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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2012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영화 <건축학 개론>의 한 장면
 영화 <건축학 개론>의 한 장면
ⓒ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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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정치가 닮았다면 믿겠는가. 인정하기 싫을지 모르지만 몇 가지 점에서 그렇다. 절반쯤은 거짓이라는 점이 그렇고, 현실이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사랑이든 정치든 대개는 지난 선택을 후회하게 된다는 점이 닮았다. 그렇게 한두 번 실패를 겪고 나면 마치 모든 것을 다 깨달은 듯한 착각에 빠지지만 여지없이 또 속고 만다. 그래서 사랑도, 정치도 평생을 겪는다 해도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아가는 데는 둘 모두가 필요한 것을.

나라가 온통 정치 이야기로 떠들썩해 보이는 요즘, 실은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이야기 따위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사랑 이야기 하나가 가만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퍼져나가고 있다. 첫사랑을 다룬, 아니 첫사랑을 닮은 영화 <건축학개론>(2012)이 그것이다.

지난 22일에 첫 선을 보인 이 영화는 3일 만에 전국에서 56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으며 순식간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더니, 7일 째인 28일에는 92만 명을 돌파하며 100만 명을 가뿐하게 뛰어넘었다.  머지않아 곳곳에서 '첫사랑 앓이'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신도 '첫사랑 앓이'를 피해갈 수 없을지 모른다.

이런 가슴 시린 영화를 두고 굳이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나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을, 정치도 필요한 것을 말이다.

서툴기만 하던 가슴 시린 첫사랑의 기억

잠깐 영화 속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영화를 보려는 이들을 위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참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
 영화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

아마도 스무 살 가을 무렵, 대학 1학년이던 두 사람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음대에 다니던 여학생과 건축학과 남학생이 하필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것은 여학생이 좋아하던 동아리 선배가 그 수업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여학생이 좋아하던 키 크고 세련되고 돈까지 많던 그 선배는, 별로 내세울 것 없던 동갑내기 남학생의 같은 과 선배였다. 둘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다행히 둘은 한두 번 우연히 마주친 뒤 곧 가까워졌다. 둘은 같은 동네에 살았고, 나이가 같았고, 여학생은 어머니를, 남학생은 아버지를 어릴 적에 떠나보냈다. 처음으로 나란히 앉은 자리에서 '동갑인데 왜 말을 놓지 않느냐'며 여학생은 남학생을 타박했고, 남학생은 몇 번이고 알았다면서도 차마 말을 놓지 못했다. 아무튼 둘이 그럴 수밖에 없던 수백 가지 이유들이 있었고, 그래서 둘은 곧 가까워졌다.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의 첫사랑은 위태롭기만 했다. 여학생은 여전히 동아리 선배 주변을 떠나지 못했고, 그 선배 역시 여학생 주변을 맴돌았다. 그 선배가 바라는 것은 그저 여학생이 술에 잔뜩 취해 자신의 오피스텔 침대 위로 쓰러져주는 것뿐이었지만, 여학생은 그런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여학생에게 그 선배는 따뜻하고도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두 사람의 첫사랑은 그래서 힘들었다.

한 학기 동안의 '건축학개론' 수업이 끝나던 날, 서로에게로 향하던 둘의 마음이 어긋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몇 달을 조심스럽게 키워오던 둘의 첫사랑이 깨져버리고 만 것이다. 사랑에 서툴기만 하던 그 둘은 그렇게 어긋나버린 사랑을 끝내 돌이키지 못했다. 그 작은 상처조차 견뎌내지 못할 만큼 가녀린 그것, 스무 살의 첫사랑은 그래서 눈물겹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결코 달라지지 않을 그 선택의 순간들, 영화는 그렇게 우리들 모두의 아픈 첫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우린 여전히 정치에 서툴지는 않은지

새누리당 박근혜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이 31일 오후 서울 은평구 대림시장을 찾아 4.11 총선 은평구갑에 출마하는 최홍재 후보를 지원하며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이날 박 선대위원장은 선거운동 시작 이후 수많은 유권자와의 악수에 따른 통증으로 붕대를 감고 유세를 펼쳤다.
 새누리당 박근혜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이 31일 오후 서울 은평구 대림시장을 찾아 4.11 총선 은평구갑에 출마하는 최홍재 후보를 지원하며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이날 박 선대위원장은 선거운동 시작 이후 수많은 유권자와의 악수에 따른 통증으로 붕대를 감고 유세를 펼쳤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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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 시절 우리에게 거짓을 가려낼 줄 아는 눈과 귀가 있었다면 우리의 첫사랑은 달라졌을까. 겉만 번지르르한 유혹에도, 그럴듯해 보이는 오해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우리가 조금 더 차갑게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아마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차가울 수 있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었을 테니까. 첫사랑이 모두에게 아프게 남아있는 이유이자, 오늘 우리가 첫사랑을 닮은 이 영화 한 편을 두고 가슴이 설레는 이유이기도 하다.

29일부터 19대 총선의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정치는 사랑만큼 우리들 가슴을 설레게 하지는 않으니 조금은 차분하게 거짓을 가려내야 하겠다. 물론 생각만큼 간단치는 않다. 앞에서 절반쯤은 거짓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조차도 장담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선거판을 가득 채운 무수한 말들 속에서 한줌의 진실을 길어 올리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가령, 한미FTA를 밀어붙이면서 재래시장을 돌며 위로를 전하는 모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새누리당은 재래시장 상인을 비롯한 중소 자영업인들을 보호한다며 '인구 30만 명 미만의 도시 50개를 대상으로 5년간 대형 유통점들의 진입을 금지한다'는 정책 공약을 발표했지만, 이는 외국계 대형 유통점들의 시장 접근권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한미FTA와 충돌할 수 있다. 외국계 유통업체들이 이런 법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한미FTA라는 무시무시한 칼을 뒤에 감추고 웃음 띤 얼굴로 손등을 두드리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른바 경제 민주화를 둘러싼 조치들도 마찬가지다. 한미FTA가 재벌과 대기업들에게 오히려 부를 더 몰아주게 될 것이란 우려가 높은 상황에서 공정한 시장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주장은 어딘가 모르게 공허하게 들린다. 한미FTA가 가져올 대자본 우위의 새로운 경제 체제는 새누리당이 공약으로 내건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나, 기업집단의 내부 거래에 대한 처벌 강화 등의 '사소한' 규제들을 집어삼킬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더 많은 유혹과 오해의 말들이 우리들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볼 일이다.

우리는 과연 정치적으로 성숙해졌을까

아마 2007년의 대선과 그 이듬해의 총선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스무 살 무렵, 키 크고 세련되고 돈까지 많던 그 선배의 웃음 뒤에 가려진 비릿한 욕망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들 대부분은 거짓을 가려내지 못한 채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지난 몇 년을 쓰리게 곱씹어야 했던 '정치의 상처'다.

어김없이 시간이 흘러 다시 돌아온 두 번의 선거를 앞에 두고 있는 오늘, 우리는 과연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해졌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물론 무엇이 더 올바른 선택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난번처럼 땅을 치고 후회할 만한 선택은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치도 사랑만큼이나 크고 무거운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끝으로 곧 눈물 겨운 첫사랑의 아픔을 겪게 될 스무 살 무렵의 청년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어느 순간 정치가 사랑보다 절실할 때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 첫사랑의 상처가 못 견디게 아프더라도 너무 쉽게 정치를 포기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첫사랑의 상처와 달리 정치가 주는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잘 아물지 않는 법이다.


태그:#4.11총선, #건축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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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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