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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시 오분동 김문자씨 집 주변 마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분진이 자주 날아든다.
 삼척시 오분동 김문자씨 집 주변 마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분진이 자주 날아든다.
ⓒ 진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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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내린 빗물을 모아둔 양동이 안이 새카맣다. 강원도 삼척시 오분동에 사는 김문자(58)씨는 걸레를 빨거나 농기구 헹구는 허드렛물로 쓰기 위해 처마 홈통 아래에 플라스틱 양동이를 받쳐둔다.

"이 집에 4년 살았는데, 비 올 때마다 항상 그래서…. 우리야, 이게 뭔지 모르죠."

진진태(79)씨는 집 뒤편 닭장의 지붕 위를 가리켰다.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의 울퉁불퉁한 굴곡이 평평해질 정도로 두껍게 쌓인 이물질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진씨가 호미로 기왓장을 여러 번 두드리자 그제서야 이물질 조각들이 떨어져 나온다.

인근 마을의 지붕은 거의 홈이 메워지거나, 지은 지 얼마 안 된 지붕들도 새까만 먼지로 뒤덮여 있다. 진씨는 "지붕에 오랫동안 쌓인 분진은 좀체 씻기지 않는다"며 "아무리 마을 앞에 도로가 있다지만 검은 가루가 이렇게 쌓일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오분동에서 1km 남짓 거리에는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시멘트공장이, 삼척시 일대에는 석회석 광산 14곳과 탄광 등 각종 광산이 있다.

피해조사 세 번, 드러난 환자만 천여 명

지붕에 분진이 오랫동안 쌓이고 굳어, 기와나 슬레이트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평평해진 상태다.
 지붕에 분진이 오랫동안 쌓이고 굳어, 기와나 슬레이트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평평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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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에는 10개 회사가 시멘트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중 강원도에만 5개 업체(삼척 동양시멘트, 강릉 라파즈한라시멘트, 동해 쌍용양회, 영월 현대시멘트·쌍용양회)가 있어, 인접한 충북 제천·단양지역과 함께 대규모 시멘트공장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들 지역은 시멘트 주원료인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곳이 많은데, 석회석 광산의 절반이 강원도에 몰려있고 그 중 20% 정도는 삼척시에 있다.

석회석 채광과 시멘트 생산 공정에서 발생하는 비산먼지, 시멘트 연료와 원료로 사용되는 각종 폐기물 등으로 인근 주민들의 건강과 환경 문제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지난해 삼척시에서는 주민건강영향조사가 이뤄졌다.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이 2007년에서 2010년 사이 영월과 제천·단양지역 주민건강조사를 벌인 데 이어 3번째 실시된 것이다.

시멘트공장과 광산 주변지역 삼척주민 3058명을 대상으로 한 검진 결과 36명이 진폐를, 278명이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은 어떤 원인물질에 의해 폐가 점점 굳어지는 '섬유화'가 일어나거나, 기도가 좁아져 폐기능이 떨어지는 대표적인 호흡기질환이다. 이번에 삼척에서 조사된 진폐 환자 가운데 17명은 과거 탄광이나 시멘트 관련 업종에서 일한 적이 없어, 직업력뿐 아니라 장기간 환경성 오염에 노출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삼척 시멘트공장 주변 주민검진을 담당한 충북대학교 예방의학 김헌 교수는 "조사 이전에 이미 본인이 진폐환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삼척은 직업력에 의한 진폐 사망률이 높은 지역"이라며 "분진 관련 직업력이 없는 삼척시내 진폐증 발생은 시멘트공장에 기인하는 부분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폐병에 당첨? 주민배려 부족했던 조사

지난 24일 오전 9시쯤 동양시멘트공장 주변에서 뿌연 연기가 발생했다. 이를 지켜 본 시민이 공장 측에 사실을 알리고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연기는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지난 24일 오전 9시쯤 동양시멘트공장 주변에서 뿌연 연기가 발생했다. 이를 지켜 본 시민이 공장 측에 사실을 알리고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연기는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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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동사무소로 검사받으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치매환자 조사하듯 하더라고. 의심쩍은 부분이 있으니까 정밀검사 받아야 된다고, 어디 병원 가라고 일러주면서 당첨됐다고 말하는데 어찌나 괘씸하던지. 폐가 나빠서 애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검사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무슨 상품 제비뽑기하듯 하니까, 화가 나서 때려치우고 돌아왔어."

한국전쟁 직후 스무 살도 안 돼, 동양시멘트공장에서 3~4년간 원석 운반 일을 하다 군에 입대했다는 진진태씨는 가래가 심해 고생이다. 지난해 표본으로 진행된 건강조사과정이 불쾌해 진씨는 검진을 중도에 포기했다가, 재연락을 받고 동해산재병원에서 컴퓨터단층(CT)촬영을 했다. 병원에서 폐가 나쁘다는 설명은 들었지만, 결과에 대한 통지서는 아직 받지 못한 상태다. 지난달 28일 환경부가 삼척 시멘트공장 주변 주민검진 결과를 발표하면서 현지주민설명회를 열었지만, 진씨를 비롯해 오분경로당에 모인 사람들은 설명회 얘기를 처음 들었다.

