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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 내내 삭막한 도시에 살다 보면 휴일만이라도 맑은 공기 마시며 흙 한 줌 쥐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해진다. 황금연휴를 맞아 너도나도 끌고 나온 차들이 전국 도로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성질 급한 뒤차의 경적소리를 참아가며 매캐한 매연 뿜어내는 앞차 꽁무니만 쳐다보느라 한숨깨나 쉬었을 터. '그냥 집에나 있을 걸……'

노들 섬에 '비밀 텃밭'이 있다

연휴가 시작된 토요일인 26일 오후, 한강대교도 도심을 벗어나려는 차량 행렬로 꽉 막혀 있었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아도 좋다. 도심 속에도 흙 내음 풍기는 연둣빛 텃밭이 펼쳐진 곳이 있다. 이달 초 개장한 서울시 도시농업공원. 애초 한강 주변으로 계획되었다가 국토해양부가 개인의 하천부지 경작과 수질오염을 이유로 반대해 노들섬과 용산가족공원에 조성됐다.

한강대교를 건너다 보면 '비밀의 화원' 입구마냥 빼꼼히 열린 작은 철문을 발견할 수 있다. 노들 텃밭으로 향하는 문이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 한강대교를 채우던 소음도 사라지고 노들섬을 감싸 안은 숲 속에 별천지가 펼쳐진다. 아직은 어린 상추, 토마토, 고추, 가지 등이 오손도손 자라는 올망졸망한 텃밭 사이로 도시의 농사꾼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모내기 준비를 마친 무논은 거울처럼 오월의 하늘빛을 담고 있었다.

5월 26일, 노들텃밭과 흙살림이 주최·주관한 '노들텃밭 토종벼 모내기'에 참여한 사람들.
 5월 26일, 노들텃밭과 흙살림이 주최·주관한 '노들텃밭 토종벼 모내기'에 참여한 사람들.
ⓒ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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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회장 이태근)이 주최한 '노들섬 토종벼 모내기' 현장이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농촌문제세미나' 과목 수강생 셋도 동참했다. 지난달 충북 괴산 '흙살림 유기농 참여 이후 두 번째 농사 체험이다. 잡초만 뽑고 돌아온 괴산 체험의 아쉬움을 모내기로 달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긴 장화를 신었다.

딸 시집 보내듯 애지중지 모'내기'

"모는 심는 걸까요, 내는 걸까요? '모내기'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모는 '내는' 것입니다. 쌀은 예부터 귀한 음식이었죠. 부모가 딸을 시집 보'내듯' 모를 조심스럽게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낸다'고 해서 모내기라 불렸어요."

윤성희(48) 흙살림토종연구소장의 친절한 모내기 기초 교육 후, 자칭 '고수'들의 시범으로 작업이 시작됐다. 천호균 '쌈지농부' 대표와 최관호 흙살림 이사를 필두로 일반참여자들이 논을 가로질러 팽팽하게 당겨진 못줄 앞에 일렬로 늘어섰다. 못줄에는 25cm 간격으로 빨간 표식이 붙어 있다. 이것을 따라 모가 숨 막혀 죽지 않게 너무 주무르지도, 꾹 누르지도 않으면서 조심해서 모를 '낸다'. 자원봉사자들과 분양받은 텃밭을 가꾸러 왔다가 관심을 보이던 시민들도 이내 모내기에 합세했다.

"줄 넘어가요~."

못줄이 한 칸씩 이동할 때마다 양쪽에서 줄을 잡은 줄잡이가 외친다. 모를 심어도 좋다는 신호도 매번 준다. 줄잡이의 신호를 무시한 채 줄이 고정되기 전에 움직이다 모 대열이 헝클어지면 윤 소장에게 혼쭐이 났다.

나란히 선 참가자들이 못줄에 맞춰 모내기를 하고 있다.
 나란히 선 참가자들이 못줄에 맞춰 모내기를 하고 있다.
ⓒ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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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기업 이겨낼 우리 종자 살리기

윤 소장은 작업 내내 사람들을 격려하고 농담도 건네며 분위기를 띄웠다. 품종을 바꿔 심을 때마다 종자에 대한 흥미로운 해설도 덧붙였다.

