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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3월 3일 황유미씨 사망 3주기(2007년 3월6일 사망)를 맞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을 비롯한 서울, 경기 등 삼성사업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1인 시위 장면.
 지난 2010년 3월 3일 황유미씨 사망 3주기(2007년 3월6일 사망)를 맞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을 비롯한 서울, 경기 등 삼성사업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1인 시위 장면.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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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때문에 묻혔지만 지난 4.11 총선을 하루 앞두고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다 병을 얻은 노동자가 처음으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이사장 신영철)은 지난 10일 충남 아산시 배방읍 소재 삼성전자㈜ 온양공장 반도체 조립 공정 등에서 5년 5개월 동안 근무한 여성 노동자 김지숙(36)씨의 '혈소판감소증 및 재생불량성 빈혈'을 산업재해로 승인했다.

재생불량성 빈혈(무형성 빈혈)은 골수 손상으로 조혈기능에 장애가 생겨 백혈구, 혈소판 등이 감소하는 질병으로 선천적으로 발병하는 경우도 있지만, 80%는 후천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의학계에서는 후천성 빈혈은 방사선 노출이나 벤젠 등 화학물질, 약물, 감염, 면역질환, 임신 등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산재인정을 받은 김지숙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93년 12월부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과 온양공장에서 5년 5개월을 일했다.

근로복지공단은 김지숙씨가 근무 과정에서 벤젠이 포함된 유기용제와 포름알데히드 등에 간접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1999년 퇴사 당시부터 빈혈과 혈소판 감소 소견이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했다.

이번 산업재해 인정은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역학조사와 근로복지공단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결정된 것으로 삼성전자㈜ 노동자의 재생불량성 빈혈이 산재로 인정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망가진 몸, 철분제와 레모나 먹으며 버텼다"

김지숙씨는 1993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삼성에 입사했다. 그러나 입사한 지 2년 만에 '납중독' 진단을 받았다. 이후 부서를 옮겼지만 이후에는 '악성 빈혈'이 발생했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자료에 따르면, 김지숙씨는 '철분제'와 '레모나' 등을 복용하며 삼성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밝혔다. 또한, 김지숙씨는 언제부터인가 작업하면서 기계에 살짝만 부딪쳐도 시커멓게 멍자국이 생겼으며 근무 중에 두통이 찾아오고, 가슴 한쪽이 크게 붓기도 했다고 한다.

처음 몇 년은 주야 12시간 맞교대로, 그러다 오전 6시 - 오후 2시 - 오후 10시 3교대 근무로 바뀌었다. 작업장에는 항상 고약한 납, 시너 냄새가 났다고 한다. 

또 수동으로 도금하는 작업 과정에서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고, 면장갑만을 이용해 각종 화학물질과 접촉하는 등 유해 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또 작업 과정에서 도금하던 납 찌꺼기가 나오면 이를 청소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동안 남성 엔지니어들은 무슨 성분인지도 모를 약품을 분사하며 기계를 정비하고 청소했다.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인 19세에 입사해 25세까지 5년 5개월간 몸담았던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그녀는 지난 1999년 4월 퇴사했다. 현재 그녀는 병마와 힘겹게 싸우고 있다.

같은 시기 같은 공장에서 일한 사람들

지난 2009년 7월 21일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앞 집회장면. 이날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 반올림, 노동계 등에서는 온양공장에서 근무했던 송창호씨의 산재판정을 앞두고 산재평가위원회와 역학조사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2009년 7월 21일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앞 집회장면. 이날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 반올림, 노동계 등에서는 온양공장에서 근무했던 송창호씨의 산재판정을 앞두고 산재평가위원회와 역학조사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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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불량성 빈혈은 혈액을 만들어내는 골수가 손상돼 나타나는 병이다. 1년에 인구 100만 명당 10명 내외로 보고되는 희귀질환이다. 이 병은 백혈병, 림프종과 같은 림프조혈계암과 발병원인이 같은 혈액질환이다. 

재생불량성 빈혈은 과거 병력이나 가족력상 선천적인 원인일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또 19살에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해 건강이 악화될 때까지 다른 직업력도 없다.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은 반도체 조립공장으로 2008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반도체 제조공정 건강실태 역학조사 결과 조립공정 여성의 경우 림프종 발병률이 5.16배로 나왔으며, 재생불량성 빈혈은 표준화사망비가 1.46으로 높게 나왔다. 