구동남(73)씨는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는데 검사 결과는 알면 뭐하느냐"며, 동네 주민 가운데 전부터 진폐 보상금을 받고 있던 아무개가 이번에 진폐 확정을 받았는지 궁금해 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적절한 대책이 나오도록 주민들이 요구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옆에 있던 김상호(76)씨는 "그런 얘기 공장에 들어가면 아는 사람 취직시켜주고 돈 주고 해서 허튼소리 안 나오게 한다"며 손사래 쳤다.

해당 업체나 조사 주체 또는 지자체에 대한 신뢰가 높지 않다 보니, 주민들은 앞으로 환경보건서비스를 담당할 강원대학병원에 대한 기대도 낮다. 환경부는 지난 6일 강원대학병원을 호흡기질환 최초 환경보건센터로 지정하고 환자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방침이지만, 주민들은 관련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원전 이슈에 뒷전으로 밀린 분진 피해

오분동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광산과 시멘트공장에서 발생하는 분진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분동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광산과 시멘트공장에서 발생하는 분진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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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과 제천·단양에 이어 삼척시에서도 진폐 환자가 집단으로 확인됐지만, 주민들을 비롯해 지역사회 내 관심이 낮은 이유에 대해 삼척핵발전소유치백지화투쟁위원회 이붕희 사무국장은 "지역현안을 파고들만한 시민단체 자체가 부족하고, 현재는 신규 원전 부지 선정 문제에 지역여론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삼척은 경북 영덕과 함께 신규 원자력 발전소 후보지로 선정돼, 원전 증설의 필요성과 선정 절차상 문제를 두고 주민들 사이에서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맞붙은 상태다.

시멘트공장 주민피해조사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2008년 해당지역 주민과 환경단체, 전문가를 중심으로 구성한 민관협의회 역할을 삼척에서 담당했던 삼척시번영회조차 이번 건강조사 발표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우현각 삼척시번영회 회장은 "탄광이나 석회석 피해, 원전설립 문제 등 지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계속 활동해 왔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피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안에 매달리고 있어 미처 챙기지 못했다"며 "이번 조사로 피해가 드러난 사람들 말고도 내용을 모르고 있는 주민들을 찾아 지역 내에서 관심을 환기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삼척에서 나고 자라 평생 뱃일을 했다는 김인구(59)씨는 4·11총선에서 시멘트공장 피해 문제가 쟁점화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강원도가 워낙 석회석 광산이나 탄광이 많은 지역이라 아무래도 그 피해가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부가 실제로 조사해서 이렇게 밝혀진 사실은 몰랐어요. 일본에서 원전 사고가 크게 터지니까 지역에서 모두가 그 얘기뿐인데, 이런 게 왜 이슈가 안됐나 모르겠네. 요번 총선 후보자들도 죄다 원전 유치 반대한다고만 했지 이 얘기는 없던데…"

제천 시멘트공장피해주민대책위원장 박광호씨는 "삼척지역 안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조사가 이뤄진 제천·단양이나 영월과 앞으로 진행될 동해, 강릉 등 지역주민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며 피해주민들의 연대를 강조했다.

제천환경운동연합 김진우 사무국장은 "치료방법이 별도로 없는 진폐나 만성폐쇄성폐질환은 감기만 걸려도 몸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영양이 제대로 공급되고 환경이 쾌적해야 한다"며 "특히 노인이나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에서 많이 나타나는 시멘트 피해 사후관리 예산으로 2억6천만 원만 배정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환경부는 올해 안으로 강릉과 동해 시멘트공장 주민들을 대상으로 건강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일정은 잡히지 않은 상태로 연구를 진행할 기관을 선정하는 중인데, 2010년 제천·단양과 이번 삼척 조사를 담당한 김헌 교수는 이후 조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소장은 "삼척을 포함해 앞선 조사에서 누락되거나 참여하지 못한 시민들이 더 많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조처도 필요하다"면서 "조사내용이 복잡하고 방대한 만큼 지금까지 연구를 진행했던 기관들이 나름의 노하우를 쌓았을 텐데, 앞으로 진행될 조사는 다른 기관에서 맡게 될 가능성이 높아 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지난해 삼척주민 일부를 대상으로 한 주민건강조사에서 36명이 진폐를, 278명이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진폐환자 17명은 직업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삼척주민 일부를 대상으로 한 주민건강조사에서 36명이 진폐를, 278명이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진폐환자 17명은 직업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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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삼척, #진폐, #시멘트, #분진, #제천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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