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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그러나 사실은 과거에 깊은 인연이 있었던 일이 우연한 기회에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그 둘을 따로따로 떼어내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그 둘을 엮어보면 흥미로운 얘기가 전개되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우연'이란 없거든요.

삼성그룹의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주먹계의 전설로 불린 '장군의 아들' 김두한. 한 사람은 부잣집 맏아들로 태어나 온갖 호사에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도련님'으로 컸습니다. 또다른 한 사람은 초년 시절 '거지왕초' 생활을 전전하면서 부랑아들과 어울려 싸움질로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따라서 얼핏 보면 두 사람은 공통분모는커녕 전혀 '인연'조차 없어 보입니다. 오늘은 이 두 사람의 '뜻밖의 인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최근 삼성가(家) 형제들의 재산소송 사건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이맹희씨가 여론의 초점을 모았습니다. 알다시피 이맹희(81)씨는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으로 장남으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맏형이자 이재현 CJ 회장의 부친입니다. 현재 중국에 머물고 있는 맹희씨는 최근 동생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냈는데 그 액수가 무려 2조 원대입니다. 인지대만도 22억5000만 원에 달하는 좀처럼 보기드문 거액 송사랄 수 있습니다.

맹희씨가 서울중앙지법에 낸 소장에 따르면, 이씨가 요구한 것은 삼성생명 주식 824만여 주를 비롯한 그동안의 이익 배당금 등인데 현재까지 확정된 소송액수는 7000여억 원입니다. 여기에 에버랜드의 삼성생명 주식 875만주 전체를 달라고 소송을 확장할 경우 그 금액은 2조 원대에 육박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얘깁니다.

그의 요구는 선대 창업주가 남긴 삼성의 여러 차명주식에 대해 자신의 몫을 돌려달라는 것인데 이는 지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관련 폭로와 특검 수사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습니다.

지난 2월 중순, 이맹희씨 얘기가 언론의 주목을 받을 무렵 돌연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얘기도 화제가 됐습니다. 내용인즉 그의 묘가 충남 보령에 있는 그의 부친 백야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묘 곁으로 조만간 이장될 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보령시는 경기 양주시 장흥 신세계공원에 있는 그의 묘를 김좌진 장군의 묘역 내로 옮길 수 있도록 최근 충남도에 문화재 현상 변경을 신청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는 김두한의 딸이자 새누리당 소속 김을동 의원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은 1930년 서거 후 현지(북만주)에 안장됐는데 부인 덕분에 일찍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서거 3년 후인 1933년, 그의 부인(오숙근)은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호미 하나만 들고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물어물어 남편의 무덤을 찾아낸 부인은 밤중에 몰래 남편의 무덤을 파서 뼈만 골라내 백지에 싼 후 이불보따리를 가장해 고향에 들여왔습니다. 그러고는 그의 고향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남의 산소에 가매장을 했는데, 1957년 김두한이 지금의 장소로 이장했습니다. 그 김두한이 조만간 부친 곁으로 갈 예정입니다.

충남 보령에 있는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소와 묘비
 충남 보령에 있는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소와 묘비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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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희와 김두한, 그들의 인연은 이때 시작됐다

이맹희와 김두한. 이 두 사람은 대체 언제,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요? 그 연결고리는 바로 1966년 5월 24일 발생한 이른바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입니다. 그해 9월 15일 <경향신문>의 특종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이 밀수사건은 국내 굴지의 삼성재벌이 사카린을 밀수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습니다. 차차 소개하겠지만 당시 이 밀수사건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이맹희씨였고, 국회에서 맹공을 퍼부은 사람이 바로 김두한 의원이었습니다. 

그 무렵 삼성은 경남 울산에 '한국비료' 공장을 짓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2259부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난 것입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사카린은 설탕 대용으로 식료품의 단맛을 내는 데 쓰이던 주요 원료였습니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그해 6월 1059부대를 압수하고 벌금 2000여만 원을 부과했습니다. 그러나 <경향신문>의 보도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치달았습니다.

당시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三井)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000여만 달러까지 들여온 상태여서 국민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연일 언론에서 이 사건의 배후 등에 대해 보도하자 여론에 떠밀린 박정희 대통령은 9월 19일 밀수사건에 대해 전면 재수사를 지시했습니다. 국회는 21일부터 본회의를 열어 관계 장관들을 불러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소재 등을 추궁하는 한편 야당은 내각총사퇴를 요구했습니다.

9월 22일, 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각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틀째 대정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김대중 의원에 이어 마지막 질의자로 단상에 오른 사람은 무소속의 김두한 의원이었습니다. 김 의원은 발언대에 오르면서 테이블에 끈으로 묶은 네모 박스 하나를 올려 놓았습니다.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정 총리 이하 각료들은 그 상자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면서도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 눈치였습니다.

김두한 의원이 발언대에 오물이 든 상자를 올려놓은 채 연설을 하고 있고 정일권 총리가 이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김두한 의원이 발언대에 오물이 든 상자를 올려놓은 채 연설을 하고 있고 정일권 총리가 이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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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김두한 의원이 입을 열었습니다.

"배운 게 없어서 말은 잘 할 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할 줄 모르는 행동은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어 그는 자신의 과거 투쟁경력 등을 소개한 후 밀수사건에 대해 일갈했는데, '국회의사록'에 기록된 그의 발언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두한은 네모 박스를 풀어 국무위원석으로 내용물을 던졌습니다. 그 속에 든 것은 다름 아닌 '똥물'이었습니다. 제일 가까이 앉았던 정일권 총리는 거의 온몸을 인분으로 뒤집어썼으며, 다른 장관들에게도 똥물이 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본회의장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고, 장내에는 똥냄새로 가득했습니다. 이날 김두한 의원이 통에 담아온 똥물은 선열들의 넋이 서린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퍼왔다는 얘기도 있고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퍼온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한편, 전대미문의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국회 본회의가 중단된 채 본질은 온데간데 없고 얘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은 김 의원의 징계를 요구하였고, 국회 법사위에서는 김 의원의 제명을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잃게 되었고 국회의장 모욕,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회의장에게 특별공한을 보내 유감을 표했고, 전 국무위원은 총리공관에 모여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였습니다.

