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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폴란드와 한국 팀이 경기를 한다. 운명의 결전을 남겨둔 밤에 양국 선수들은 과연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폴란드로 유학 간 사촌형이랑 결혼해서 한국에 살고 있는 폴란드 형수님은 과연 어느 팀을 응원할까 궁금하다. 내일 김대중대통령이랑 폴란드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고 축구관람을 할 때 사촌형이 통역을 한다는데 어느 팀이 이겨도 자기 입장은 곤란할거라고 걱정을 한다.

 

대학교 신입생 되던 해에 88올림픽이 열렸다. 그래서 그땐 팔팔(한) 꿈나무 학번으로 불렸었다. 재수를 하고픈 맘이 없지 않았지만, 올림픽 때 컴컴한 독서실에서 지내긴 싫었다. 하지만, 막상 올림픽 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땐 너무 어렸었다. 자원 봉사를 지원하려면 고3때 신청을 했어야 했고, 민박을 하는 것도 연년생 동생이 있어서 불가능했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교회 대학부에서 세계 각 나라 사람들이 모이니까, 이 보다 더 좋은 선교의 기회가 없다고 예배 끝나고 한 명도 예외 없이 잠실 운동장 앞에 가서 영어로 된 전도지를 나눠주는 일에 얼떨결에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는 아니었는지 몰라도 돌이켜보면 생각하기도 끔찍하고 부끄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아무 성과도, 호응도, 보람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할 때는 자발적인 맘으로 기꺼이 하는 일이 아닐 바엔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길 안내를 해주는 것이 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경기를 즐기려고 먼 곳에서 일부러 온 손님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88올림픽 때 경기를 직접 가서 보지도 못했다. 비인기 종목을 즐길 만큼 운동을 알지도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엔 지금처럼 운동장에 찾아가서 맘껏 응원을 하고, 다른 나라의 문화나 운동 경기의 묘미를 즐기라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국민은 이제 올림픽을 개최하는 선진 국민이다. 그런 선진국민의 질서의식을 보여주자. 손님들 앞에서, 또 전 세계로 뉴스가 나갈 테니 절대로 데모하지 마라!" "정부, 여당과 대통령이 올림픽을 유치하며 나라를 잘 이끌고 있다." 뭐 이런 식으로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면이 더 컸지, 실제로 경기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는 면은 사실 빈약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군부독재정권은 물러났고 나라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모이면 데모할까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곳곳 마다 TV를 놓아주고 모여서 맘껏 소리치고 즐기라고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게 바로 독재 정권과 민주 정권의 차이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이번엔 꿈나무 학번 신입생이었던 그때완 다르다. 몇 십 만 원짜리 표를 내 돈으로 살수 있는 직업인이 된 것뿐만 아니라, 굳이 민박을 신청하지 않고도 집에 외국 친구들을 초대할 만큼 국제적인 지경에 이를 줄을 그 신입생 땐 결코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었으니 이래저래 감사해야 할일 뿐이다.

 

호주에서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월드컵을 보겠다고 3년째 한국 연장근무를 신청한 인도 친구는 티켓 값으로 $1,000 정도를 따로 마련해 두었으니 값도, 팀도 따지지 말고 구할 수 있는 만큼 표를 구해달라고 했다. 해외영업으로 만난 모리셔스란 나라에서 올 친구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싱가포르를 거쳐 이틀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내일 도착한다. 원래 삼성동 근처 호텔에 묶기로 하고 내게 예약을 부탁했지만, 방값이 8만원에서 25만원으로 올랐다는 얘기를 전하고 불편하더라도 우리 집에서 묶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더니 너무 좋아라 한다.

 

내가 중국에 출장 갔을 때 혼자서 직장 생활하는 여동생에게 자기 집을 내주고 일주일간 친구 집을 전전하게 했던, 중국 친구 호우와 그 회사 사장인 호징 등 중국 바이어 3명도 우리 집에서 묶기로 했다.

 

예상외로 손님이 늘어나서 부모님은 그 기간 동안 여행을 가시기로 했다. 화장실이 따로 있는 안방에서 여사장이 자고, 남자 직원 둘은 한방에, 아프리카 친구는 모슬렘, 인도 친구는 힌두교라서 각각 방을 원하는 바람에 나는 마루에서 지내기로 했다.

 

아프리카 모리셔스 친구를 위해선 대전에서 벌어지는 스페인과 남아공 경기를 구입해 놓았고, 서울에서 벌어지는 중국과 터키 경기는 인터넷 경매로 간신히 구하는데 성공했다. 인도 친구는 수원에서 벌어지는 미국과 포르투갈 경기에 가서 한국팀 상대들의 전력 탐색을 해오겠다며 혼자 가서는 양팀 선수들의 특징을 일일이 적어왔다.

