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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고, 또 생각 없이 불리며 일컬어지는 단어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이 두 글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제 각기 강력한 작용과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믿는 것이 옳은 내 견해이고, 내 체험의 소산인 것이다."

 철기 이범석 장군
 철기 이범석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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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이범석 장군이 자신의 회고록인 <우둥불>(1971)에서 조국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40년. 국가보훈처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40번째 추모식이 11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다고 밝혔다.

이날 추도식에는 국회의원과 각 군 장성 및 유가족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사, 약력보고, 추모사, 헌화·분양 및 조총 발사 등의 순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1900년 10월 20일 서울 종로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난 이 장군은 농상공부 서기관으로 재직하던 관리였던 아버지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그는 신익희의 한성외국어학교 동창이었던 외삼촌 이태승과 손위 매부인 신석우 같은 개화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이들로부터 근대적 사고와 신학문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5세때 여운형 만나 중국으로 망명

1915년 여름 이 장군은 한강에서 여운형과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당시 여운형은 남경 금릉대학에 다니다 방학을 맞아 귀국하여 독립 운동에 참여할 청년들을 찾고 있었는데, 이때 이 장군을 만나게 된다. 이 장군은 여운형을 통해 국제 정세와 독립운동 상황을 전해듣고 그의 권유로 중국 망명을 결심한다. 그해 11월 일본학생으로 가장하여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상해에서 신규식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항주군관예비학교를 거쳐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기병과(騎兵科)를 졸업하며 독립군이 되기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기병장교로서 촉망을 받았지만, 3·1운동 소식을 듣고는 동기생 4명과 함께 장교직을 사직하고 상해 임시 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정부 요인들과 논의 끝에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 무장 독립투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해 10월부터 통화현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의 고등 군사반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다한다.

신흥무관학교에 있던 이 장군은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끌던 북로군정서로 파견을 요청받는다. 자리를 옮겨 북로군정서의 군사교관으로 부임한 그는 그해 5월 사관연성소를 창설한 뒤 600여명의 생도들을 모집하여 독립군 장교로 교육함으로써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해 갔다. 이는 후에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는 데 큰 요인이 되었다.

당시 독립군 부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있던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제는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그것을 구실로 삼아 독립군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독립군측은 일제의 이 같은 계획을 미리 간파하고 미리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도구와 3도구에 집결하고 있었다. 일본군 역시 독립군과 대결하기 위해 이 지역을 공격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그 중심지는 한인 마을이 있던 청산리 일대였다.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의 또다른 주역

20살의 어린 나이로 김좌진 장군과 함께 북로군정서군의 한축을 이끌게 된 이 장군은 1920년 10월 20일에 백운평 첫 전투가 시작 된 후 일본군과 10여 차례 격전을 치러 대승을 거둔다. 기록마다 내용이 조금씩 상이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사하여 발표한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1200여 명이 전사하고 2100여 명이 부상을 입은데 반해 독립군은 130여명의 전사자와 220여명의 부상자만을 냈을 뿐이다. 이 전투는 우리나라의 항일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큰 전과로 꼽힌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이 장군은 1923년에 5월에 김규식, 고평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군사교육을 강화했고, 1934년에는 낙양 군관학교 내에 한국 독립군을 키우기 위한 특별반이 설립되자 교육대장을 맡아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국민정부의 후원 아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이 장군은 여기에 참석하여 참모장이 되었다. 이후 이 장군은 독립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참모장 자리를 내놓고 자원하여 제 2지대장이 되어 최정예군을 만들기 위한 교육훈련에 힘쓰는 한편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독립군을 국내로 투입하여 공격거점을 확보하고 정보를 수집케 하는 독수리 계획(Eagle Project)를 추진하였다. 이 장군에 의해 선발된 요원들이 OSS훈련을 수료하고 국내 침투를 기다렸지만 때마침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는 바람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광복 후 이 장군은 광복군 중장으로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후 좌우익간의 격렬한 대립을 목격한 이 장군은 1946년 10월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세운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결성하여 해방 이후의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공을 들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당초 국무총리로 지명되었던 총리서리 이윤영이 국회에서 인준이 거부되면서 초대 국무총리에 오르게 되었고 국방장관까지 겸직하며 생애 후반기에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다.

한국 전쟁 이전에 주 타이완 대사로 있던 이 장군은 전쟁이 발발하자 급히 귀국하여 비상 국무회의에 참여하였으며, 북한군이 경기도 북부지역으로 진입하자 한강철교의 폭파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1952년 자유당이 창당되자 자유당 부당수가 되었고 이어 내무부 장관도 지냈다. 또한 제3대와 제4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1960년에는 충청남도에서 자유연맹 소속의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만년에 국토통일원의 고문으로 여생을 보내던 이 장군은 1972년 5월 11일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이 장군의 공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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