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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일(수)은 제19대 국회를 4년 동안 이끌어갈 선량들을 뽑는 날이다. 이름 하여 '4·11총선'. 필자는 제8대 총선(1971년 5월) 때 투표장을 처음 찾았다. 국민의 소중한 권리인 참정권(參政權)을 행사한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들기도 했는데, 벌써 열두 번째다.

여야 정당들은 후보 경선과 공천 과정에서 혼선을 거듭했다. 그럼에도 4·11총선에서는 이명박 정권의 몰염치한 불법 민간인사찰을 속속들이 밝혀내고, 치솟는 물가에 불안해하는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줄 인물이 대거 당선되어 여의도로 진출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동물원 구경만큼이나 재미있던 선거 유세장

제 13대 대선(1987)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 유세 유세장(군산 월명종합운동장) 풍경.
 제 13대 대선(1987)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 유세 유세장(군산 월명종합운동장) 풍경.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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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철이 돌아오면 타임머신을 타고 아련한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하는 두 인물이 있다. 주인공은 옛 고려제지(주) 김원전(1918~2001) 사장과 보사부장관(1960)을 지낸 김판술(1909-2009) 전 의원. 그들은 1950년대 후반 군산의 선거판을 뜨겁게 달구면서 수많은 풍자와 유행어로 시민을 울리고 웃겼다. 유권자들에게 실망과 희열을 맛보게 했던 것.

제4대 총선(1958년 5월) 때 김원전은 군산지역 자유당 후보로 출마, 재선에 도전하는 민주당 김판술 의원과 치열한 선거전쟁을 펼쳤다. 두 사람은 고향동네에 있던 공설운동장(일출운동장)에서 유세를 자주 했다. 우리는 아저씨들이 '옳소!'와 '박수' 경쟁을 벌이다가 멱살 잡고 싸우는 진풍경과 단물장수, 아이스케이크 장수 등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유세를 앞두고 공설운동장은 부잣집 잔치마당 분위기였다. 아침부터 차일이 쳐졌으며 떡장수, 팥죽장수, 막걸리 장수, 국수 장수 등이 한쪽에 좌판을 벌여놓고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때 묻은 수건을 둘러쓴 아주머니가 새카만 손으로 풀빵 굽는 모습도 군침을 삼키면서 지켜보던 아이들에게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찰떡과 구수한 멸치국물 냄새 가득한 선거유세장은 더없는 눈요깃거리였다.

하얀 광목 두루마기를 걸친 시골 할아버지가 30환짜리 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로 허기를 채우고 "어험, 자~알 먹었소!"라고 양반 기침을 인사에 곁들이며 수염에 묻은 국물을 손으로 닦으면서 일어나는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신문지를 깔고 앉아 장죽을 입에 물고 후보 유세를 경청하는 노인들의 다양한 표정도 새롭고.

땜장이 아저씨가 고무신이나 금 간 옹기그릇을 때우는 모습도 신기하게 바라보고, 길을 걸으면서도 어른들이 쓰고 다니는 중절모자, 밀짚모자, 대박모자, 갓 등을 먼저 발견하기 시합을 즐겨하던 시절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유세장은 창경원(창경궁)의 동물원 버금가는 구경거리였다.

1950년대 사회상 반영하는 유행어 '먹고 보자 김원전, 찍고 보자 김판술!'

한때는 국내에서 소비되는 신문용지의 30% 이상을 생산했던 고려제지(주) 사장 김원전 후보는 해마다 연말이면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달력을 집집마다 돌렸다. 한 장으로 된 달력도 구경하기 어렵던 시절, 우리 집 안방 벽에는 1년 내내 붙어 있어 반세기 넘게 지난 지금도 오동통 후덕하게 느껴졌던 그의 40대 초반 모습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1987년 군산월명종합경기장에서 김대중 후보 지원유세를 하는 김판술 전 의원
 1987년 군산월명종합경기장에서 김대중 후보 지원유세를 하는 김판술 전 의원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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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로 소문난 김원전 후보는 보란 듯 막걸리를 대접하고, 돈 봉투를 돌렸으며 김판술 후보는 발로 뛰면서 맨입으로 지지를 호소했다. 그때 나온 유행어가 '먹고 보자 김원전, 찍고 보자 김판술!'이었다. 돈을 얼마나 뿌리고 막걸리를 얼마나 얻어 마셨으면 그런 유행어가 아이들 세계에서까지 유행되었겠는가. 