"이 품종은 '돼지찰벼'예요. 아까 심었던 것과 이름이 똑같죠? 사람도 동명이인이 있듯이 종자도 동명이종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웬만큼 맛있다는 벼에는 다 '돼지'를 이름에 붙였어요."

벼 옮겨심기를 위해 모를 전달하는 참가자들.
 벼 옮겨심기를 위해 모를 전달하는 참가자들.
ⓒ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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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내기할 때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애정남'이었다.
"모내기는 손으로 할까요, 입으로 할까요? 네, 줄잡이만 입으로 합니다. 다른 분들은 줄잡이 지시에 따라 손으로 하세요. 입으로 떠들지마시고요. 단, 노래는 불러도 됩니다."

난생 처음 해보는 모내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물이 찬 논의 질퍽한 흙에 발이 푹푹 빠져 한 걸음 떼기가 힘들었다. 표식에 따라 정확하게 모를 꽂아 넣으랴, 이동하면서 평평하게 흙 돋우랴, 노래는커녕 입 한번 떼기도 어려웠다. 급기야 장화를 뚫고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흙탕물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때쯤, 134평짜리 넓은 논이 드디어 연두색 모로 가득 찼다. 이날 논에는 3시간 넘는 모내기 끝에 65가지 벼 품종이 심어졌다.

지금은 비슷해 보이는 이 많은 품종들이 자라면서 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을 띠게 된다고 한다. 흙살림은 그동안 벼 모종 말고도 1천여 종 토종 종자를 확보해 보급에 힘써왔다. 최춘식(48) 흙살림사업본부 차장은 모내기를 마친 논을 바라보며 토종 종자의 중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이제는 종자전쟁입니다. 외국 거대 종자회사에 맞서려면 토종 종자를 확보해서 다품종을 유지해야 해요. 카길이나 몬산토 같은 거대 종자회사가 국내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경쟁력과 상품성을 갖춘 유기농 토종종자를 개발해 유통한다면 다가오는 종자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죠."

자칭 '모내기 고수', 천호균 ‘쌈지농부’ 대표(좌)와 최관호 흙살림 이사가 모내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자칭 '모내기 고수', 천호균 ‘쌈지농부’ 대표(좌)와 최관호 흙살림 이사가 모내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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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세' 유기농 도시농업의 매력

윤 소장이 '고수'들을 불러낼 때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섰던 천호균 '쌈지농부' 대표는 사실 모내기를 몇 번 해보지 않은 '초짜'다.

"앞으로 모 심을 일이 많아서 연습 삼아 와봤지. 오늘 모내기 끝나고 남은 유기농 모판(종자)도 좀 얻어갈 겸......"

'쌈지농부'는 다음 달부터 헤이리에 서울여대 학생들과 함께하는 게릴라식 유기 농장을 계획 중이다. 300평가량 땅도 확보해놨다. 이 땅을 헤이리 예술가들과 '쌈지농부' 농부들이 반씩 책임지고 농사짓는다. 처음 농사를 짓는 이들이 많은지라 상대적으로 작업이 쉬운 '상자농장' 형태를 구상 이다. 그래도 몸에 좋고 자연을 살리는 유기 농업은 번거롭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방침이다.

도시 농업의 긍정적인 측면은 다양하다. 안전하고 영양 있는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고, 갑작스러운 천재지변 대비책도 된다. 식품이 생산지에서 소비자 식탁에 오르기까지 이동거리를 말하는 '푸드 마일리지'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식품이 이동하는 데 사용되는 화석연료 이용을 줄여줌으로써 장기적으로 기후변화를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허수아비가 서 있는 노들 텃밭 뒤로 여의도 63빌딩이 보인다.
 허수아비가 서 있는 노들 텃밭 뒤로 여의도 63빌딩이 보인다.
ⓒ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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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사홍(47) 흙살림도시농업본부장은 무엇보다 이웃과 함께할 기회가 적은 도시에서 공동체가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는 것을 으뜸가는 장점으로 꼽았다. 그래서 지난 3월 용산가족공원 텃밭 신청에서도 반드시 3~7인이 공동체를 이뤄 신청하도록 했다. 선정 기준도 '다수 공동참여자'를 1순위로 뒀다. 그래도 6천명 가까이 되는 시민들이 몰려 애초 500구획으로 계획했던 분양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텃밭 한 구획을 확보한 아빠 덕분에 김능희(10, 성원초등학교), 능근(9, 성원초)형제는 매주 노들섬에 농사지으러 온다. 능근에게 텃밭에 어떤 걸 심었냐고 묻자 작물 이름을 줄줄 왼다.

