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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높을수록 골이 깊은 법이다. 현재 언론에서 가장 뜨거운 '특종의 광맥'은 민간인 사찰 증거인멸·은폐·조작 사건이다. 그럴 수밖에. 민간인 사찰 증거인멸·은폐·조작에 현직 대통령이 관여했다면 탄핵이나 하야를 불러올 수도 있는 초대형 사건이다.

 

이미 올해 들어 민간인 사찰 증거인멸·은폐·조작 사건만으로 한국기자협회가 주최하는 '이달의 기자상' 특종상이 세 건이나 나왔다. ▲ 리셋 KBS뉴스팀의 총리실 민간인 불법 사찰 관련 연속 보도와 ▲ <한겨레21>의 청와대 행정관,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인멸 지시증언, 재판기록 단독 보도 그리고 ▲ 오마이뉴스 팟캐스트 '이털남'의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인멸·은폐 사건 특종 보도가 그것이다.

 

기자상 중에서 가장 공정한 심사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알려진 '이달의 기자상' 수상은 권력 감시견(watch dog)이라는 언론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보도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결과다. 지난해 <시사저널>이 퇴임 이후 'MB 사저' 의혹을 단독 공개해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종의 광맥', 민간인 불법사찰 은폐-조작 사건

 

최근에는 종편(종합편성채널) 특혜 인·허가로 이명박 정권과 '악어와 악어새' 관계로 비유된 조·중·동·매 기자들도 불법사찰 은폐조작 사건 관련 보도를 앞다퉈 내보내고 있다. 지난달 <중앙일보>가 단독 공개한 이른바 'VIP 충성' 문건('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 추진 지휘 체계' 문건)과, 이 문건을 작성한 진경락 전 지원관실 총괄과장이 불법사찰에 대한 입막음의 대가로 청와대 측에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요구했다는 MBN의 단독 보도가 대표적 사례다.

 

정파성과 진영 논리를 떠나 조중동매 기자들도 이 '특종 광맥'의 취재에 가세했다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한 국민의 참을성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그 결과로 진경락 전 기획총괄과장이 작성한 문건과 녹음 파일 등이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씩 공개됨으로써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인멸·은폐·조작사건에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의혹에 대한 새로운 증거와 진술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이미 진경락 전 과장의 외장 하드디스크에 별도로 보관해 오던 수백 건의 사찰 자료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는 형사소송법 상 수백 건의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일부는 <오마이뉴스>의 '이털남'을 비롯한 언론의 추적보도로 밝혀진 것들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 설립 초창기인 2008년 8월 28일에 진경락 전 기획총괄과장이 작성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추진 지휘체계' 문건이 발견되었고, 최종석 전 청와대 행정관이 장진수 전 지원관실 주무관에게 "(법정에서 사실을 말하면) 민정수석실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한 진술도 드러났다.

 

또 류충렬 전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이 장 주무관에게 '관봉'이 찍힌 5천만 원을 건네면서 "민정수석실 장석명 공직기강비서관이 마련한 돈"이라 했다는 진술도 드러났다. 또 진 전 과장이 중앙징계위원회에 민정수석실 비서관들이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에게 증거인멸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낸 것으로 드러났다.

 

비서실장은 서면조사, 법무장관은 조사도 안 하고 무혐의 종결?

 

특히 주목할 부분은 진경락 전 과장이 수감중일 때 교도소 접견기록에 "민정수석실 세 사람(권재진 민정수석, 김진모 민정2비서관, 공직기강비서관 장석명)도 수갑을 채워 여기로 데려 와야 한다"고 진술한 대목이다. 이와 관련 두 비서관은 최근 검찰의 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검찰은 불법사찰의 전모를 밝히고 증거인멸 사건의 배후를 규명하기 위한 필수인물인 정정길·임태희 전 대통령실장(비서실장)에 대해서는 서면조사만으로 끝냈다. 특히 권재진 법무부장관에 대해서는 서면조사조차도 하지 않은 채 사건을 마무리 하려고 하고 있다.

 

민간인 사찰 사건을 재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박윤해)이 최근 박영준(구속)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지시를 받고 민간기업 등을 불법적으로 사찰한 혐의(직권 남용)로 이인규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을 추가 기소할 방침이라고 밝힌 것을 보면, 검찰이 박영준 선에서 '꼬리 자르기'로 수사를 마무리할 것이라는 예상이 설득력을 갖는다.

 

검찰이 9일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부지 헐값 매입 사건으로 고발된 이 대통령 등 7명을 모두 불기소 처분한 것도 전형적인 '면죄부 수사'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검찰의 논리는 배임과 부동산실명법 위반 혐의로 수사했지만 이 대통령은 내란이나 외환죄가 아니어서 재임중에는 공소권이 없고, 아들 이시형씨 등 나머지 6명의 경우엔 처벌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검찰의 무혐의 처분 논리에 대한 찬반을 떠나 국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의혹 규명의 핵심 피의자인 시형씨에 대해 단 한 차례의 서면답변서를 받는 것으로 조사를 끝냈다는 점이다. '봐주기 부실수사'라는 국민의 지탄을 들어도 마땅한 원인 제공을 검찰이 자초한 셈이다.