유행어가 말하듯 당시 선거판은 현금은 물론 막걸리와 고무신이 공개적으로 오갔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여성에게는 고무신을 남자에게는 막걸리를 대접하여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라는 말도 그때부터 회자되었다. 아이들은 음식을 먹거나 딱지치기를 할 때도 '먹고 보자 김원전, 찍고 보자 김판술'을 구호처럼 앞세웠는데, 가난하고 혼탁했던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후보 기호를 작대기로 표시한 선거 벽보 (1967년 4월 4일자 중앙일보 1면)
 후보 기호를 작대기로 표시한 선거 벽보 (1967년 4월 4일자 중앙일보 1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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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시골은 유권자의 문맹률이 70%를 넘어 기호를 아라비아숫자를 쓰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은 작대기로 표시했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올 뿐인데, 1956년 대통령선거 때는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이용해서 민주당 신익희 후보 '작대기 두 개'에 하나를 더 그어 이승만 후보 기호로 변조하고, 장면 후보의 '작대기 하나'에 한 개를 더 그어 이기붕 후보 기호로 변조하는 등 기호모략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 때부터 작대기를 사용했는데 후보가 난립할 때는 겹쳐진 것처럼 그어진 기호를 확인하느라 혼잡을 떨었다고 한다. 그러한 진풍경은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1958년 총선은 '부정선거 백화점', '부정선거 축제'라 불릴 정도로 관권과 금권에 폭력배까지 동원되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투개표 때도 야당 참관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개표하는 '닭죽 개표', 붓 뚜껑을 두 번 찍는 '쌍가락지 표', 여당표 뭉치에 야당 표나 무효표를 끼워 넣는 '샌드위치 표', 전등을 끄고 표를 바꿔치기하는 '올빼미 개표' 등 부정수법도 가지가지였다.

선거철에는 비행기와 차량을 동원해서 삐라(전단)를 뿌렸는데, 배고픈 줄 모르고 쫓아다니며 한주먹씩 주웠다. 삐라를 어른들께 드리고 칭찬 받고, 화장실에서도 사용하고, 딱지를 만들어 놀기도 했던 그 시절이 새롭게 느껴진다.

경찰 감시 속에 결혼식 치르기도

성격이 활달하고 서민적이었던 김판술은 뱃사람과 중매인이 많이 살았던 중동·금암동 주민들과 잘 어울렸다. 해방 후 초대 군산수협 조합장(1945~1949)을 지내면서 선창가 사람들과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 그러나 관권개입이 극에 달했던 제4대 총선 때 군산지역은 김원전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김원전에게 막걸리 대접을 받고도 김판술을 찍었던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투표 결과를 접하고 무척 마음 아파했다. 앞집 대청에서 막걸릿잔을 돌리며 서로 위로하던 동네 어른들 모습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김판술은 자유당 시절 3대 국회의원을 지냈음에도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59년 겨울 모교인 군산여상 강당에서 김판술 전 의원의 주례사를 들으며 결혼식을 올렸다는 이금선(74) 할머니는 그날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철공소를 운영하던 친정아버지랑 어업에 종사하시던 시아버지 될 어른이랑 친하게 지내셨던 김판술 의원이 주례였지. 그때만 해도 그 양반(김판술)이 경찰의 감시를 받는 줄 몰랐어. 그런데 결혼식이 끝나니까 누군가가 경찰 수십 명이 밖에서 보초를 선다는 얘기를 하더라고. 깜짝 놀라서 밖으로 나오니까 정말로 학교 주변에 경찰들이 쫙 깔린 거야, 아무것도 모르던 때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이제 생각하니까 경찰의 감시하에 결혼식을 치렀더라고···."

 1959년 겨울 김판술 전 의원이 군산여상 강당에서 결혼식 끝나고 신랑·신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59년 겨울 김판술 전 의원이 군산여상 강당에서 결혼식 끝나고 신랑·신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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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국회의원선거, #김판술, #김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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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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