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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심이 되어 눈사진 찍는 늙은 애들
 동심이 되어 눈사진 찍는 늙은 애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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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엔 다른 친구들이다. 역시 승합차 한 대에 세 쌍의 부부가 함께했다. 내가 남도여행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일행들은 신나게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동해, 곰배령을 경유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동안의 여행으로 피곤했었나 보았다.

양평을 지나면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일행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한쪽 산자락이 온통 눈밭이었다. 지역은 어디쯤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굽이도는 산길은 오가는 차량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길가에 차를 세웠다. 일행들이 모두 차에서 내렸다. 바람결이 싸늘했다.

"우와! 이 눈밭은 아직 아무도 들어온 사람이 없나봐, 발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잖아?"
"유식한 말로 전인미답의 순결한 눈밭이네 허허허"

도로 옆의 작은 개울을 건넌 곳에 제법 널따란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이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전인미답의 눈밭. 일행들이 그 눈밭으로 뛰어들었다.

"우리 눈 사진 한번 찍어요, 자 이렇게 나처럼 엎드려 봐요?"

친구 부인이 앞장서 눈밭으로 뛰어들어 눈밭에 엎어졌다. 두 다리를 쭉 펴고, 그러자 다른 친구 부부도 함께 엎드렸다.

 눈덮인 백두대간 준령들
 눈덮인 백두대간 준령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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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얼굴을 들면 어떻게 해요? 얼굴을 눈 속에 푹! 이렇게 해야 눈 사진이 찍히지."

처음에 눈밭에 뛰어든 친구 부인이 시범을 보여준다.

"뭐 하세요? 찍사님, 사진 찍지 않으시고."

내게 하는 말이었다. 잠이 아직 덜 깬 어설픈 몸짓으로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찰칵! 그렇게 눈 사진을 찍고 일어나던 친구 부인이 갑자기 다른 친구에게 눈을 퍼붓는다.

산골짜기 눈밭에서 눈싸움 벌이며 동심으로 돌아간 일행들

"앗 차가워, 갑자기 기습 공격했겠다. 그럼 어디…."
"좋아, 눈싸움 한번 붙어보자 이거지?"

갑자기 눈싸움이 벌어졌다.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 눈밭이 나이 든 부부 두 쌍의 눈싸움판이 된 것이다. 부부대항 눈싸움이었다. 그러나 눈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눈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 눈이 보송보송한 탓에 뭉쳐지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몇 번인가 두 손바닥으로 퍼 올리듯 상대방에게 눈을 끼얹었지만 뭉쳐지지 않는 눈은 눈싸움이 되지 않았다.

"에이, 재미없다, 눈이 뭉쳐져야지?"
"하하하하, 오랜만에 해보는 눈싸움, 그래도 재밌는데 조금 더할까?"
"호호호호, 이제 그만. 눈이 뭉쳐지지 않아서 정말 재미가 없어요"

초로의 부부들이 서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깔깔거리며 웃는다. 나이들이 모두 60대 초중반, 옛날 같으면 틀림없는 노인들이다. 그런데 호젓한 산골짝 눈밭을 만나 동심이 발동한 걸까? 모두 철없는 애들이 되어 있었다. 눈싸움판 벌이고, 깔깔거리고, 그야말로 잠깐 동안 싱겁게 끝난 눈싸움이었지만 몹시 재미있었다는 표정들이었다.

구불구불 2차선 도로는 구간마다 모습이 달랐다. 양지 쪽은 눈이 녹아 보송보송 길이 좋았지만 응달진 곳은 길가에 쌓여 있는 눈이 담벼락처럼 보인다. 다행이 도로바닥은 그리 미끄럽지 않았다. 멀리 가까이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들과 능선들은 온통 새하얀 눈빛깔이다.

 사진 찍으려 내렸다가 교통사고 당할 뻔한 골짜기의 갈대
 사진 찍으려 내렸다가 교통사고 당할 뻔한 골짜기의 갈대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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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여기 잠깐 세워 봐요? 개울가의 서리꽃이 장관인데."

카메라를 들고 온 일행 부인이 갑자기 차를 세운다. 산자락이 불쑥 튀어나와 굽이도는 내리막 길가의 개울이었다. 그런데 내려보니 서리꽃이 보이지 않는다. 같은 골짜기 갈대숲이지만 태양빛을 직접 받는 앞면은 서리꽃이 사라지고 없었다. 뒤쪽으로 잠깐 뒤돌아 걸어가자 예의 서리꽃이 보인다. 그런데 역광이어서 사진 찍기가 마땅치 않았다.

인적 드문 산골짜기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을 뻔하다

"자! 갑시다,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을 것 같네요."

일행 부인에게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을 때였다. 뒤쪽에서 갑자가 승용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일행의 부인이 길을 건너고 있는 순간이었다. "앗!" 하는 비명과 함께 검은색 승용차가 끼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멈칫했다가 휙 지나갔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일행의 부인이 도로에 주저앉아 있었다. 산굽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승용차를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거의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에 너무 놀라 주저앉은 것이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아고 놀래라!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요."
"어디 다치지 않았죠? 정말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너무 놀라 식은땀을 흘리는 일행 부인을 부축하여 다시 승합차에 올랐다. 일행 부인은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 호젓한 산길에서 방심하며 도로를 건너다가 큰 사고를 당할 뻔한 것이다. 놀란 것은 우리들 뿐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를 스쳐 지나간 승용차의 운전자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러게 도로에선 아무리 차량통행이 없어도 조심해야 된다니까."
"그래도 천만 다행이네. 하마터면 누구 늘그막에 홀아비 될 뻔했는데."

