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프랑스의 수도 파리(Paris). 에펠탑, 몽마르트르 언덕, 노트르담 성당, 센강 등 말만 들어도 멋이 풍기며 낭만에 취해져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파리는 좀 다른 파리다. '플라이(Fly)', 즉 곤충으로 분류되는 그 더러운 파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 기자 말

사막과 정글, 남극과 북극 같은 극지를 달리다 보면 예상치도 못한 별일이 다 생긴다. 하지만 이런 오지에서 달리는 대회 자체가 자급자족 서바이벌이라 어느 정도 환경은 스스로 극복한다는 정신으로 도전하기에 생각보다는 견딜 만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적응 안 되는 몇 가지 상황에 부닥치면, 오지를 누비는 나도 때론 난감해진다. 이른바 '멘붕'(멘탈붕괴)에 빠진다.

개인적으로 세상 어디를 가나 음식·물·잠자리(?)에 대한 문제가 없는, 난 여행에 최적화된 축복 받은 몸을 타고났다. 손으로 밥을 먹던 코로 먹던 어떠한 음식을 한 번만 먹으면 어머니의 음식으로 바로 적응되며, 현지 물을 마셔도 탈이 잘 안 나는 편이고, 어디든 머리가 닿으면 길바닥이건 궁전이건 잘 잔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주변의 상황으로 인해 참으로 곤란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 첫 번째 멘탈붕괴 : 신발] 무모한 용기가 불러온 곤란

 영하 40도의 다이아몬드 울트라 레이스

영하 40도의 다이아몬드 울트라 레이스 ⓒ 유지성


첫 번째는 북극 쪽 다이아몬드 울트라 레이스에 참가했을 때다. 대회는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자신의 식량과 장비 등을 실은 썰매를 끌고 225km를 6일간 달리는 대회였다.

기존에 참가하는 보통의 대회와는 다르게 겨울철 극지에서 벌어지다 보니 뭐 여러 가지 장비들이 필요했는데, 그중 하나가 눈에 안 빠지고 걸을 수 있는 스노 슈즈(설피)였다. 난 그때 스노 슈즈라는 걸 실물로 난생 처음 봤고, 사용도 처음이었기에 뭐가 뭔지를 잘 몰랐다. 무모한 용기(?)가 결국 곤란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난 사용법도 대회 당일 현장 박치기로 익힌다는 생각으로 딱 한 번 신어보고 바로 대회에 참가했다.

 두 개로 분리된 스노 슈즈

두 개로 분리된 스노 슈즈 ⓒ 유지성


그런데 이게 뭔 난리인지 얼마 가지 않은 상황에서 신발과 스노 슈즈를 고정해주는 끈의 연결 나사가 빠지면서 스노 슈즈가 두 동강 나버렸다. 그럼에도 난, 레이스를 완주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두 동강난 스노 슈즈를 신고 그대로 달리고 달렸다. 그때부터 대회 셋째 날 스노 슈즈를 교체할 때까지 지옥이 있다면 비슷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주최 측에서 이런 날 얼마나 불쌍히 여겼으면 스노 슈즈를 긴급 공수해 바꿔 주었을까…. 만약 그 상태 그대로 갔다면 난 아마도 탈락을 했고, 장비 탓을 부르짖으며 평생 한을 품었을 것이다.

영하 40도의 눈밭에서 갈 길 바쁜데 두 개로 분리된 슈노 슈즈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자. 정말 끔찍할 수밖에 없다.

[# 두 번째 멘탈붕괴 : 파리] 내가 너희를 폭풍 흡입할 줄이야!  

하지만 정말로 나에게 있어 '오지레이스 멘붕'의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일은 2011년 호주 아웃백 레이스에 참가했을 때 벌어졌다. 조금 설명하자면, 호주 아웃백 레이스는 세계 최장 거리 서바이벌 레이스로 대회 거리가 560km였다. 대회는 9박 10일간 산 넘고 물 건너 사막을 지나야 하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 모험의 세계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험한 바위산을 타고 넘고 달리는 험난한 코스였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코스 길이가 짧아서 참을 만했다. 그런데 셋째 날부터 제한시간 10시간에 거리가 60km로 늘어났다. 무거운 배낭 메고 사막 60km를 10시간에 가야 한다? 달려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게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우리는 파리떼와 싸워야 했다. 수십 킬로미터의 험난한 사막 코스도, 내 등에 짊어진 무거운 배낭도 아닌, 저울에 올려놔도 눈금조차 움직이지 않은 그 가벼운 파리가 나에게 멘탈붕괴를 선사(?)할 줄이야….

 파리들이 배낭에 달라 붙어 있다.

파리들이 배낭에 달라 붙어 있다. ⓒ ana


무슨 말이냐 하면, 호주에 가기 전 아웃백 지역은 유난히 파리가 많다는 이야기를 대회 시작 전부터 들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파리들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일단 달리는 것도 힘든데 파리떼와 싸움을 해야 한다는 상상을 해보자.

그 파리들이 그냥 파리가 아니다. 그것들은 수백 마리 이상 때로 몰려다닌다. 온몸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파리떼들을 보자면, 어떨 때는 내가 파리인지 파리가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때 파리들이 모이면 무겁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언제 어디서나 파리는 친근한 벗이다.

언제 어디서나 파리는 친근한 벗이다. ⓒ 유지성


사실 대회 시작 전 이틀간은 쥐새끼들과 싸움을 했다. 내용은 이렇다. 손가락만한 쥐새끼들이 모두 깊이 잠이 든 밤만 되면 텐트를 찢고 들어와 우리들의 음식을 갉아먹는 것이었다. 자다 깨다 쥐새끼들 잡고 또 자다 깨다 쥐새끼들 잡고… 정말 짜증 가득한 이틀을 보내니 쥐새끼의 '쥐' 자만 들어도 주변의 돌을 집어 들게 했다.

그런데 그것을 능가하는 것들이 파리떼였다.

그것들은 꼭 오전 8시쯤 출근을 하여 배낭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일광욕을 즐기는 것인지 초반에는 미동도 없고 조용하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몸이 달아오르면 점점 얼굴 쪽으로 날아온다. 가장 더운 낮시간엔 아주 활발하게 난리를 친다.

그것들을 멀리하고자 냅다 달리면 잠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이내 '웅'하는 소리를 내며 시커먼 파리떼들이 나를 쫓아온다. 바닥의 그림자를 보면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데 입에 게거품 물고 달리는 내 그림자와 점점 좁혀지는 뒤쪽의 검은 그림자.

"아~ 안 돼!" 입에서 절로 한탄이 나오면서 더욱 열심히 달린다. 거친 숨소리와 거칠어지는 호흡.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그 와중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파리들을 폭풍 흡입했는지….

 제한시간 10시간 안에 60km를 달려야 한다.

제한시간 10시간 안에 60km를 달려야 한다. ⓒ 유지성


온종일 달리면서 파리와 싸움을 하지만 서서히 해가 넘어가는 시점인 오후 5시에는 그 애들도 퇴근을 한다. 한낮 동안 '울트라 캡숑 초특급 메가파워'를 자랑하며 멘탈붕괴에 빠질 만큼 날 괴롭혔던 그 놈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꼭 동사무소에 출퇴근하는 '방위' 같다. 뭐든지 자주 보면 정든다고 하는데, 그때쯤이면 괜스레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드는 한 가지 생각.

방위는 방위를 알아본다고… "파리, 니들도 방위냐?"

호주 아웃백 유지성 오지레이스 마라톤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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