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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30일 조우석씨는 한 언론 기고문을 통해 "아직도 함석헌의 패배주의를 신봉하다니..."라며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조씨는 함석헌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 를 '과대평가' 된 책으로 보며 그 이유로는 "책 전체에 깔려있는 패배주의 심리" 때문이라고 적었다.

조씨는 함석헌의 "패배주의 인식은 이 책이 본래는 일제강점기에 저술됐던 한계 탓일까? 아니면 징징대며 우는 걸 고고(孤高)한 태도로 착각했던 함석헌과 '작은 지식인들'의 멘탈리티 탓일까?"라고 의문을 던진다.

함석헌, 한국인의 패배주의·맹목적 숙명론의 고정관념 타파하고자 힘써

조씨가 언급한 함석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원래 일제강점기인 1933년 12월 31일부터 1934년 1월 4일까지 함석헌이 당시 친구 김교신이 만든 잡지 <성서조선> 독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이다. 그 후 이 강연내용은 독자들의 요청으로 1934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성서조선>에 연재 된다.

함석헌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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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이 <조선역사>(또는 <한국역사>)를 통해 한국인이 역사를 통해서 고난을 받은 것이 단순히 한국이 군사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성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이었던 것처럼, 한국이 세계에서의 역할은 "수난의 여왕"이었다고 정의했다. 이어서 세계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우리 사명은 여기 있다. 이 불의의 짐을 원망도 않고 회피도 않고 용감하게 진실하게 지는 데 있다.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세계를 건진다. 불의의 결과는 그것을 지는 자 없이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을 위하여, 또 하나님을 위하여 이것을 져야한다 ---세계의 불의의 결과는 우리가 져야한다, 우리가 그것을 져서 정화하기를 실패할 때 아무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불의의 짐을 지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영국이나 미국은 그 짐을 질 수 없다. 그들은 너무 잘났고 너무 높은 위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역사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해석을 통해,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에 억눌려 있는 한국인뿐만 이니라, 전 세계 약자와 씨알에게 그들의 사명과 비전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었다. 그럼으로써 기존 역사관에서 무시되고 격하되었던 '패자'나 씨알의 수난의 대하여 그 정체성과 역할에 역사적 의미 부여를 해주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어둡다는 표현처럼, 한국역사의 굴욕적인 면에도, 함석헌은 역설의 논리로서 한국사의 어두운 면을 통해 그 밝은 면을 부각시킨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은 암울한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이 그 비참한 식민지 상황 가운데에서도, 세계사에 귀중하고 가치 있는 공헌을 해 왔다는 희망과 사명의식을 불러 넣었다.

이런 새로운 역사관을 통해, 함석헌은 한국인들의 패배주의나 맹목적 숙명론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자 힘썼다. 식민지화된 민족이 가혹한 외적인 조건에도, 그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보존하는 일은, 민족의 사활, 그리고 미래의 주체적 정신과 직결 되어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위의 조씨 주장대로 함석헌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그 글을 통해 '패배주의'를 주입시켰다면 왜 일제강점기 함석헌이 수감과 고문을 당하고 <성서조선>에 기고한 그의 글이 일제에 의해 검열 받고 발간 금지되는 고초를 겪게 되겠는가?

'패배주의'보다는 "의분강개의 주먹이 쥐어 진다"

김교신
 김교신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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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함석헌의 <한국역사>를 읽은 <성서조선> 주간 김교신의 반응을 보자.

"<성서조선> 본 호 함석헌선생의 조선역사가 8면에 달하므로 지시대로 2회에 분재할까 하였으나 끊으면 피가 나올 듯하여 3분의 1의 지면을 그대로 드리었고..." (1934년 10월 22일)

김교신은 함석헌의 "글을 끊으면 피가 나올 듯하여" 분량이 넘침에도 그대로 실었다고 한다.

1935년 3월 31일 <성서조선> 독자가 전남에서 김교신에게 보낸 글에는 "함석헌 선생님의 조선역사는 '마침내 어찌 될 것 인고' 하고 호를 기다리던 저에게 <성서조선> 3월호에서 요동 없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아아, 변할 수 없는 섭리를 보여 준 예언입니다." 당시 함석헌의 역사책을 읽은 전남의 한 독자는 조씨가 이야기 한 패배주의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요동 없는 희망"을 느꼈다는 편지를 보낸다.

또 1935년 4월 5일 김교신은 다른 독자가 보낸 편지를 이렇게 소개한다. "천만의외에 소위 위험사상을 가졌다는 청년으로부터. "<성서조선>지를 반갑게 받아 '역사'공부를 합니다. 한국역사 중 「수난의 500년」을 읽고 의인의 피 흔적을 슬퍼하는 동시에 의분강개의 주먹이 쥐어지는 것은 어디다 내 던질는지요."  이 독자 역시 함석헌의 <한국역사>를 읽고 '패배주의'보다는 "의분강개의 주먹이 쥐어 진다"고 그 결의를 드러낸다.

1935년 5월 30일 김교신은 함석헌의 <한국역사>가 실릴 <성서조선>을 인쇄소에 가서 교정하는데 그 당시를 이렇게 묘사한다.

