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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3일 기독교인인 한 남성이 조계사 경내로 진입해 '왜 연등을 다느냐'며 소리치며 행패를 부리다 종무원들과 신도들의 항의로 물러난 일이 있었다. 그 남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우정원 공원 입구로 가 '시민 여러분 왜 연등이 온통 거리를 덮어야 하냐'라고 적힌 알림판을 몸에 두르고 1인 시위를 진행하다 조계사의 요청으로 출동한 경찰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 남성은 경찰의 설득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협조를 거부했다.

이른바 '종교 근본주의'로 인한 이러한 사건들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믿고있는 종교만이 절대적 진리라 여기고 이와 다른 종교는 모두 배척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종교 근본주의가 신앙인들 사이에서 유지되는 한 이와 같은 종교갈등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 근본주의는종교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종교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종교적 문제를 넘어선 심각한 정치·사회적문제들을 낳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 지점에서 오강남 선생이 쓴 <예수는 없다>라는 책은 종교 근본주의에 물들어 있는 많은 이들에게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의 제목은 단지 무신론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든지 혹은 기독교의 교리를 무조건적으로부정하기 위한 의도에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저자는 책의 초반에서 "근본주의자의 교리는 일종의 특수 beliefs"라고 지적하며 "어느 특수한 시대적 배경과 요구에서 형성된 (이런) 특수 교리를 진리 자체라 여기고, 여건이 완전히 바뀐 오늘에도 이런특수 교리를 문자대로 붙들고 있어야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데 문제가 있다(p.29)"라고 얘기하고 있다. 또한 커피잔은 바라보는시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비유로 들며 "정말로 진리를 사랑하고 계속 추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한 때 형성된 커피 잔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당연하게여기지 않고 끊임 없이 그 커피 잔의 다른 면을 계속 검토하고 실험해야 할 것(p.59)"을 촉구하고 있다. 즉 '예수는 없다'라는 제목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각자가 근본주의적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그러한 예수'는 없기에, 현재의 믿음에 대한 끊임없는비판적 성찰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책 전체를 관통하고있는 핵심으로, 책 전반에 걸쳐 일관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더나아가 종교 근본주의는 단지 기독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모든 종교가 가질 수 있는 보편적 문제이기 때문에, 제목에서드러나는 이러한 메시지는 기독교 근본주의자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다른 종교 근본주의자들에게도 유의미한 반성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종교 근본주의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앙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기독교인을 예로 들어 우선 '성경관'이 새롭게 정립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개 기독교인들은 성경에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우상화하는 우를 범한다. 이 때문에 이러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사람은 그릇된 신앙인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저자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과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완전 별개의 문제(p.68)"라고 전제를 단 후, "성경이 주려는 더 깊은 뜻은 문자를 넘어서 있는 것(p.68)"이고 성경은 "우리에게 정보(information)를 주기위한 것이 아니라 변화(transformation)를 주기 위한 것(p.76)"이라고 주장하며 기존의 성경관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즉 이른바 종래의 사고방식인 '문자주의'에서 벗어나 성경이 전해주는 종교적 의미를 제대로 고찰함으로써 이에 따른 삶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오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역사적 구성물임을 밝히고, 이 때문에 각자가 "성경을 아무리 객관적으로읽으려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나의 구체적인 상황과 이해정도에서 보는 나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p.103)"는 것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주의'적 사고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결국 성경에 대한 고정된 절대적 해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신앙의 성장을 위해 개인과 세계의 주관적 관계맺음으로 인해서 사회적.역사적으로구성된 '성경'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반성적 태도를 거부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불변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기존의 신관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새로운 신관을 만나게 된다. 기존의 기독교 신관은 다분히 서구적 사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이분법적인 구도에 얽매여 있었다. 한 쪽에서는 신의 초월만을 강조하는 '초자연주의적 유신관'이 신의 현세(세속)적 가치를 무시한 채 버티고 있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신의 내재만을강조하는 '범신론'이 신의 초월적 가치를 무시한 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저자는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 철학과 교수이자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의 경험을 들어  새로운 신관을 얘기한다. 보그가발견한 새로운 신관은 바로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는 것으로, 이는 초월과 내재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해 이 둘을 동시에강조함으로써 기존의 두 신관이 가지고 있는 일방성을 극복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p.177)"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의 혼동을 우려해 기존의 두 신관과범재신론이 가지는 차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범신론에서는 모든 것이 신이기 때문에신은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반면, 범재신론에서는 우리 혹은 세계와 하나님을 분간한다는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유신론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간극, 즉 절대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수 없는 '존재론적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심리적 초월' 내지는 '인식론적 초월'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필자가 보기에 '범재신론'은 종교간에, 더 나아가 타자와 세계간에 소통을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보인다. 