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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화상 사리탑
 장유화상 사리탑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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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화상은 이름 뒤에 '화상'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승려였다. 본명이 허보옥인 장유화상은 예로부터 김해를 지켜주는[鎭] 산(山)으로 우러름을 받아온 신어산 중턱의 은하사(銀河寺)와, 장유면 대청리 용지봉의 장유암을 창건한 인물이다. 특히 장유암 대웅전 바로 뒤에는 그의 사리탑도 남아 있다. 돌로 만들어진 팔각의 이 사리탑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31호로, 가락국 8대임금인 질지왕 때(451∼492 재위) 장유암을 재건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지금 남아 있는 사리탑 자체를 가야인의 작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사리탑 앞의 안내판은 '제작 수법으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의 작품으로 보인다'고 해설하고 있다. 이는 그 당시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파사탑과 비교를 해보면 누구든지 바로 수긍할 수 있다. 아유타국의 공주가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배에 싣고 온 파사탑이 아득한 옛날의 순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견줄 때, 이 사리탑은 도저히 그것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허황후의 오빠 장유화상의 사리탑이 있는 장유암

그러나 장유화상이 수로왕에게 불교를 전하고, 그가 은하사와 장유암을 창건하고, 수로왕 본인도 자신의 어머니를 위하여 김해시 생림면 생철리 무척산에 모은암(母恩庵)을 지었다고 하지만, 그 당시에 이미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삼국유사도 '수로왕이 황후를 맞이하여 함께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지만 그때까지도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하지는 않았다.

(중략) 이 지방 사람들이 불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駕洛國本記(가락국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 2년(452)에 이르러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유암 전경
 장유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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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년이라면 중국 동진(東晉)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374년(소수림왕 2)보다도 80년가량 뒷날이다. 아도와 동일 인물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는 묵호자(墨胡子)가 신라 일선군(지금의 경북 선산)에 들어와 불교를 전한 눌지왕 시기(417∼458)와 견주더라도 가장 후기에 해당된다. 질지왕이 명월산에 왕후사를 창건한 때에는 가야 사람들도 불교를 믿기 시작한 초기였다는 말이다.

탑은 불교의 기도처, 법당보다 먼저 생겼다

파사석탑은 가야에서 만든 것이 아니다. 멀리 바다를 건너는 허황옥을 지켜주기 위해 인도 아유타국에서부터 돌배에 싣고 온 '완성품'이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돌로 만든 탑을 배에 실었을까?

때는 지금부터 2천년 전, 그 당시의 항해술로는 인도에서 가야까지 오는 데에 3개월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손바닥만한 배로 3개월이나 망망대해를 여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 큰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버리면 모두가 물귀신이 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탑을 배에 실었다.

탑은 본래 불교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다. 시종들은 멀고 먼 바닷길을 오면서 줄곧 파사탑을 행해 절을 하고 또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풍랑(風浪)을 진압(鎭壓)하여 허황옥을 안전하게 모시게 해주십사, 그렇게 기도를 올리려고 파사탑을 배에 실었다는 말이다. 파사탑은 곧 진풍탑(鎭風塔)이었다.

과연 파사탑은 허황옥을 지켜주었다. 무서운 풍랑을 이기고 마침내 가야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던 수로왕과 결혼했고, 150년 동안 나라를 함께 다스렸다.

수로왕비릉 앞의 파사탑 비각
 수로왕비릉 앞의 파사탑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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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릉에는 호석이 필요 없다

파사탑은 허황옥의 분신(分身)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지금 수로왕비릉 앞에 놓인 파사탑을 보면서 '제 자리를 찾았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인도→ 호계사→ 수로왕비릉, 이것이 파사탑의 인생 경로이다. 인도에서 건너와 처음에는 김해 시내 중심가의 호계사에 놓였는데, 그 절이 없어지면서 1873년(고종 10)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거의 1,700년만에 허황옥의 품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허황옥을 지키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파사탑,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역사와 전설의 탑이다.

