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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평화로운 민통선 지역과 삭막한 철책을 따라 달려가는 파주 DMZ 평화누리길.
 왼쪽의 평화로운 민통선 지역과 삭막한 철책을 따라 달려가는 파주 DMZ 평화누리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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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길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자 전국적으로 'OO길'이 모세혈관처럼 퍼지고 있다. 결국엔 남한의 최북단 지역인 DMZ 가까이에도 '평화 누리길'이라는 이름의 길이 생겨났다. 각 지자체 별로 우후죽순 격으로 길을 조성해서 그런지 2년 전에 생긴 길이라는데 최근에야 알게 됐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김포를 지나 파주, 철원까지 남북을 가르는 휴전선을 따라 만든 걷기 혹은 트레킹 하기 좋은 코스라고 한다. 이 길을 다녀와 본 이웃 블로거에게 물어보니 철책길, 논둑길, 마을길, 강변길, 찻길 등 다양한 길이 이어진 코스로 자전거 여행도 가능하다는 평이다. 하긴 요즘 같은 뜨거운 날씨엔 트레킹하는 사람은커녕 동네 주민들도 안 보일 게다. 잔칫날 동네 사람들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슬쩍 올려놓듯이 자전거를 타고 남한의 접경지역 'DMZ 평화 누리길'을 달려보기로 했다.

지난 16일, 애마 '잔차'를 대동하고서 파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낮 기온이 벌써 31도란다. 이런 날씨에 그늘이 거의 없는 삭막한 철책선과 인적 드문 초록의 민통선 길을 달려갈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이름만 들어도 통일의 염원이 느껴지는 임진강이 이 길을 따라 흘러서였다.
 
평화보단 아픈 상처가 느껴지는 길

언제 저 철길을 달려 개성, 평양, 신의주에 가볼 수 있을까.
 언제 저 철길을 달려 개성, 평양, 신의주에 가볼 수 있을까.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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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평화로운 논밭과 철책, 참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초록의 평화로운 논밭과 철책, 참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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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경의선 전철이 복선화되면서 파주 가는 길이 편해졌다. 열차는 불과 1시간여 만에 종점인 임진강역에 사람들을 내려준다. 선로만 있을 뿐 더 이상 기차가 북쪽으로 달려갈 수 없게 된 지 60년이 지난 임진강역은 답답함과 동시에 통일의 희망을 품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화가이자 우리나라의 근대 신여성 중 하나라는 나혜석(1896~1948) 선생은 그녀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16개월간의 유럽 여행을 위한 첫 출발로 경의선 기차를 타고 개성·신의주를 지나 중국 만주와 옛 소련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 파리까지 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도 그런 여행을 했는데... 아쉬움이 커진다.

임진강역에서 가까운 파주 DMZ길의 들머리 마정리에 들어서니 마정 초등학교 앞에서 놀고 있는 귀여운 초등학생들이 자전거 여행자를 반긴다. 누구냐, 이름이 뭐냐, 얼굴을 보여 달라며 달라붙는 아이들을 겨우 떼놓고, 동네 '부흥수퍼' 가게 아저씨에게 길을 물어 보니 바로 '대비둑'을 알려 주신다.  

장산 고갯마루에서 보이는 왼쪽의 초평도, 그 너머는 북한의 산들이다.
 장산 고갯마루에서 보이는 왼쪽의 초평도, 그 너머는 북한의 산들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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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가 끝난 초록의 마정리 논길을 따라 북쪽으로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철책선이 보이고 초소와 철책을 따라 난 '대비둑' 위로 올라서게 된다. 둑길 곳곳에 즐비하게 설치된 철책과 방공참호, 방호벽 등 군사 시설물들은 이곳이 남북 분단의 최일선 현장임을 실감나게 한다. 다행히 초소의 병사들은 친절했다. 나는 그들과 담소를 나누며 이 길을 지나는 민간인에게 꼭 받는다는 이름, 주민번호,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작은 돌들이 드문드문 박혀있는 철책 너머로 임진강변의 푸르른 논밭과 동식물들의 보금자리로 알맞을 것 같은 습지, 초지가 아마존처럼 비밀스럽게 펼쳐져 있다. 이 순간만큼은 철책 위로 자유로이 날아 남북한을 넘나드는 하얀 백로들이 부럽기만 하다. 평화보다는 분단의 안타까움과 상처가 더 다가오는 'DMZ 평화 누리길'이다.

철책 둑길에 이어 숲속 오솔길을 지나자 빈 초소와 함께 파주시에서 만든 관광안내 게시판과 포토존이 나타난다. 마음 놓고 사진도 찍으며 나무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군인 두 명이 나타난다. 자전거 탄 민간인이 홀로 철책선 가까이에서 어물쩡거리는 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나 보다. 그들은 이어지는 동네 '장산리' '임진리' 가는 농로길을 알려준다. 어차피 앞에 '장산'이 가로막혀 있어 철책길과는 잠시 안녕이다.   

자전거 여행자를 살린 오디 열매

새콤달콤한 오디 열매 덕분에 시달리던 갈증에서 벗어났다.
 새콤달콤한 오디 열매 덕분에 시달리던 갈증에서 벗어났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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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은 다행히 동네 야산 격이라 오르는 길이 급하지 않으나 문제는 무더운 날씨로 인한 갈증이다. 마정초교에서 여기까지 자전거 라이더에게 물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주유소, 가게, 민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해 물통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 차가 기름이 없으면 가지 못하듯 자전거도 물이 없으면 나가기 힘들다.

