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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을 따라 차를 몰고 가다가 애먼 곳에 도착한 일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모두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한 인생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애먼 곳으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말>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한 장면. 극중 대통령인 이순재는 로또에 당첨되지만, "당첨이 되면 기부를 하겠다"는 말을 한 터라, 쉽사리 복권당첨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다.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한 장면. 극중 대통령인 이순재는 로또에 당첨되지만, "당첨이 되면 기부를 하겠다"는 말을 한 터라, 쉽사리 복권당첨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다.
ⓒ 소란플레이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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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 목소리를 들은 아내의 눈동자가 작은 종이에 빽빽하게 들어선 30개의 숫자를 순식간에 스캔합니다. 아내는 홈런왕 이승엽 수준의 동체시력으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도 거리의 간판을 읽어내는 능력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형광펜을 든 그녀의 오른손은 요지부동입니다.

"20."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형광펜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23, 24, 43, 44."

아내는 오른손에 든 형광펜을 놓은 후 군데군데 노란 형광펜 표시가 된 작은 종이를 저에게 넘기며 한 마디 합니다.

"안 맞아도 어떻게 이렇게 안 맞니?"
"쩝. 그러게. 그놈의 번개는 대체 누가 맞는 거야?"

그도 그럴 것이 30개의 숫자 중에 형광펜 표시가 된 것이 달랑 3개입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눈치 빠른 분은 이미 아시겠지만 로또복권 얘기입니다.

삼국지의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처럼 뚜레쥬르, 파리바게트, 그리고 동네빵집인 '봉베이커리'가 무려 새벽1시까지 빵을 팔며 대치하는 작은 사거리를 지나면 문방구가 나옵니다. 이 문방구 간판에는 크게 로또판매점이라고 적혀 있고, 연속 2번 2등이 터졌다고 마치 모범음식점 표시처럼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데요. 외부 일정을 마치고 귀가를 하다 이 문방구를 보면 종종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음. 그렇다면 독산동 주민 중 2명이 이 문방구에서 로또 2등을 맞았다는 얘긴데, 나쁘지 않은걸?'

며칠 전에 발표한 로또 497회 2등 당첨금이 약 7409만 원이라 합니다. 2등만 하더라도 삶이 팍팍한 사회과학 글쟁이에게는 평생 만져보기 힘든 목돈 아닙니까.

'아냐. 로또는 자본주의의 폐해야. 사람들에게 사행심을 조장하고 당첨된 사람들조차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잖아!'

사회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한 개인 차원에서도 항상 이성(理性)이 승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은 항상 나에게 로또를 사지 말라고 근엄하게 얘기하지만, 이 문방구 역사상 세 번째 2등 당첨자, 아니 조금 더 욕심을 내서 첫 번째 1등 당첨자가 되고 싶다는 알량한 욕망이 가끔씩 승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게다가 로또를 사가도 아내는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또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지 상상하며 최장 유통기한 일주일의 행복한 꿈을 꾸는 듯 보입니다. 솔직히 로또 다섯 장, 유통기한 일주일의 꿈 값이 5000원이라면 가끔은 질러볼 만한 것도 같습니다.

'인생역전' 로또!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 생각해보니...

독산동의 빵집 사거리. 자세히 보면 뚜레쥬르, 파리바게트, 봉베이커리가 보인다.
 독산동의 빵집 사거리. 자세히 보면 뚜레쥬르, 파리바게트, 봉베이커리가 보인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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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뭄 때 논두렁처럼 한창 통장에 돈이 말라들었을 때 산 유통기한 일주일의 꿈은 조금은 느낌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더 절실하다고나 할까요? 어떤 자기계발서 작가가 이런 얘기를 했지요. 생생하게 꿈꾸면 현실이 된다고요. 공식까지 있더군요.

"'R=VD', 생생하게(Vivid) 꿈꾸면(Dream) 현실(Realization)이 된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통 구석의 모서리에 박힌 것까지 긁어내 먹는 심정으로 5000원짜리 꿈의 부스러기까지 생생하게 탐닉했던 적이 있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생생하게 꿈꿨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소설을 한 편을 써내려 갈 정도로 꿈꿨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이죠.

'집에 있는 영창 피아노가 30년이 다 돼서 조율을 해도 금세 음이 떨어지고 피아노선도 하나 끊어져 있어. 이참에 좋은 그랜드 피아노로 하나 뽑아야겠어.'
'아내가 내색은 안 하지만 백화점 아이쇼핑에 지친 것 같아. 하긴 언제까지 쇼핑을 눈으로만 할 수는 없지. 아내의 무한한 인내심도 이제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으니 이참에 좀 질러줘야겠어.'
'만날 여행을 카드할부로 결제해서 갔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일시불로 다녀와야지. 그래 이참에 여행의 끝판왕이라는 크루즈여행도 가야겠어.'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무슨 물건을 살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평상시에도 그다지 물욕(物慾)이 없어 그런지 오래지 않아 희망 상품 목록이 더 떠오르지 않더군요. 이제 좀 다른 것을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또에 당첨되면 내 삶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를 생생하게 꿈 꿔 본 것이죠.

'내가 지금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글과 책을 쓰고 있는데 로또에 당첨돼서 목돈이 생기면 이를 발판으로 다른 일을 시작할 것인가? 흠….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겠지. 돈이 많든 적든 나는 이 일을 하는 것이 즐거우니까. 확실히 계속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글과 책을 쓰겠지.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

'나는 지금 기존에 쓴 책들의 내용을 토대로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단체, 대학생단체, 기관 등에서 경제나 국제관계, 철학, 인생관, 글쓰기 등의 내용으로 강연을 하고 있어. 내가 로또에 당첨돼서 먹고 살 걱정을 안 하게 될 정도로 목돈이 생겼다고 해서 강의를 안 하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설까?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야. 나는 사람들을 만나 내가 가진 생각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니까.'

로또를 통해 '행복지수'를 한번 측정해보시길

필자가 가끔 로또복권을 사는 곳. 2등 당첨 2명이 나왔다고 한다.
 필자가 가끔 로또복권을 사는 곳. 2등 당첨 2명이 나왔다고 한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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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로또가 당첨되면 뭔가 나의 삶이 근본부터 크게 바뀔 줄 알았는데, 생생하게 꿈을 꾸는 과정에서 내 경우 로또 당첨 전과 후의 삶이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로또라고 하면 누구나 인생역전, 대반전을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저는 주변에 약간 더 좋은 물건들이 생기는 것을 빼고는 기본적으로 삶의 틀 자체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바로 즉시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무척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의 많고 적음이 지금 내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무척 행복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비록 돈은 많지 않더라도 말이죠. 화폐에 대한 끓어오르는 욕망의 화신과도 다름없는 로또를 통해서 이런 사실을 깨닫다니. 하여간 삶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예상대로,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제가 로또로 꾼 꿈의 유통기한은 딱 일주일일 뿐이었습니다. 역시 생생하게 꿈꾼다고 복권이 당첨되지는 않더군요. 자기계발서의 한계겠죠. 하지만 로또 당첨이 안 되더라도 저의 소소한 행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왕 로또 복권을 구입할 거라면 이참에 로또를 통해 자신의 행복지수를 측정해보기를 여러분께 권합니다. 로또 당첨 후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보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삶을 로또 당첨 전인 지금의 삶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두 삶의 모습이 다르면 다를수록 행복지수는 그에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행복지수가 너무 낮게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또 당첨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바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편이 '돈벼락'에 맞아 인생을 바꾸는 것보다는 확실히 확률이 훨씬 높으니까요.


태그:#로또, #복권,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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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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