"함형의 조선역사 수난의 500년 (제4회 임진란부분) 을 교정하면서 자주 눈물을 씻으니, 옆자리에서 교정하는 이들이 나를 기이히 보는 모양이나 할 수 없다....이 망한 백성의 병원(病原)을 깊이 타진하여 그 뇌척수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투사하려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의 초판)가있게 된 것이요, 이 강한 빛에 비추어 알고 보니 눈물이다. 출판 허가되는 시각으로 인쇄하기를 부탁하고서 발송하는 날에 지우의 기쁨이 클 것을 상상하면서 활인동으로 향하다."

김교신이 <한국역사>를 교정하면서 자주 눈물을 씻는 것도 절망이나 '패배주의'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인의 정신적 병의 근원을 투사하는 함석헌의 글이 주는 빛이 너무 강해서 나는 눈물이고 그래서 큰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희망, 기쁨, 비분강개, 힘, 용기를 주는 함석헌의 <한국역사>에 대하여 일제는 마침내 검열과 탄압의 칼을 들이 대기 시작한다.

1935년 6월 6일 김교신은 "용산경찰서로부터 <성서조선>지에 연재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필자인 함석헌 씨의 주소를 가리키라고 전화가 있었다"고 일기에 적는다.

상서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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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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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후인 1935년 6월 17일 김교신은 <성서조선> 77호를 다시 편집하여 일제당국에 제출하는데 그 이유를 "<조선역사>는 제목도 둘 수 없이 된 까닭이다"라고 착찹 하게 그 심정을 적는다. 조우석씨 주장 데로라면 한국인의 패배주의를 고무시키는 함석헌의 <한국역사>는 일제가 '권장도서'로 정해서 널리 읽히도록 해야 마땅하지 "제목도 둘 수 없게" 원천봉쇄 하지는 않지 않을까? 최소한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결국 1935년 6월 19일 함석헌은 김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글월 지금 받자왔습니다. 평강을 빕니다. <조선역사>가 불게재 되는 것 무엇이 불온 하다는지요? 혹 들으셨으면 가급 자세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금후 그처럼 어려울 형편이면 <조선역사> 내기를 중지함이 좋겠습니다. 그것을 희생하고라도 <성서조선>지는 서야하겠습니다. 이번 호분도 오늘 발송은 하였는데 보시고 조금이라도 염려되는 점이 있으면 아예 그만두십시오. 금번도 횟수가 너무 길어지고 하여 가급 간단히 쓰려던 것이 임경업에 잡히어 턱없이 길어져서 '500년'은 마칠 예정이던 것이 그리되었습니다. 문구가 문제라면 얼마든지 고치겠으나, 사상이 문제라면 부득이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이기만 하면 하느님은 타 방법으로라도 하게 하시겠지요."

당시 <성서조선> 독자가 불과 몇 백 명에 불과 했는데도 일제의 반응이 이렇게 민감한 것을 봐도 함석헌의 <한국역사>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37년 7월 5일 한 독자가 김교신에게 보내 편지다.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역사다운 역사를 읽지 못한 소생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사실같이 생각되나이다. 희망 잃은 조선청년에게도 오히려 내일의 조선을 꿈꿀 수 있음을 느꼈나이다."

한 시대 지성인의 역할이란...

함석헌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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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 지성인의 역할은 민중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것이다. 내가 보는 함석헌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와 그 후 권위주의정권 시절 말과 글을 통해 낙담하고 절망에 빠진 민중에게 패배주의가 아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지난해 한국조폐공사에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등을 대표하는 인물 100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의 인물 시리즈 메달'로 "비폭력 인권운동으로 민주화 실현에 앞장선 사상가 함석헌"을 선정했다. 평생 돈을 모르고 지내던 함석헌인데 조폐공사에서 한국의 인물로 선정된 것도 참 아이러니다. 생이 아니러니 아닌가?

물량주의와 기회주의 가치관이 팽배하는 이 시대 속에서도, 얼마 전에는 "건국 후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운동가"로 함석헌(77%)이 1위로 선정되었다. 또 대학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20종에도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선정되었다.

더욱이 2010년에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아시아출판인들에 의해 아시아 명저 100권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심지어 시의 세계와는 멀어 보이는 우리 이명박 대통령조차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애송시라고 답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감히 단언 할 수 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함석헌의 <한국역사>와 그가 추구했던 가치는 씨알의 가슴을 울리고 한국역사와 더불어, 영원한 '씨알의 소리'로 남을 것이다.

1938년 10월 7일 김교신은 한 전문학교 학생으로부터 "학우 간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차례로 돌려가면서 읽을뿐더러 필사(筆寫)하는 중"이라는 편지를 받는다. 

어두운 시절임에도 어떤 이들은 함석헌의 <한국역사>를 차례로 돌려가면서 밤을 새워서 읽고 필사까지 한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서 어두운 현실을 이겨낼 강렬한 힘과 무한한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같은 책을 '과대평가'나 '패배주의'로 묘사한다. 참으로 인간은 다양하다.

빛이 세상을 비춘다, 그러나 나는 그 찬란한 빛을 눈을 꽉 감고 있는 사람에게는 보여 줄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태그:#함석헌, #김성수, #조우석, #한국역사, #김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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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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