"오이랑 고추, 겨자채, 상추......아, 방울토마토가 제일 먹고 싶어요. 빨리 익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와보니 상추가 시들었다며, 물을 너무 적게 줘서 그렇다는 분석까지 내놓았다. 능희는 모종 심는 게 컴퓨터 게임보다 재미있다며 내년에도 꼭 가족 텃밭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처음 어른들을 따라 모내기를 흉내내본 능희는 매주 와서 벼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려고 한다. 윤 소장에게 '모내기하면 어린이도 막걸리 마실 수 있냐'고 당차게 물었다가 엄마에게 단칼에 제지당했지만, 이내 소금쟁이를 잡으러 논으로 뛰어들었다.

(좌) 주말이면 노들 텃밭을 찾는 김능희(10), 능근(9, 사진 왼쪽) 형제.(우) 논에서 소금쟁이를 잡으며 노는 어린이 참가자.
 (좌) 주말이면 노들 텃밭을 찾는 김능희(10), 능근(9, 사진 왼쪽) 형제.(우) 논에서 소금쟁이를 잡으며 노는 어린이 참가자.
ⓒ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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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지만 아직은 먼 도심 속 텃밭

노들섬 텃밭은 자가용 없이 찾기에는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텃밭 입구 주변에는 건널목이 없다. 용산 에서 버스를 타고 오면 문제없지만 반대편인 노들역 방면에서 온다면 정류장에서 내려 한강대교를 무단횡단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곧 건널목이 생긴다니, 그때까지는 노들역 2번 출구로 나와 15분가량 걷는 편이 낫겠다.

텃밭은 한강대교에서 10m 남짓 떨어져 시작되지만 울창한 풀숲에 가려 다리를 지나다니는 시민들이 볼 수 없다. 이날 텃밭을 분양받았거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일부러 온 사람들 외에 지나가다 들른 시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날 모내기 행사에 대해 권사홍(47) 본부장은 많은 시민들이 토종벼가 자라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하는 '전시' 의미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노들섬 텃밭은 아직 누구나 오가며 한번씩 들르는 공원이라기보다는 '비밀의 텃밭'처럼 보였다.

노들섬·용산가족공원 텃밭을 신청했지만 분양받지 못했거나, 이제라도 자기 텃밭을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 방법은 있다. 시에서 운영하는 곳 외에 민간이 운영하는 여러 텃밭농원이 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찾아가 도시농부가 되어보는 것도 좋겠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 텃밭농원 안내 페이지(agro.seoul.go.kr/farm)에 가면 민간 텃밭농원이 각 구별로 자세히 나와 있다.

제2, 제3 노들 텃밭, 한 발 더 시민 곁으로

6월 2일은 '유기농의 날'이다. 6월 2일을 '6.2'로 줄여서 발음하면 '유기'와 비슷해 기억하기도 좋다. 서울시는 이날 '서울시 도시농업 원년 선포식'을 노들 텃밭에서 연다. '벼 우렁이 화분 만들기'와 '여치집 만들기' 등 체험행사와 전국 40개 유기농단체가 준비한 친환경 쌀, 과일, 채소, 무항생제 한우 등 판매행사가 진행된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가해 토종벼 모내기 행사도 함께할 예정이다. 서울시의 도시농업 활성화에 대한 의지를 알리는 이 선포식 이후로 시가 운영하는 도시농업 공간들이 서울 안에서 차차 자리를 넓혀갈 전망이다. 앞으로 탄생할 제2, 제3의 노들 텃밭이 삭막한 도시 생활에 찌든 시민들의 숨통을 틔워줄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 (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노들텃밭, #흙살림 , #토종벼, #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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