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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20년 만의 정치 대목을 맞아 여의도에 큰 장(場)이 들어서려 하고 있다. 12월까지 내내 이어진다니 사람들은 벌써부터 들떠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흉흉한 소문들만 떠돈다. 벌써부터 자리다툼으로 여기저기서 볼썽사나운 멱살잡이가 벌어지고, 모처럼 선을 보인 물건들도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안타까운 소문들이다.

그나마 아직 장이 선 것은 아니니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낯익은 간판 앞을 서성여보지만 그곳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어떻게든 발길을 잡아보려는 말들 속에서도 그저 제 잇속을 차리려는 장사꾼의 셈법이 읽힐 뿐이니 이러다가 정말 장이 서기도 전에 사람들이 발길을 끊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 여의도 정치판의 모습이 꼭 그렇다.

2012년 대한민국 권력에 스며드는 봄기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제라도 '공천 혁명'과 '야권 연대'를 이뤄낸다면 떠나려던 사람들의 발길을 돌려세울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길을 찾아야 할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길고도 모질던 겨울의 끝에 기다리던 봄이 오지 않는다며 절망하던 그 순간,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제법 잘 나가는 정치인의 남편이자 한참 선배인 판사의 되먹지 않은 청탁 사실을 용기 있게 털어놓은 어느 검사의 정직한 입에서부터, 남들이 다 아는 이야기조차 모른 척해야 했던 것이 부끄러워 마이크와 카메라를 내려놓고 주먹을 힘껏 말아 쥔 언론인들의 빈 손에서부터 봄바람은 불어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모든 시선이 입법 권력과 행정 권력을 둘러싼 두 번의 선거에 몰려있는 사이, 정작 국가 권력의 또 한 축을 이루는 '사법 권력'과 흔히 네 번째 권력이라 불리는 '언론 권력'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전에 없던 따뜻한 바람이.

이제 2012년은 단지 '두 번의 선거가 있는 해'가 아니다. 2012년 봄, 오랜 시간 꽁꽁 얼어있던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에 바야흐로 따뜻한 봄기운이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두 편의 영화와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된 변화

나경원 전 새누리당 의원과 남편 김재호 판사. 사진은 지난해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투표소로 향하는 모습.
 나경원 전 새누리당 의원과 남편 김재호 판사. 사진은 지난해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투표소로 향하는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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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사법 권력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이라는 두 편의 영화가 잇따라 선을 보이면서 부터였다. 세상이 알지 못했거나, 이미 기억 속에서도 흐려진 오래된 사건들이 이 정도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뜻밖이었다.

이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을 뿐, 오랜 세월 사법 권력이 멋대로 휘두른 칼에 상처 입은 국민이 그만큼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감싸주지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한 권력이면서도,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들에 대해서만큼은 앞뒤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달려드는 비열한 권력, 그것이 바로 이들 영화가 그려낸 대한민국 사법 권력의 본모습이었다.

최근 드러난 김재호 판사의 청탁 의혹은, 누군가에게는 아무리 절실한 상황에서도 가까이 하기 힘든 그 권력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전화 한 통만으로 얼마든지 손에 쥘 수 있는 하찮은 것임을 그대로 드러내주었다.

아직 사건의 실체가 모두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청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박은정 검사는 진술서에서 김재호 판사가 "(아내를 비난한 누리꾼을) 검찰이 기소하면, (그다음 문제는) 법원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한겨레, 3월 6일자 기사). 결국 지금까지 밝혀진 정황에 따르면, 김 판사는 마땅히 사법 기관 만큼의 독립성을 인정받아야 할 검사를 멋대로 움직여 기소를 이끌어낸 뒤, 역시 하나의 독립 기관인 다른 판사를 움직여 자신의 아내에게 피해를 준 누군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한 셈이다.

<헌법의 풍경>이란 책으로 잘 알려진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이처럼 대한민국 사법 권력의 독립성·공정성이 위협 받는 현실은 결국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간 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꼬집는다. '아는 사이'끼리 가볍게 전화 한 통 건네거나 밥 한 끼를 먹는 그 사소한 만남들이 디케가 손에 든 저울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뜻이다.

"절대로 가족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법조계입니다. 검사는 국가를 대신해서 범죄자와 싸움을 벌이는 존재입니다. … 판사는 거대 담론과 여론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법리에 의해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하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독립성입니다. 사법연수원 몇 기냐에 따라서 그의 위치가 좌우되는 풍토에서 독립성 보장이란 생각하기 힘듭니다." - <헌법의 풍경> 158쪽

"전화를 걸어 고발 경위를 설명했지만 기소 청탁은 하지 않았다"는 김 판사의 해명(<동아일보> 3월6일자 기사)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현직 판사인 김재호·나경원 부부는 자신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서기호·이정렬 판사와 백혜련·박은정 검사 등 몇몇 법조인들이 보여준 용기 있는 선택에도 사법 개혁·검찰 개혁의 불길이 안에서부터 타오르기만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이유다.

