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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9일 오후 8시 18분]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부정선거의혹 사건이 당의 이중권력상태와 검찰의 압수수색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정당 안에서 부정선거가 있었고 중앙위원회가 폭력으로 얼룩지는 등 일련의 상황은 한국 진보운동 역사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기록될 듯하다. 이미 이번 사태는 단지 통합진보당 내부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진보운동 전체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한국 사회 전반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치고 있다.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당권파니 경기동부니 주사파니 혹은 종북이니 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편이다. 20여 년 전 학생운동을 할 때는 '민중민주(PD)' 계열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민족해방(NL)' 계열과 충돌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때 같이 일했던 분들 중 일부는 지금도 통합진보당 등에서 일하고 있다.

 

이런 개인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거부정과 폭력사태에 대해 당권파가 기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고, 관련된 비례 대표들이 일괄 사퇴해야 한다는 세간의 목소리에 나도 공감하는 바이다. 행여나 그들이 국회에서 남한보다 북한에 더 이익이 되는 발언을 하고 정책을 추진한다면 나는 20여 년 전처럼 대단히 비타협적으로 그들을 비판할 것이다.

 

그런데 한동안 사태를 관망하는 듯하던 보수언론과 새누리당 등에서 언제부터인가 '종북 의원', '주사파 의원' 운운하면서 무차별적인 색깔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어느 TV 토론에서는 통합진보당의 이상규 당선자가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받기도 했다. 불과 며칠 새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누군가의 사상을 검증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국회의원의 진퇴를 논하기에 이르렀다. 평소 진보나 자유주의를 자처하던 사람들도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이 대열에 은근히 동참한 모습도 놀랍기 그지없다.

 

'북한 3대 세습' 질문으로 사상검증? 어이없다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두바이의 왕조세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때 한국에서 두바이 열풍이 한창일 때 한국 언론은 당시 두바이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셰이크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 현 국왕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부동산개발과 토건사업으로 사막을 뒤바꾼 알 막툼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비교되며 (그리고 대선에 나설 이명박 전 시장의 이미지와 매칭되며) 새로운 지도자상으로 추앙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두바이의 왕조세습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두바이를 방문할 때 어느 언론에서도 MB에게 두바이의 왕조세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았다. (알 막툼 현 두바이 국왕은 셰이크 라시드의 네 아들 중 셋째로서 2006년 그의 형이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두바이뿐만 아니라 사우디 아라비아 등 중동의 여러 왕조국가의 권력세습을 문제시하는 경우를 난 아직 본 적이 없다.

 

멀리 중동까지 갈 것도 없이, 이웃나라 일본의 천황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사상검증'하는 경우도 없다. 천황제의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고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36년 동안 우리를 핍박했던 역사를 생각하면 대단히 놀라운 현실이다.

 

다소 상식에 어긋나 보이는 나의 질문이 생뚱맞게 느껴졌다면,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입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두바이나 사우디 아라비아, 혹은 일본의 예와 비교해 보면, 이 문제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습' 때문이 아니라 '북한'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현존 국가들의 권력체제에 대해 보편적인 잣대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면 여타의 이슬람 왕조국가나 독재국가들, 심지어 중국과 일본에게도 그에 걸맞은 (북한만큼은 아니더라도) 비판과 평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이든 일본이든 이슬람 왕조든 그들 나라의 권력체제는 대부분 그 나라의 내부사정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는 우리가 북한을 대하는 경우와 사뭇 다르다.

 

그러니까 "북한은 세습왕조이기 때문에 나쁘다"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봤을 때 올바른 추론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북한은 원래 나쁘다"라는 본질환원론이나 "북한은 북한이니까 나쁘다"라는 동어반복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해 온 것이 사실이다. 남한 입장에서는 북한이 뭘 해도 "북한은 나쁜 나라"라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하자면, 북한이 3대 세습을 2010년 9월말 공식화한 직후에도 청와대는 공식 논평조차 내지도 않았다. 관계자가 비공식적으로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말만 했을 뿐이고, MB가 10월13일 청와대로 재향군인회를 초청한 자리에서 북한을 겨냥해 "아직도 구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을 뿐이다. 그 이틀 전에는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3대 세습 과정이 어떻든 간에, 북한이 진정한 핵 문제, 남북 평화 문제, 또 북한 주민의 인권과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는 놀라운 발언을 했었다. (관련기사: MB "북, 3대 세습 어떻든 간에 핵과 인권에 관심을" 그런 대통령이 국내 종북세력이 더 큰 문제라고 한 것은 정말 코미디이다.)

 

지금 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명박 대통령의 이런 발언도 '종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온갖 보수 논객들이 다짜고짜 아무나 붙잡고서 '북한의 3대 세습'으로 공개적인 사상검증을 하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좋아하는 사상검증을 왜 청와대와 대통령부터 하지 않는 것일까?