그때까지 길가의 흙 위에 거뭇거뭇 점처럼 묻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목마름이 심해지자 그 까만 점이 점점 커지더니 자세히 보인다. 놀랍게도 그건 오디 열매. 동네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는지 농익어 떨어진 오돌토돌 까무잡잡한 오디들이 지천으로 깔렸다. 주저 없이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이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도록 오디들을 주워 먹었다.

내게 오디 열매를 알게 해준 오래 전 친구의 얼굴이 반가우면서도 그립게 떠오른다. 오디는 달기도 하지만, 신기하게 한 주먹만 먹어도 심했던 갈증이 사라져 버린다. 어릴 적 흙에 떨어진 것을 먹으면 '땅그지'라고 놀림을 받았는데 수십 년만에 다 커서 '땅그지 라이더'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 목격자는 장산의 새들과 부지런히 지나가는 개미들뿐.

오르막길을 다 올라 장산 전망대라고 적혀 있는 푯말을 따라 가보니 전망 시설 같은 것은 전혀 없는 평범한 고갯마루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전경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임진강의 큰 하중도(河中島)-초평도와 접경지역, 그 너머 북한의 산들. 이 풍경들이 비현실적으로 가까이 보인다. 괜히 또 군인들을 귀찮게 할까 봐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장산에서 내려오니 비로소 낚시터의 관광객들과 함께 주민들이 보이는 마을 '임진리'가 라이더를 반겨준다.

분단의 강에서 '통일의 강'으로 흐르길

화석정 마루에 앉아 있으면 사방이 각기 다른 풍경이 담긴 갤러리가 된다.
 화석정 마루에 앉아 있으면 사방이 각기 다른 풍경이 담긴 갤러리가 된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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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가의 적벽이 마주 보인다는 '적벽 산책로'
 임진강가의 적벽이 마주 보인다는 '적벽 산책로'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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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서 만나는 마을 이름들이 이채롭다. '임진리'를 지나면 '율곡리'를 만나게 된다. 이곳은 조선 시대의 학자 '율곡 이이'의 고향이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던 동네이며 '화석정'이라 불리는, 임진강 벼랑 위의 목 좋은 별장 또한 유명하다. 신발을 벗고 정자안 마루에 들어가 앉아봤다. 화석정 밖으로 보이는 임진강 풍경이며 560살 먹었다는 정자 옆 신령스러운 느티나무가 한 폭의 그림이다.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달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

8세 당시 율곡 이이가 지었다는 시가 정자 안에 새겨져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임진강을 이렇게 바라보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싶을 것 같다. 화석정은 이렇게 편안히 앉거나 누워서 임진강을 내려다보며 감상에 젖을 수 있는 곳이다. 북한의 함경남도 덕원군 두류산에서 시작해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서 한강과 합쳐지는 임진강,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의 경계를 흐르고 있어서인지 다른 강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임진강가에 보기 힘든 작은 어선들을 마주치니 사람처럼 반갑다.
 임진강가에 보기 힘든 작은 어선들을 마주치니 사람처럼 반갑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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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지나루에서 출발하여 임진강을 색다르게 느껴볼 수 있는 황포돛배
 두지나루에서 출발하여 임진강을 색다르게 느껴볼 수 있는 황포돛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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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길과 마을길을 교대로 달리며 두포리를 지나 파평면사무소 방면의 금파 삼거리에 이르면 임진강을 다시 한 번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는 길이 나온다. 바로 '임진강변 적벽 산책로'가 그곳. 이정표가 작기 때문에 금파 삼거리서 동네 주민에게 적벽 산책로를 물어보면 잘 알려준다. 임진강가에 병풍처럼 둘러선 적벽은 오래전 한탄강 상류에서 분출해 흘러내려 온 용암이 강물을 만나 급속하게 식으면서 만들어진 절벽으로, 붉은빛이나 자줏빛으로 보인다고 해서 '적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적벽 산책로'를 다 지날 즈음 저 앞에 지도에도 안 나오는 다리가 놓여 있다. 작은 어선들이 정박한 다리 밑 강가에서 어구를 손질하는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리비교'라는 군사용 다리란다. 요즘은 다리 건너편의 논밭을 돌보러 허가받은 주민들이 오간단다. 임진강가의 어선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게 처음이라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으려 했다. 그러자 "여기서 사진 찍으면 군인들한테 카메라 뺏긴다"며 어부 아저씨가 말린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일부러 37번 국도를 달리지 않고 장좌리 마을을 구경하며 농로길을 달렸다. 최대한 우회해 황포돛배(이용문의: 031-958-2557)가 있다는 두지리 나루터로 향했다. 두지리에서 자장리 사이의 임진강을 오가는 이 배는 생김새도 흥미롭고 임진강과 적벽을 색다르게 감상할 수 있어 좋다. 서울 불광동, 문산 전철역 등으로 갈 수 있는 적성면 버스터미널이 가까이에 있으니 두지리 나루터에서 황포돛배와 함께 해가 저무는 임진강의 풍경을 여유있게 기다려도 좋을 듯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물통을 꺼내 마른 목을 축이려니 왠 까만 알맹이들이 딸려 입속에 들어온다. 고맙다 오디들아, 힘든 가운데에도 즐거웠던 오늘 여행은 다 너희들 덕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행사연 쓰고 공정여행 가자!' 응모작입니다.



태그:#자전거여행, #임진강, #DMZ, #화석정, #황포돛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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