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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을 따라 차를 몰고 가다가 애먼 곳에 도착한 일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모두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한 인생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애먼 곳으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말>

 

2010년 7월부터 새로 스승님 한 분을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스승님의 몸무게는 원주율의 소수 둘째 자리까지 정확하게 떨어지는 3.14kg이었죠. 함께 스승님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제 아내 이유리씨는 저보다 스승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훨씬 강해서 스승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스승님의 예상행동패턴에 대한 지식을 익히느라 수많은 책을 섭렵했습니다. 스승님을 잘 모시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죠.

 

하지만 곧 세상에 오신 스승님은 이런 책 따위로 자신을 파악하려 했다고 성을 내는 것인지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한 장 한 장 찢으셨고, 그제야 만족스러우시다는 듯 까르르 웃습니다.

 

어쨌든 나름 가방끈 짧지 않아서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원 다닐 적까지 다양한 스승님을 모셔봤지만 이렇게 감정 표현이 직설적인 스승님은 처음입니다. 워낙 소중한 스승님이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우리 두 문하생이 식사대접을 하는데,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씹던 것을 제자들 눈앞에서 그대로 뱉어버리십니다. 체면이고 체통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참 씹던 햄을 뱉으셨는데 아까워서 제가 주워서 먹기도 했지요. 생각보다 맛있더군요.

 

그리고 우리 스승님의 중요한 신체적 특징은 지금까지 모셨던 스승님 중에 가장 장(腸)이 짧다는 것입니다. 장이 워낙에 짧으셔서 변을 매우 자주 볼 뿐만 아니라 짧은 길이 때문에 미처 화장실에 갈 여유가 없으신지 그냥 옷에다가 일을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저귀를 받쳐드리고 일을 보시면 새 것으로 교체해드립니다.

 

그런데 식사 때는 체면이고 체통이고 없는 분이 용변 보는 일은 체면이나 체통을 너무 생각하는지 일을 보셔도 전혀 문하생들에게 얘기를 안 하십니다. 살짝이라도 언질을 주시면 저희가 바로 조치를 해드릴 텐데 말입니다.

 

한때 저희가 미숙할 때는 용변을 보신 줄도 모르고 한참을 기저귀를 갈지 않아 스승님의 소중한 엉덩이를 불고구마로 만드는 큰 실례를 범하기도 했지요. 무려 2시간을 쉬지 않고 우시더군요. 그래서 그 일 이후로 저희는 스승님과 함께 외출했을 때조차 수시로 스승님의 엉덩이에 코를 대고 'dung(똥)'의 존재 여부를 'detecting(조사)'합니다.

 

이렇게 감정표현이 '직설적인' 스승님은 처음입니다

 

이쯤 되면 어떤 분들은 스승이 아니라 진상이라고 생각할 법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스승님에게서 다른 누구로부터도 배우지 못한 너무나도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제 얘기를 들어보시면 왜 제가 이분을 스승님이라 부르는지 조금은 납득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큰 가르침 몇 가지를 '썰(說)'을 풀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 스승님께서는 저의 잃어버린 과거 기억을 찾아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4세 이전의 경험은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두뇌가 아직 언어를 제대로 습득하기 이전이라 우리가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형태의 기억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그냥 두뇌가 제대로 성장하지 않아 그런 것이죠.

 

저 역시 가장 오래 전의 기억은 4살 때인 것 같습니다. 물가에서 놀다가 뒤로 넘어져 물속으로 빠졌는데 그 상황에서 눈을 멀뚱하게 뜨고 물에 굴절된 흐린 시야로 들어오는 빛을 보며 '이제 나는 죽는 건가?'라는 당돌한 생각을 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근처에 계신 아버지가 일으켜주셔서 '살았다'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보아도 그 이전의 기억은 떠오르지가 않는 겁니다.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기억을 떠올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도 허사입니다.

 

그런데 스승님 덕분에 저의 4세 이전 어린 시절 모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가끔 제 어머님이 우리 스승님을 맡아서 봐주실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저에게 '승수야, 네 어릴 때랑 완전 똑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남성이고 스승님은 여성인데 그것만 빼면 완전 같다는 얘기지요. 심지어는 다섯 개의 발가락이 비스듬하지 않고 일자로 생긴 것조차 같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스승님만 한 때에 한참 씹던 햄을 아무데나 뱉었다는 얘기가 되며, 장이 무척 짧은 덕에 똥을 싸고도 모른 척하고 체통을 지킨 셈인데요. 지금 우리 스승님의 행동패턴을 보았을 때 저 자신이 그런 행동을 꽤 오랜 기간 동안 유지했다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승님을 통해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알아버린 순간 마음이 무척 짠해졌습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나의 어린 시절, 그 누군가의 정성스런 보살핌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니까요. 단지 글로 '부모님의 보살핌'이라는 단어를 접하는 것만으로는 0.001%도 알 수 없는 그런 사실 말입니다. 속된 말로 키스를 글로 배울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만약에 장이 짧았던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사춘기 시절에 부모님께 철없는 악다구니를 쓰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생각을 해봤을 것이고, 대학 시절에 방문을 주먹으로 훼손하고 가출을 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심호흡을 했을 텐데요. 스승님을 모시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이런 사실을 배우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효자는 못 되더라도 예전에 비해 불효를 하는 횟수는 조금씩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린 스승님을 통해 배운 삶의 두 가지 '큰 가르침'

 

둘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당장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고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갈라치기 하는 습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을 모시면서부터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든지 단순히 나의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가르기 훨씬 이전부터 누군가의 딸 혹은 아들로서 만만치 않은 시간을 지내왔다는 그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이제야 보기 시작한 겁니다.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존재가 이렇게 큰 무게감으로 다가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자 저 자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실만으로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됐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지고 인내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에게 문제가 없는지를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살아온 시간과 인생 그 자체를 존중하게 됐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모시고 있는 스승님이 없었다면 절대 깨달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2006년 지방선거에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출마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30대 초반의 나이에다가 얼굴까지 악질 동안(童顔)이었던 저는 홍보를 위해 지역을 다니며 명함을 나눠주다가 한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께 이런 핀잔을 들었습니다.

 

"결혼은 했어? 아이는 키워봤남?"

 

당시 사회진보에 대한 대의에 가득 차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나섰던 저는, 아주머니의 그런 핀잔이 무척 불편했고 별걸 다 꼬투리 잡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아주머니의 핀잔은 절대 가벼이 들을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 이런 큰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 물론 이 글을 읽지 못하시겠지만 무척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루에 똥을 몰아서 한 번에 싸주시면 안 될까요?


태그:#임승수, #인생관, #철학,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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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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