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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시프트(Shift) 당첨됐어요. 로또 맞은 거지요. 다음 달에 이사 가요."

이리저리 전세를 옮겨 다니던 후배가 내 집 가까이 이사 온 건 3년 전의 일이다. 1년 전, 후배는 2년 전세 계약이 끝나고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주인 말에 또 이사를 해야 하느냐며 한참 고민했다. 결국 후배는 주인이 요구한 금액을 어렵게 마련해 눌러앉기로 하고 이사 비용 대신 오래된 TV를 바꿨다고 말했다. 푸념처럼, 자랑처럼.

그런 후배가 오랜 시도 끝에 장기 시프트에 당첨됐단다. 멀리 떠나서 섭섭하기는 하지만,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유랑의 삶을 마감하는 후배 부부.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다.

2년마다 이사를 고민했던 그 부부는 '내 집 마련'이 꿈이었다. 그러나 서울 하늘 아래서 집을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부부가 같이 직장 생활을 해도 오르는 전셋값을 따라잡기 벅찼다. 이런 사정에도 집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았던 것은 이사 다니는 설움, 집 없는 설움이 무엇보다 컸기 때문이리라.

주변 전세 시세 80% 이하의 가격에 최장 20년까지 거주할 수 있다는 장기 시프트 주택 당첨. 후배는 이제 2년마다 이삿짐을 꾸려야 하는 고통에서 해방됐으니 로또 맞았다는 표현도 그리 틀려 보이지 않는다. "차분히 돈 모아 집 사"라는 덕담에 후배는 그러겠노라며 허허 웃는다.

미국의 금융위기를 배우지 못한 MB정부

권도엽 국토해양부 장관이 지난 10일 오전 10시30분 정부과천청사 국토해양부 기자실에서 '주택거래 정상화 및 서민·중산층 주거안정 지원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권도엽 국토해양부 장관이 지난 10일 오전 10시30분 정부과천청사 국토해양부 기자실에서 '주택거래 정상화 및 서민·중산층 주거안정 지원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 국토해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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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와 식량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좋은 정부라면 재화의 가격을 낮게 유지하려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주택을 둘러싼 미국 정부의 정책은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주택 가격이 계속 올라야만 유지되고 번성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바람에 집값 안정과는 정확하게 반대되는 결과를 부추긴 셈이 되고 말았다." (담비사 모요가 쓴 <미국이 파산하는 날> 중 발췌)

2008년. 전 세계를 흔든 미국의 금융위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정부는 금리를 낮게 유지하고 담보보다 더 많은 돈을 빌려 주면서 집 사기를 권했다. 턱없이 낮은 이자, 오르는 집값. 주저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너도나도 은행 대출을 받아 집 사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럴수록 집값은 점점 더 올라갔다. 대출이자를 훨씬 웃도는 집값 폭등 때문에 모두 부동산 자산가가 된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품'이었다. 거품이 꺼지는 순간 집값은 여지없이 곤두박질쳤고, 은행 대출금을 갚지 못한 대출자들은 줄줄이 집을 압류당했다. 은행이 파산하고 국가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었다.

집이 주거보다 투자의 대상이 될 때, 주택 구매가 구매자의 여유 자금과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한 빚 권하는 국가와 이를 조장하는 시스템에 의해 결정됐을 때 거품은 필연적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시기적으로 본다면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서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미국의 금융위기를 반면교사로 삼아 부동산 정책을 보수적으로 운영하기보다는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를 완화하고 빚내서 집 사라는 부동산 정책을 4년 내내 반복했다.

2008년부터 무려 17번 거듭된 부동산 정책. 한 해 평균 3.4번의 정책을 쏟아 냈지만, 미분양 물량은 넘쳐났다. 반대로 집을 구하지 못한 서민들은 유랑민처럼 떠돌기를 반복했다. 땜질식 처방, 건설사 살리기 처방에서 서민은 정책의 주인공으로 대접받는 게 아니라 부동산 거품을 지탱하는 수단으로 취급됐다. 17번의 부동산 대책 대부분이 집 살 사람보다는 집을 팔아야 할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서민의 주거안정은 매번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지난 5월 10일, 17번째로 발표된 '주택거래 정상화 및 서민 중산층 주거안정 지원방안'도 별반 다르지 않다.