 

중국 인권문제, 일본 천황제... 같은 문제에 적용되는 '다른 기준'

 

북한의 인권문제도 마찬가지다. 보수 세력은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계속 제기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지난 2010년 중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가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 그를 석방하라고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에게 강력히 항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조선일보>는 2010년 10월 11일자 사설에서 "중국 정부는 공산당 일당독재를 비판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극도로 억압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MB 치하의 한국도 그다지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중국이 민주화와 인권 문제를 비켜갈 수 있는 시기도 끝나가고 있다. 중국식 답이든, 서구식 답이든 대답을 내놓아야 할 때가 닥치고 있다"고만 했을 뿐, 명시적으로 류샤오보를 석방하라는 말조차 꺼내지도 못했다. 청와대는 어땠을까? 상상은 여러분의 몫이다. 그들이 평소에 그렇게 주장하던 보편적 인권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보수 세력은 종북주의자들이 국회에 들어가서 국가기밀을 북한에 넘기거나 북한에 유리한 법과 제도를 만들려고 할 것이라며 이들의 국회진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진보논객인 진중권은 TV 토론에서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에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그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럼 왜 하필 북한 세습 문제에 대해서만 입장을 밝혀야 할까? 일본천황제에 대한 입장은 안 물어봐도 되는 걸까?

 

마침 이번에 국회에 진출한 새누리당의 하태경 당선자(해운대 기장을)는 "독도는 공인된 분쟁지역"이라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그는 5월11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본래 취지가 잘못 전달됐다고 해명했다). 하태경의 사상은 검증해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대통령이 되겠다는 박근혜 전 대표에게 일본 천황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안 물어봐도 되는 걸까? 그의 아버지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출신이었고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다는데, 박근혜의 사상은 검증해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또한, 국회의원이야 국민들이 4년에 한 번 선택할 수가 있지만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고위 공직자들이 위키리크스에서 폭로했듯이 대한민국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더 노력하는 경우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국가고시를 볼 때 미국에 대한 사상검증은 대체 확실하게 하기나 한 것인가?

 

주류와 다른 '사상과 표현의 자유'도 보장돼야

 

사실 나라꼴이 이 지경인 것은 종북주의자가 득세해서가 아니라 "뼛속까지 친일 친미"인 대통령을 위시하여 종일(從日), 종미(從美)주의자들이 나라 곳곳에서 암약한 탓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남한보다 북한을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국회로 보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자면 지금의 현실은 기껏해야 종미, 종일주의자들이 종북주의자를 잡겠다고 설치는 꼴일 뿐, 어디에도 '한국주의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습'이 문제라기보다 '북한'이 문제라면, 사사건건 북한을 걸고넘어지는 이 구조 자체를 바꾸는 노력을 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한국전쟁과 일제 식민지 모두 우리에게 말도 못할 고통과 비극을 안겼지만 보수층이 일본에 대한 생각으로 '사상검증'을 한 사례가 없는 (일제 식민지를 미화하는 뉴라이트가 활개치고 있음에도) 이유는, 물론 친일파가 완전히 청산되지 못한 탓이 가장 크겠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한·미·일 3국이 강력한 동맹체제를 구축한 이유도 있다.

 

일본이 아직도 과거반성을 하지 않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위안부를 부정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단지 일본을 옹호하는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처벌하지도 않고 국회의원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국회의원이 자위대 행사에 참석해도 제명되기는커녕 재선되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가 중요한 만큼 현재와 미래관계를 가꾸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 대한 호불호만으로 누군가의 사상을 검증하고 또 그 결과로 누군가를 처벌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 봐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야만적인 처사이다. 행위가 아닌 생각 자체를 처벌하겠다는 발상은 교과서적으로도 반문명적인 테러이지만, 이처럼 지금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벌어지는 현실에 대입해 봐도 대단히 공정하지 못한 정치탄압이다.

 

북한에 대해서도 일본의 경우와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만약 남북한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주변 강국들과 함께 서로 믿을만한 안보체제를 만들었다면, 북한의 3대 세습도 두바이 왕조세습 보듯 하는 여유를 좀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기준으로는 참 시대에 뒤떨어진 왕조국가이긴 한데, 그래서 우리가 저런 체제를 전혀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어쨌든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사는가보다"하면서, 셰이크 모하메드의 경우 마냥 오히려 능력있는 후계자를 뛰어난 시대의 지도자로 칭송할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사회가 좀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려면 북한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이렇게 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에 좀 더 전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분단체제를 비가역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한 '13년 체제'를 만들자는 일각의 주장이 새삼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사상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는 주류와 다른 사상이나 표현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류에 적대적인 사상과 표현에 대한 자유(적대적인 '행위'는 처벌하더라도)도 포함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사상의 자유니 표현의 자유니 하고 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지만, 그렇게 어려운 제도를 우리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제대로 지켜내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가치가 있다.

 

북한에 대한 남한체제의 우월성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종북주의자든 주사파든 그들이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말한다고 해서 무너질 나라라면 차라리 그렇게 망해버리는 게 낫다. 말도 안 되는 법으로 입을 막고 감옥에 잡아 가둬야만 유지가 되는 체제라면, 이미 민심은 그 사회를 떠났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태그:#종북, #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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