 

그래도 가장 감격해 하는 사람은 중국 친구이다. 중국출장 와서 피곤한 내게 축구화를 사주며, 공을 차자고 했던 축구광이기 때문이다. 잔디구장에서 공을 첨 차본다는 내게 이런 나라가 어떻게 그렇게 축구를 잘할 수 있나 의아해 하면서도, 자기네 중국 팀이 월드컵 본선에 나갈 수 있는 기회는 한국이 빠진 2002월드컵이 절호의 기회라고 했다. 생긴 것도 비슷하니 홍명보, 유상철, 안정환 같은 키 플레이어를 중국선수로 변장시켜서라도 예선을 통과하면 좋겠다며 얘기를 했었다. 산 너머 산이라고 설령 예선을 통과한들 일본이 아니라 친구가 있는 한국에서 해야만 구경 올 수 있다며 애타게 바랬었는데, 중국은 그 누구도 장담 못했던 본선 진출을 역사상 처음으로 멋지게 이루어냈고,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으니 호우는 인천공항에서 만날 때부터 며칠째 잘 때 빼고는 늘 싱글싱글 웃기만 한다.

 

부모님 세대는 우리들에게 일제 시대와 6.25전쟁으로 비참했던 조국을 말씀하셨었다. 하지만, 내 자식에게는 올림픽, 월드컵을 개최했던 영광된 순간을 말해줄 것이다. 중국사람에 대해선 인해전술로 꽹가리 치고 내려와서 1.4 후퇴로 고향을 떠나게 했던 중공군 이야기는, 중국 친구와 함께 꽹가리 치고 응원하던 추억을 말해줄 것이다.

 

중국과 맞붙을 터기 애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에 참여해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터키 군인수가 3천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터키 응원이 여느 팀보다 뜨겁다고 한다. 한국 대기업에서 터키 참전 용사를 초청해서 경기를 구경 시켜드렸는데, 인터뷰를 하는 걸 보니까 자기네 팀 경기는 보지도 않고, 목이 메면서 그저 한국이 자랑스럽다고만 말하고 있었다.

회사에선 빨강색 티셔츠를 나눠 주며 출근할 때 입고 오라고 한다. 하지만, 그걸 입는다고

질 경기를 이기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언제는 국민들의 성원이 부족해서 이기지 못했던가? 몇 십 년 만에 월드컵에 나간 폴란드는 지고 싶겠는가? 그게 스포츠다.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지만 만약에 우리 팀이 진다면, 졌다는 그 자체보다도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노력해왔던 그들을 사정없이 비난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더 비참한 기분이 드는 일이 반복될까 그게 더 두렵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내일 꼭 이겨주길 바란다. 강팀과의 대결을 두려워 않던 히딩크 감독의 패기를 믿는다. (이상은 2002년 6월, 폴란드와의 경기 전날 밤에 쓴 글)

 

폴란드 대통령 통역을 맡았던 친척형은 아니라 다를까 자국팀의 완패에 실망한 폴란드 대통령이 경기 후 예정되었던 정상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겠다는 난감한 순간을 전하는 것도 난감했지만, 벅찬 승리의 감동을 감추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당시 부모님은 1주일간 여행을 가셨지만 한국팀이 승승장구 하는 바람에 부모님은 결혼한 동생네서 2주를 지내셔야 했다. 부모님을 내쫓다시피 하고 3주 동안 마루에서 자며 아프리카, 인도, 중국 친구들과 지냈지만 불편했던 기억이 없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꿈 같은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더해진다.

 

브라질이 한국에서의 예전전을 모두 승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날 호텔에서 거한 파티를 열때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여자 친구들을 데리고 질펀하게 노는 현장이라 보디 가드들이 사진을 촬영을 막았었다. 하지만, 이렇듯 호나우딩요는 얌전히 포즈를 취해주었다. 인도 친구녀석이 화장실에서 볼일보는 호나우딩요 소변기에 카메라를 들이대고서는 "여기서 찍힐래 아니면, 나가서 곱게 찍어줄래?" 라고 협박을 한 결과였다.

 

인도친구가 힌두교라서 소고기를 못 먹는다, 아프리카 친구가 모슬렘이라서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고 다투는 걸 보고 중국 여사장이 한 마디로 상황을 종식시키기도 했다. "그럼 잘 됐네. 개고기 먹으면 되잖아!"

 

요즘 이 친구들과 이때의 추억을 회상하는 메일을 주고 받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살아 생전 다시 한번 한국에서 월드컵을 볼 날이 올까? 설령 수십 년 후 개최를 한다 해도 이미 석양의 나이가 되어 있을 내 나이를 상상하자면 그리 달갑지 않다. 단 한번이라도 월드컵을 내가 사는 나라에서 보았던 추억은 해를 거듭할수록 소중해져만 간다.


태그:#2002월드컵, #터키, #인도, #중국, #모리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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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선수협의회 제1회 명예기자 가나안농군학교 전임강사 <저서>면접잔혹사(2012), 아프니까 격투기다(2012),사이버공간에서만난아버지(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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