5.10 대책은 강남3구 총선 보은 대책?

투기지역에서 해제된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단지.
 투기지역에서 해제된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단지.
ⓒ 박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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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발표된 부동산 정책의 핵심은 '강남권 투기·주택거래신고지역 해제' '양도세 세제 완화'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택 경기에 가장 민감한 강남3구를 투기 지역에서 해제한다면 DTI, LTV(주택담보인정비율), 취득세 완화로 주택 거래가 늘어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서민·중산층의 주거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억측에 불과하다.

되레 부자들의 재테크 수단으로 주택 거래가 활성화되면, 서민의 내 집 마련의 꿈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으며, 전·월세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5.10 부동산 정책이 총선 승리를 안겨준 강남3구에 대한 보은 정책이라는 비난. 웃고 넘길 수 없는 날카로운 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우스 푸어 150만 가구의 시대.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국내 하우스 푸어가 적게는 108만4000가구(374만4000명)에서 많게는 156만9000가구(549만1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8~11%의 국민들이 하우스 푸어인 셈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하우스 푸어 계층이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데도 정부에서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수입의 30% 이상을 쓴다는 하우스 푸어 계층. 이 계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2008년 이후의 일이었다. 무려 17번의 부동산 대책을 쏟아냈지만, 서민 주거권 안정은 명분일 뿐 돈 빌려 집사라는 사탕발림만 끊임없이 반복했으니 하우스 푸어가 늘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실질 소득 증가 없는 서민들에게 저렴한 대출을 알선해 왔던 이명박 정부. 하우스 푸어 150만 가구는 실패한 부동산 정책의 초라한 성적표다.

그러나 하우스 푸어의 고통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 저금리 기조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원금 상환은 유예한 채 이자만 내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금리 인상이 세계적 추세이고, 국내에서도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저금리 기조는 언제든지 고금리 기조로 돌아설 수 있다.

또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믿고 대출을 받아 집을 샀던 사람들 대부분은 1, 2년 안에 원금도 상환해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은 하우스 푸어 계층을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세울 수 있다.

100가지 정책보다 '인식 전환'이 먼저

개포동 주공아파트 1단지 내 상가. 부동산 중개업체들이 다수 입주해있다.
 개포동 주공아파트 1단지 내 상가. 부동산 중개업체들이 다수 입주해있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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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대폭 손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출받아 집 사라는 하우스 푸어 돌려막기 부동산 정책은 미국의 금융위기를 불러왔던 '거품'을 만드는 일이다. 서민 경제의 몰락은 물론 은행 부실, 국가의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주택 거래 활성화를 위해 부동산 규제 대부분을 풀어 버린 이명박 정부와 새누리당은 DTI 규제마저 풀거나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DTI 규제마저 풀면 건설사가 살고 집 많은 부자들은 큰 이익을 낼 수도 있겠지만, 서민들에게는 독이 든 사탕을 돌리는 꼴이다.

주택 가격이 계속 올라야만 유지되고 번성하는 시스템을 만든 이명박 정부. 그리고 그에 부응하는 새누리당. 이들은 하우스 푸어 150만 가구의 연착륙과 서민 주거안정을 우선적인 정책 과제로 삼아야 한다. 서민에게 내집 마련의 꿈을 꾸게 하려면 집값을 낮추고 실질 소득을 높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다시 대출 카드를 내미는 부동산 정책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주거와 식량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좋은 정부라면 당연히 재화의 가격을 낮게 유지할 것이라 기대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의 지적과 서민들의 바람은 별반 다르지 않다. 수많은 정책보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태그:#5.10 부동산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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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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