사태가 확산되자 이병철 사장은 문제의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발표한 후 사업에서 손을 떼고 2선으로 물러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당시 헌납 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되자 개각 1주일 만인 1967년 10월 11일 이병철 사장은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습니다(사기업이었던 '한국비료'가 국영기업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대검찰청은 9월 24일 이병철 사장의 차남인 이창희 한국비료 상무 등을 구속하고 10월 6일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매듭지었습니다.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 그 내막은...

이맹희 씨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사카린 밀수사건'은 자신이 지휘했다고 밝혔다.(한겨레, 1993. 6. 29)
 이맹희 씨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사카린 밀수사건'은 자신이 지휘했다고 밝혔다.(한겨레, 1993. 6. 29)
ⓒ 한겨레 지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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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사건이 단순 '밀수사건'이 아니라 당시 박정희 정권이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이병철 사장과 공모한 '조직적 밀수사건'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그리고 그 폭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삼성 황태자' 이맹희씨였습니다. 이씨는 1993년 펴낸 <이맹희 회상록-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관련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 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 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말하자면 이병철과 박정희가 서로 '짜고 친 고스톱'이었던 셈입니다. 즉 밀수품을 내다팔아 그 중 일부는 정치자금으로 또 일부는 삼성의 내부자금으로 쓸 요량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생전에 이병철은 이런 내용을 부인하였으며, 오히려 억울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1986년에 펴낸 <호암자전>에서 그는 "이 사건이 정치문제화 되고 일부 매스컴이 이에 가담하여 끈질긴 삼성 공격을 되풀이했던 이면에는 당시의 복잡한 정계사정이 있었다"며 "삼성이 마치 국가적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은 정도를 넘는 일"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병철 사장이 만든 '중앙일보'...'삼성일보'라 불려

이병철 사장
 이병철 사장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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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주목할 점은 당시 이병철 사장이 1년 전에 자신이 창간한 <중앙일보>(1965년 9월 22일 창간, 초대사장 이병철)를 적극 '활용'한 점입니다. <중앙일보>는 자매회사인 <동양방송>과 함께 적극적으로 이병철과 삼성 비호에 나섰으며, 기획기사와 사설을 통해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시 중앙매스컴 집단은 <경향신문>이나 <동아일보>의 논조와는 정반대 주장을 펴며 독자들을 기만했습니다. 이병철 사장이 중앙매스컴을 만든 것은 바로 이런 목적에서였습니다. 그의 전기 <호암자전>에는 <중앙일보> 창간 배경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나는 4·19와 5·16을 거치며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 생각한 적이 있다. …기업 활동에서 얻은 수익으로 세금을 납부해 정부운영과 국가방위를 뒷받침하는 경제인의 막중한 사명과 사회적 공헌은 전적으로 무시되고 부정축재자라는 죄인의 오명까지 쓰게 됐다. 이같은 경제인의 힘의 미약함과 한계를 통감한 것도 정치가가 되려고 한 동기였다. 그러나 1년여를 숙려한 끝에 정치가로 가는 길은 단념했다. 그런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

그러면 '정치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중앙매스컴은 당시 사카린 밀수사건을 어떻게 비호했을까요? 먼저 방송이 나섰습니다. <동양방송(TBC)>의 동양TV는 9월 18일 오전 교양프로그램 '일요응접실'에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석초씨와 서울대 김기두 교수 등을 출연시켜 삼성을 비호했습니다. 당일 저녁 7시 '석양 속의 데이트' 프로에서는 역시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승한씨 등이 나와 삼성을 옹호했습니다. 동양라디오도 그 무렵 아침저녁으로 삼성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중앙일보>는 19일자부터 본격적으로 기사와 사설에서 삼성을 감쌌습니다.

"재벌과 밀수를 등식적으로 규정한다든지 심지어는 재벌과 밀수, 그리고 정부가 일련의 관계를 갖는 함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여론이 비등되고 있는 데에는 논리의 비약과 사회체제의 부정이란 측면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방향으로 일반적인 사고가 굳어질 때 파생될 문제를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중앙일보> 9월19일자 사설 '재벌이란 무엇인가')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을 1면 머릿기사로 다룬 <동아일보> 기사(1966. 10. 5)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을 1면 머릿기사로 다룬 <동아일보> 기사(1966. 10. 5)
ⓒ 동아일보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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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당시 <동아일보>는 <경향신문>과 함께 연일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기사와 사설 등에서 삼성과 박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동아일보>는 나중에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개발 문제를 놓고 삼성을 비판하면서 <중앙일보>와 대리전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가 삼성을 찌르는 '창'이었다면 <중앙일보>는 늘 삼성의 '방패'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때 둘은 언론계에서 '앙숙'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동아일보>도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삼성을 향한 <동아일보>의 붓칼은 무딜 대로 무뎌져 있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동아일보> 역시 <중앙일보>처럼 삼성과 사돈 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의 동생 김재열씨는 이건희 회장의 둘째사위임). 단지 사돈기업이라는 이유 때문에 <동아일보>가 삼성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면 <동아일보> 역시 조만간 과거 <중앙일보>가 들었던 '삼성일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태그:#이맹희, #김두한, #삼성사카린밀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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