기존의 신관은 초월이나 내재만을 추구하는 일방성으로 인해 항상 둘 중 하나는 절대적으로 고정되거나또는 배제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즉 소통의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나 범재신론에서는 기존의 이분법적 구도가 해체되어 소통을 방해하던 일방성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신은 항상 내재하고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현세적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신은 우리를 심리적.인식론적으로 초월해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로하여금 현세적 가치에만 매몰되지 않고 끊임 없이 현재의 자신을 반성할 있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어느한 쪽에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모든 수용의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끊임 없이 "보다 의미 있는 신관을 찾아나서는 구도자적 자세(p.167)"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문자주의에서벗어나 자신의 신앙이 발전함으로 인해 제대로 된 새로운 신관을 만나게 되고, 이 때문에 비로소 지속적인'소통'의 계기가 마련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관은 근본주의적 관점에서 해석된 '그러한 예수'를 없애고 현 시대적 가치에 걸맞는 '새로운 예수'를 만들어 내게 된다. 즉 새로운 신관을 통해 예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새로운 예수'에 대한 각자의 믿음 역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관해 저자는 앞에서 전개했던 논의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시대의 구체적인 역사 맥락에서 우리의 삶과 정황에 의미 있는 방법으로 예수를 다시 이해하고 해석할 수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실존적 삶과 직결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p.222)"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 시대에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저자는 예수를 바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길을 함께 가는 것, 즉'예수님의 길벗'이 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를 죽이고 새로운나로 부활하는 엄청난 변화(transformation)를 체험하는 것(p.244)"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나'를 죽인다는 것은 'commit suicide', 즉 자신의 물리적육체를 죽이는 자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 같은 것으로 '나'라고 하는것은 연기적 관계 속에서 설정된 관념일 뿐, 이것이 실체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을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나'를 죽인다는 것은 '나'라는 것의실체 없음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책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성경이나 예수에 대한 믿음에는 자아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어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그 믿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깨닫고 이를 지속적으로 수정.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는 없다>에서 저자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벗어나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즉예수님을 바로 믿기 위해 실천해야 할 단계적 과정들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이러한 각 단계는 공통적으로 우리의 '의식 변화'의 필연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각각의 단계는 분명 위계적 순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는 의식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저자 역시 "종교가 참으로 종교적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내적 의식의 개혁을 강조하는 '의식개변 중심주의(metanoiocentrism)'가 병행되지 않으면 안된다(p.288)"고 말하며 의식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의식변화'란 한마디로 '자아에 대한 끊임 없는 성찰'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믿음에대해 끊임 없이 반성함으로써 계속해서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그러한'의식변화'를 통해 성숙해진 믿음은 우리의 실존적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얘기한다. 즉 나를 죽임으로써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p.247)"지기에 남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 되고, 이는곧 'com-passion,자비'의 마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비심은 다원주의를 특징으로하는 현대 사회에 있어 각 종교간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것처럼 종교간의 갈등이 극복됨으로써 "각 종교는자기대로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인류의 영적 건강에 기여(p.290)"하고 또한 "모든 종교가 상대방 종교와의 대화에서 각자 변증법적 성장을 이루어(p.290)"가게 되는 것이다. 앞서 필자가 언급했던 종교적 문제 역시 결국 이러한'의식변화'의 노력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예수는 없다>가 종교인들에게 전하고있는 메시지의 실현은 전달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달됨과 동시에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필자의 글을 읽고 자신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어떠한 종교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는 없다>에서 나타나는 메시지는자신에게는 무의미할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으로 여겨진다. 필자가 보기에 '종교'라는 것이 단지 정형화된 교리와 그에 따른 일정한 체계를 갖춘 집단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가지는 일상적인 생각이나 믿음에 대해 그것을 유일무오(有一無誤)한 것, 즉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절대적으로 틀릴 가능성이없는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그러한 '판단' 역시 또 하나의 '종교'일 수 있을것이다. 이러한 독단적 세계관은 타자와 세계를 대상화하여 이를 지배하거나 배제하려 들게 만든다. 이는 결국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 일컬어지고 있는 '소통의 부재'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현재 자신의 입장이 자아의 주관적 판단의 개입과 더불어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파악하지 못한채, 그것을 영원 불변한 진리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는없다>는 흡사 '갇혀 있는 자아의 독단을 깨부수는 도끼'와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예수는 없다> 오강남 씀, 현암사 펴냄, 2001년 5월, 336쪽, 1만2000원



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현암사(2017)


태그:#종교 근본주의, #예수는 없다, #종교 갈등, #다원성, #현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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