒ 이상묵

관련사진보기



이번에 닉 월렌다(Nik Wallenda)가 12 미터 길이의 균형봉 하나 달랑 들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고공 줄타기로 월경한 것은 1859년 마지막 있었던 이래 116년만의 일이다. 설사 이런 쇼를 다시 허용한다 해도 20년만이라는 기간을 당국은 상정해 두고 있다. 앞으로 20년 더 산다는 보장도 없고 보니 불멸의 추억이라고 해서 어디 틀린 말인가?

그것은 한말로 '세기의 쇼'였다.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통째로 생방송 무대가 됐다. 어떻게 한 사람이 12만 관중을 농락할 수 있을까 의문마저 드는 한편의 거대한 '행위 예술'이기도 했다.

멀리 기중기들이 보이는 곳이 미국 쪽 Goat 섬이고 거기 운집한 관중들
 멀리 기중기들이 보이는 곳이 미국 쪽 Goat 섬이고 거기 운집한 관중들
ⓒ 이상묵

관련사진보기


캐나다 쪽 테이블 록(Table Rock) 구역에 운집한 관중들. 조명탑들과 기중기들이 보인다
 캐나다 쪽 테이블 록(Table Rock) 구역에 운집한 관중들. 조명탑들과 기중기들이 보인다
ⓒ 이상묵

관련사진보기


이 '세기의 쇼'를 구경 나온 엄마와 아들
 이 '세기의 쇼'를 구경 나온 엄마와 아들
ⓒ 이상묵

관련사진보기



실제 닉 월렌다는 미국의 고공 줄타기 예술가(American High Wire Artist)로 불린다. 화가나 작가를 예술가라고 하듯 그 역시 Artist(예술가)라는 것이다.

2008년 가을 닉은 14층 건물 사이 76m 길이의 케이블 위를 처음은 걸어서 다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고공 줄타기를 했다. 가장 높고 긴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건넜다고 해서 기네스 북 기록에 올랐다.

그리고 이번 6월 15일 밤 10시 16분 미국 쪽을 출발, 25분 만에 폭포 위를 가로질러 캐나다에 입경함으로써 폭포 위를 최초로 고공 줄타기한 인물이 됐다.

미국의 고트 섬(Goat Island)에서 캐나다의 테이블 록(Table Rock)까지 케이블이 설치됐다. 550 m의 거리. 폭포 보다 49 m 높게 설치된 직경 5cm의 강철 케이블은 임시로 동원된 기중기들에 붙들어 매여졌다.
  
폭포 위를 가로지르며 설치된 강철 케이블
 폭포 위를 가로지르며 설치된 강철 케이블
ⓒ 이상묵

관련사진보기



그의 '행위 예술'은 폭포 위를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서 펼쳐졌다.
물안개는 무대 위에 드리운 커튼이 돼 닉은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거듭 했다.
그가 짙은 물안개 속에 사라질 때는 속절없이 공포와 맞장 뜨는 순간이다. 발밑의 줄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은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샌프란시스코의 가파른 언덕길에서 갑자기 자동차 보닛 밑의 도로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또 어느 산길을 갈 때 갑자기 깊은 안개를 만나 도로가 실종된 경우도 있었다. 그때의 공포는 절망과 동의어였다.

케이블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닉 월렌다가 카메라 모니터에 포착됨
 케이블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닉 월렌다가 카메라 모니터에 포착됨
ⓒ 이상묵

관련사진보기


캐나다 쪽 목표에 다가오는 닉 월렌다
 캐나다 쪽 목표에 다가오는 닉 월렌다
ⓒ 이상묵

관련사진보기


" 물안개가 너무 두꺼웠다. 잘 볼 수가 없을 때가 많았다. 바람도 심했다. 그리고 발밑 폭포의 소용돌이 때문에 줄을 보기가 어려웠다."

캐나다 쪽에 발을 딛고 나서의 닉의 고백이다.

고공 줄타기 예술가는 만들어 지기도 하지만 타고 난다.  닉은 고공 줄타기의 명문 출신이다. 7대나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 때부터의 가업이다. 그의 롤모델인 증조부 칼 월렌다는 1978년 고공 줄타기를 하다가 추락사했다.

닉은 1979년 플로리다 출생으로 현재 33세살. 부인과 딸 셋이 있다. 그런데 부인 역시 줄타기를 8대 째나 해 온 명문 출신으로 자신도 줄타기를 한다. 그러니까 부부는 DNA 배열이 같고 고공 줄타기는 그들의 생업이다.

닉은 2살 때부터 어릿광대 옷을 입고 흥행에 합류, 4살 때부터 벌써 줄타기를 했다. 연습 때 그의 부모는 줄 타는 그에게 물건을 던지기도 했고 어떨 때는 그에게 새총을 쏘기도 했다. 주의력 분산을 막기 위한 훈련이었다. 

부인과 딸 셋은 닉이 줄타기를 시작하기 전 서로 손을 잡고 기도를 했다. 그의 신발은 어머니가 만들었다. 아메리칸 인디안들이 신는 모카신과 발레용 신발을 절충한 것으로 물기에 젖은 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내 옆에서 같이 구경하던 백인 설명으로는 사슴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마 모카신을 두고 한 모양이었다.

이번 이벤트를 준비하는데 130만 달러의 경비가 들었다. 미국의 ABC TV 방송국의 협찬 조건으로 닉은 추락할 경우 몸을 케이블에 매다는 안전장치를 몸에 부착해야만 했다. 이것은 인간 본능 내면의 막장 공포를 유보하는 조치였다. 하지만 흥행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다.

로마 제국의 검투사는 어느 한쪽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던가. 닉은 한사코 안전장치를 거부했지만 ABC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침내 캐나다 쪽에 설치한 플랫홈에 내려서는 닉 월렌다. 아직도 들고 있는 균형봉이 보인다
 마침내 캐나다 쪽에 설치한 플랫홈에 내려서는 닉 월렌다. 아직도 들고 있는 균형봉이 보인다
ⓒ 이상묵

관련사진보기



그가 거의 다 건너올 쯤에는 기진맥진 상태였다. " 기운을 잃었다. 손도 감각을 잃어 간다. 몸이 약해지는 것 같다."고 전화로 호소했다.  하지만 마침내 다 건너 와서 가지고 온 여권을 캐나다 세관원에게 내보였다.

그는 자신의 성공이 '기도'와 '집중력'과 '철저한 준비'의 결과라고 했다.  이 말은 그가 이번 줄타기의 공포를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그가 말한 세상에 던졌다는 '영감'은 바로 그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태그:#닉 월렌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