파사탑에서 10m 정도 계단을 오르면 수로왕비릉에 닿는다. 앞으로 경사진 구릉에 놓인 수로왕비릉은, 잔디밭에 앉아 말없이 김해 시내를 굽어살피고 있는 고운 할머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녀의 등 뒤로는 소나무들이 동쪽, 서쪽, 북쪽의 삼면을 겹겹으로 나란히 서서 거칠게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가로 16m, 높이 5m 정도인 수로왕비릉은 주위에 호석(護石)을 두르지 않고 있다. 호석은, 경주 금산원(金山原)의 김유신묘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무덤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묘 하단을 사방으로 둘러가며 큰 돌로 받쳐놓는 시설이다. 둘레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채 맨 얼굴로 앉아 있는 수로왕비릉은 '파사탑이 있는데 호석이 왜 또 필요해?'하고 반문하는 듯한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므로 왕비릉 앞에서 너무 지나치게 장식이 없어 쓸쓸하고 가난해 보인다는 기우는 금물이다. 묘 앞에 탑이 서 있는데, 그 무슨 황당한 오해인가. 탑은 불교에서 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법당보다도 먼저 생긴 것이니, 뒷날 파사탑이 옮겨올 수로왕비릉에 호석 따위를 만들지 않은 금관가야인들의 처사는 아주 현명한 조치였다고 하겠다. 

수로왕비릉과 파사각(오른쪽 비각)
 수로왕비릉과 파사각(오른쪽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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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이 죽자 국민들 '땅이 꺼진 듯 슬퍼했다'

왕비릉이 수로왕릉과 나란히 있지 않고 외따로 놓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잠깐 따져보니 그것은 우문(愚問)이다. 허황후는 수로왕보다 10년 일찍 죽었다. 그러므로 '수로왕은 왜 왕비릉 옆이 아닌 시내에 혼자 묻혔을까?'는 가능한 질문이지만, '왕비는 왜 수로왕릉 옆이 아닌 구지봉 기슭에 홀로 안장되었을까?'는 있을 수 없는 궁금증에 지나지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왕비가 죽자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그녀와 연관이 있는 장소들에 새로운 이름들을 지어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녀가 비록 바다를 건너온 타국의 공주였지만 평소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진정한 '국모(國母)'였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즉, 가야의 사람들은 그녀가 개국(開國)의 성지(聖地)인 구지봉에 묻히기를 열망했다. 그것이 바로 허황후가 구지봉 언덕에 묻힌 까닭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국가사적 429호인 구지봉 가는 능선 위에 누워 있다.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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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기록에는 허황옥과 수로가 한 무덤에 합장되지 않은 까닭도 은근히 들어 있다. 허황후가 죽자 '온 나라 사람들이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였다'는 기사는 그녀가 수로왕 못지않게 국민들로부터 숭앙을 받은 정치적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수로왕이 죽었을 때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듯 서러워하여 허황후가 돌아가던 날보다 더했다'고 기록한 문맥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문장은 겉만 읽으면 백성들이 수로왕 때 더 슬퍼했다는 것이지만, 속을 읽으면 왕비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슬픔이 너무나 컸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로왕 붕어와 허황후 별세를 서로 비교할 까닭이 없다. 허황후는 수로왕과 부부였지만, 그 스스로도 왕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뒷날 아들과 신하들이 둘을 합장하지 않고 따로 능을 만들었다는 추론이다. 

부부의 아들들이 뒷날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도 두 사람의 합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한 가지 설명이 될 수 있다. 장남은 왕위를 이어 거등왕이 되지만 차남과 삼남은 어머니의 성씨를 이어받아 허씨가 된다.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가 된다. 4∼10남은 세속과 인연을 끊었으니 논외로 하고, 1∼3남만 따져보자. 장남은 김씨, 2남과 3남은 허씨이니 거의 대등하지 않은가. 아버지 수로와 어머니 허황옥은 그만큼 금관가야 백성들 사이에 대등하게 인정되었고, 그 결과 부부 사후 두 개의 '왕릉'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12년 2월 중순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수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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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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