특히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같은 시기에 같은 공정에서 근무한 송창호씨(도금공정)는 악성 림프종이, 김옥이씨(절단절곡공정)는 급성전골수구성백혈병이, 유명화씨(고온테스트 공정)는 김지숙씨와 같은 재생불량성 빈혈이 발병했다.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은 "매우 드문 질환들이 같은 시기 같은 사업장에서 다발적으로 발병한 것은 질병과 업무와의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정했다.  

김지숙씨는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공장과 기숙사를 오가며 하루 8~12시간 주야로 납을 이용한 도금 업무를 했다. 건강검진 결과, 납중독과 악성 빈혈 증상이 시작됐다. 그는 절단절곡과 인쇄 업무를 하다가 퇴직 이후 서서히 증상이 악화돼 혈소판 감소증을 거쳐 재생불량성 빈혈을 얻었다.

이종란 노무사는 "김지숙씨의 작업과정에서 수시로 사용했던 납은 혈액독성이 있는 중금속이고, 유기용제(세척제)에 벤젠이 함유돼 있었다"며 "납과 벤젠의 노출과 바로 앞 공정(성형공정)에서 열분해 산물로 발생한 포름알데히드에도 노출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지숙씨의 혈소판감소증과 재생불량성 빈혈은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 산재신청 노동자 21명

반올림에 따르면 현재까지 반도체와 LCD 등 삼성에서 일하다 죽거나 병들어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는 모두 21명이라고 한다. 이번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근무했던 김지숙씨에 대한 첫 산재 인정은 그동안 승인받지 못하거나 심사 계류 중인 신청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산재신청자 중 8명이 사망했으며, 13명은 백혈병, 뇌종양, 재생불량성빈혈, 유방암, 다발성경화증, 악성B세포 림프종, 웨게너씨 육아종, 루게릭 등으로 현재 투병 중이다.

사망하거나 투병중인 노동자들은 20대 6명, 30대 7명, 40대 3명으로 대부분 젊은 연령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생산현장에 투입된 인원 대부분 19세부터 취업해 일을 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사업장도 기흥반도체 13명, 아산 온양반도체 6명, 기흥LCD 2명, 아산 탕정LCD 1명, 천안LCD 1명 등으로 분포돼 있다.

반올림은 "삼성에서 근무하고 있거나 근무한 경험이 있는 노동자나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유사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공동대응을 위해 제보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반올림, 삼성과 주고받은 2개 문건 공개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에 따르면 삼성은 2010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근무했던 박지연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몇몇 피해가족들에게 개별접촉을 통해 '산재보상 청구포기'와 '반올림과의 접촉중단' 등을 조건으로 위로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이 과정에서 반올림과는 공식적인 대화를 진행하면서 물밑에서는 피해가족들을 회유해 반올림과 백혈병 피해자들의 구심점을 붕괴시키려는 공작을 치밀하게 진행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올림은 "삼성이 문제 해결을 위한 진정성이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산재피해자들의 법적 권리와 시민으로서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김지숙씨의 산재인정 발표에 앞서 2개의 문건을 공개했다.

하나는 지난 2월 25일 삼성전자 건강연구소에서 '삼성 퇴직직원의 직업성 암과 관련한 만남'을 제안하는 내용의 이메일이다(수신 단체는 반올림). 또 다른 하나는 4월 4일에 작성된 이메일로 삼성 측의 대화요청에 대해 반올림과 피해가족들의 요구사항이 담겨 있다.

반올림은 "삼성이 진정으로 책임있는 대화를 원한다면 모든 논의과정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앞으로 삼성 백혈병 문제를 둘러싼 양자의 입장은 모두 투명하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반올림은 두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반올림 측은 "첫째, 삼성이 행정소송까지 개입해 정부가 피해가족들에게 산재보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며 "삼성 출신 노동자들의 정당한 법적권리를 방해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행정소송 보조참가를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삼성은 지난 3월 21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산업안전보건회의(ICOH)에서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은 업무와 무관하다'는 내용을 발표했다"며 "반올림과 피해자들은 4년이 넘도록 산업재해임을 인정받기 위해 싸웠는데, 삼성은 자사 이미지만을 생각해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해왔다"고 꼬집었다. 이어 "삼성이 진정으로 반올림과 피해자와 대화하려는 진심이 있다면 사실을 호도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와 정정보도를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반올림은 "삼성이 진정으로 피해자 가족과 대화할 생각이 있다면, 두 가지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공식적인 답변을 하라"고 촉구했다. 삼성이 이러한 반올림의 공개요구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시사>와 <교차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기사에 한 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삼성, #백혈병, #아산시, #온양공장, #탕정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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