 

'살아있는 권력' 눈치보는 '시녀 검찰'의 한계

 

검찰은 이번에도 '살아있는 권력'의 눈치만 봤을 뿐이다. 그 눈치의 정점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권재진 법무부 장관이 버티고 있다. 내곡동 사저터 면죄부 수사는 민간인 불법사찰의 핵심 피의자로 지목된 권재진 법무장관이 악착같이 장관직을 버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새삼 확인시켜 준다.

 

거악(巨惡)에 맞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본업이라던 특수부 검사들이 법무부장관의 인사권이 무서워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는 본업을 포기한 것이다. 검찰이 권력의 임기말 의혹 사건 '땡처리'로 '밥그릇'을 포기할 요량이라면, 그런 찌질한 검찰은 차라리 경찰에게 두 의혹 사건의 수사권을 넘기라고 충고하고 싶다.

 

결국 이번 수사는 검찰이 내곡동 터 의혹을 밝힐 의지가 전혀 없음을 보여줬다. '사즉생'의 각오로 시작된 민간인 불법사찰 재수사도 사찰과 증거인멸에 관한 '몸통'을 찾지 못한 채 이번주에 수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제 이명박 대통령이 개입한 것으로 의심받은 두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은 국회 국정조사나 특검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게 됐다.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 고개 숙인 '시녀 검찰'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현실은 워터게이트 사건 40주년을 맞이해 그때 그 사건의 주역들이 11일(현지시각)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함께 만나 '어두운 역사도 역사'임을 드러내려는 미국의 현실과 대비된다.

 

워싱턴 시내의 워터게이트 호텔은 닉슨 대통령에 맞선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본부인 전국위원회가 있던 곳으로 당시 <워싱턴 포스트>의 젊은 사건기자인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백악관 직원들이 대통령을 재선시키기 위해 도청을 했다는 보도로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이명박 대통령, 닉슨처럼 안되려면 지금 털어놓아야

 

닉슨은 부인했지만 첫 보도한 날부터 2년 뒤인 74년 8월 5일 미 하원 사법위원회에선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나흘 뒤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사퇴했다. 그에겐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란 꼬리표가 붙어있다.

 

닉슨이 사임한 것은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자신을 지칭하는 'VIP 충성' 보고 문건까지 드러났는데도 민간인 불법사찰 은폐·조작 사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한 국회의원의 취중 실언으로 '종북 논란'이 불거지자마자 전광석화처럼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종북세력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과는 딴판이다.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만일 이 대통령이 민간인 불법사찰 은폐·조작 사건에 개입하고서도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또한 닉슨처럼 탄핵감이다. 이 대통령이 퇴임 후 특별검사의 수사를 받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털어놓고 가야 한다. VIP 충성 문건에서 드러난 대로 자신에게 '일심으로 충성'을 맹세한 영포 라인의 '왕차관'(박영준)과 '버럭 비서관'(이영호)에게 시킨 것인지, 아니면 두 비서관의 과잉충성인지 국민은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어쩌면 진실은 그 중간쯤에 있을지 모르겠다. 한홍구 교수는 최근 <한겨레> 연재물에서 김대중 납치가 박정희의 지시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실행한 것인지, 아니면 윤필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이 박정희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단독으로 저지른 것인지에 대해 이렇게 탁월한 결론을 내렸다.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지시문건이 없어도 우리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일이 히틀러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조폭의 세계에서도 살인의 교사는 묵시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조폭의 세계에선 살인교사 대신 "나는 저놈만 보면 소화가 안돼"

 

조폭의 세계에선 해치우고 싶은 미운 놈이 있을 때 보스가 아우들에게 "저놈 죽여라"고 꼭 집어 살인을 교사하지 않아도 "나는 저놈만 보면 소화가 안돼"라고 사인을 보내면 밑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게 오래된 관행이라고 한다.

 

박정희 주변 인사들은 김대중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박정희가 "이후락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며 짜증을 냈다면서 "각하는 그러실 분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런 논리 자체가 조폭업계의 형님동생 사이에서 흔히 보게 되는 광경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 한 교수의 진단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민간인 불법사찰 은폐·조작 사건 개입 여부도 공교롭게도 매우 흡사하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진경락 전 과장은 수감 중이던 지난해 3월 면회 온 지인들에게 "내가 최근에 화를 냈더니 청와대(민정수석실)에서 깜짝 놀라 이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며 "그랬더니 이 대통령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게이트로 만들어놓고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크게 화를 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진 전 과장은 면회 대화가 다 녹음되어 청와대에 보고될 줄 알면서도 이 대통령을 직접 거론하면서 "내가 나가면 대통령과 독대하기로 돼 있다"면서 "수석들, 비서관들 모두 손보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지원관실이 초기에 규정에 없는 업무를 했다"면서 "촛불시위 때문에 지원관실이 만들어졌다"고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결국 관련자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이런 '범죄의 재구성'이 가능해진다. "나는 촛불만 보면 소화가 안돼"라는 '보스'의 한마디가 "VIP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인사들로 구성된 비선조직"의 불법사찰을 낳았고, 그것이 꼬리를 밟히자 '아무것도 아닌 일을 게이트로 만들어놓고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크게 화를 낸 것은 아닐까?


태그:#불법사찰, #워터게이트, #박정희, #김대중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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