영문도 모르고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일행들이 농담을 했다. 그렇지만 사고를 당할 뻔했던 부인의 남편인 일행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표정이었다. 길은 여전히 구불구불, 길가의 풍경도 변화무쌍했다.

 얼버붙은 배추밭
 얼버붙은 배추밭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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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길이 곰배령 가는 길 맞아?"
"아닌 것 같은데,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어쩌겠어? 그냥 가야지."
"맞아, 그냥 가자고, 우리들의 목적지는 동해지 곰배령은 아니잖아. 이 겨울에 곰배령에 꼭 가야할 이유도 없고?"

나이 들었다는 것이 이럴 때는 참 좋다. 굳이 바쁠 것도 없고, 여행 경유지가 바뀌어도 불평도 하지 않는다. 꼭 어디라고 누군가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좋은가. 늘그막 백수들의 여유로움이라고나 할까.

높직한 고개를 넘었다. 고개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휙 지나가며 바라본 안내판에는 계방산이라는 이름이 언뜻 보이는 듯 했다. 그 다음은 이승복 기념관 입구, 이승복 기념관이라면 같은 시기에 군대 생활할 때 그 깊은 눈 속을 헤매며 소위 '공비토벌작전'을 벌이느라 모진 추위를 견디며 죽을 고생을 했던 바로 그 부근이다. 별로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고생스럽던 추억이 있는 곳, 그냥 지나쳤다.

농심도 함께 얼어붙은 배추밭과 파도가 밀려오는 동해 바닷가

길가에 버려진 배추밭들이 즐비하다. 남쪽지방과는 달리 누렇게 말라버린 배추포기들이 처참한 모습이다. 지난해 가을, 배추와 무 파동을 겪으면서 주책없이 수입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오히려 우리 농민들이 애써 경작한 무와 배추들이 밭에서 뽑히지도 못하고 저렇게 얼어 터져 말라버린 것이리라. 저 얼어터진 배추 포기에 농민들의 피눈물도 함께 얼어붙었겠지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눈덮인 빈집
 눈덮인 빈집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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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로 내려가는 길가 밭 가장자리에는 썰렁한 모습의 빈집들도 보인다. 요즘 살기 힘든 도시생활을 접고 귀농하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산골 농촌에는 여전히 빈집들이 많았다. 어쩌다 보이는 산골짝 외딴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는 참으로 정답다. 그렇지만 텅 빈 빈집은 들어가보지 않아도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왜 그리 썰렁하고 쓸쓸할까?

그렇게 막동계곡 입구를 지나고 북평면 아우라지를 지났다. 굽이굽이 백두대간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추운 날씨 속에서도 차창 밖으로 다가오고 멀어지는 자연풍경들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은 우리 조상 대대로 이어지고 물려받은 소중한 민족의 유산이다. 잘 가꾸고 보존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고이고이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들이게 있는 자연 유산이다.

"이쪽엔 보기 싫은 골프장이 눈에 띄지 않아서 좋구만."

일행이 뜬금없이 골프 이야기를 꺼낸다. 젊은 시절에 대형 건설회사 중역과 경영자로 일했던 그였지만 멀쩡한 산을 깎고 파헤쳐 골프장 만드는 모습이 보기 싫어 골프를 하지 않았다는 그다.

"내가 골프를 하지 않고 등산을 좋아하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인 것 같아."
"맞는 말이야. 그래서 우리 등산모임의 환경부 장관이잖아? 정부의 환경장관보다 훨씬 훌륭하지."

일행들의 주고받는 농담이 마냥 정겹다. 골프를 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행은 산에 오를 때마다 쓰레기를 주워 내려오는 친구다. 일행들이 정다워서일까? 창밖의 풍경들도 아기자기하고 정답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몰려오는 파도와 추위도 아랑곳 없는 연인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몰려오는 파도와 추위도 아랑곳 없는 연인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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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달리다보니 42번 국도에 들어섰다. 이곳에서부터는 도로가 시원하게 뻥 뚫려 있다. 곧 눈앞 멀리 푸른 동해가 나타났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세찬 바람에 파도가 높아 보인다. 그래도 일행들은 빨리 바닷가에 내려서고 싶어 한다. 동해시 근처 바닷가에 차를 세웠다.

"우와~ 저 밀려오는 높은 파도! 멋지다 멋져!"
"정말, 저 하얀 포말 좀 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네요."
"바닷가에 서있는 저 젊은 커플 좀 봐, 참 멋지다, 우리들도 내려갈까?"

산골짜기 눈밭에서 동심에 젖었던 초로의 부부들이 이번엔 바다에 빠져든다. 누가 나이 들면 감정도 메마른다고 그랬나, 모처럼 다정한 친구 부부들이 함께한 동해 나들이어서 그랬을까? 일행들은 싸늘한 겨울바다의 추위도 잊은 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주책없는 낭만에 빠져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늘그막 백수들의 겨울여행'은 지난해 12월 20일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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