'대한민국 언론'이 벌이는 거대한 파업

MBC 노조가 지난 1월 말 총파업을 시작한 데 이어 최근 KBS와 YTN 노조도 공동 파업을 선언하고 나섰다. KBS 노조는 6일 새벽부터 총파업에 들어갔으며, YTN 노조는 오는 8일부터 사흘 동안 1차 파업을 벌일 것이라고 한다. 이미 투쟁을 시작한 <연합뉴스>도 7일 총파업 찬반 투표를 앞두고 있다. 가히 대한민국 언론 전체가 파업을 벌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한민국 언론 권력의 뿌리가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언론사들이 일찍이 없던 대규모 파업을 벌이는 이유는 잃어버린 '공정성'을 되찾기 위해서다. 최근 파업에 들어간 KBS 기자협회는 "정권에 예민한 뉴스를 회피하고 약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했다"고 반성하면서 "이젠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MBC 노조 역시 "내곡동 사저 축소보도, 서울시장 선거 편파보도, 4대강 등 현 정부 주요 실책에 대한 비판 외면 등 이루 열거하기 힘든 공정성 침해 논란이 있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회가 MBC 총파업과 현안 등에 대해 김재철 사장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을 예정인 가운데,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 앞에서 총파업 중인 MBC노조원과 김완태, 문지애, 신동진 아나운서가 김재철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회가 MBC 총파업과 현안 등에 대해 김재철 사장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을 예정인 가운데,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 앞에서 총파업 중인 MBC노조원과 김완태, 문지애, 신동진 아나운서가 김재철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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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언론사들의 공정성을 앗아간 것은 물론 이명박 정부다. 이 정부는 언론사주를 통해 언론사를 길들이는 방법을 택했다.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최시중을 방송통신위원장에 앉힌 것을 시작으로, 대선 특보였던 구본홍을 YTN 사장으로 앉히더니, 정연주를 몰아낸 KBS 사장 자리엔 이병순에 이어 대통령 방송전략실장이었던 김인규를, 그리고 엄기영이 물러난 MBC 사장 자리엔 친여 성향이 강한 김재철을 앉혔다. 방송의 공공성을 지켜내고자 했던 노조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렇게 대한민국의 언로는 하나 둘씩 막혀가기 시작했다.

일찍이 언론인 김중배는 1991년 9월 이른바 '김중배 선언'에서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인 제약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는 자본 권력이 국가 권력을 넘어서는 시대가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국가 권력에 맞서 언론인들과 함께 싸웠던 언론사주가 머지않아 언론인이 아닌 언론 자본으로서의 정체성을 띠게 될 것이란 뜻이기도 하다.

"신문 발행인의 자유가 끝없이 확대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본 일반을 대변하고 있고 자연스럽게 권력의 언론 통제보다 더 강한 언론사주의 통제력이 발휘되고 있지요. … 협의에 있어 언론 자본의 횡포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언론사 내에 언론 자유가 없다는 아이러니입니다." - <미디어오늘> 1997월 2일 24일자

그러나 끝없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던 대한민국 언론이 마침내 다시 일어서려 하고 있다. 비록 앞에 놓인 길이 그리 녹록치 않아 보이긴 하지만 길고도 깊었을 성찰의 시간 끝에 어렵게 첫발을 내딛었다는 점에서 이미 시작된 변화의 흐름을 거스르긴 쉽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정치의 존재 이유'를 보여줘야 할 때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볼썽사나워지는 자리다툼을 보면서 드는 궁금증 한 가지가 있다. 저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저들의 가슴 깊은 곳에는 지역민들을 위해, 또는 국민을 위해 꼭 해내야 할 그 무엇이 새겨져 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국회의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평생을 따라다닐 그 무수한 특권들이 탐나는 것일까. 솔직한 답을 얻을 길은 없지만,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나만큼이나 궁금해 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사법 권력과 언론 권력에 맞선 위태로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제 잇속 챙기기에만 바쁜 저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궁금증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서로에게 안타까운 일이다.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와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야권연대 협상을 위해 지난 6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와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야권연대 협상을 위해 지난 6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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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나마 '공천 혁명'과 '야권 연대'의 약속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람들이 표를 몰아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착각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어떤 길을 가고자 하는지, 그리고 그 길이 이명박 정부나 새누리당의 길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공천'과 '연대'는 그에 대한 답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고 새누리당과의 정책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마당에 과연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서민·복지 정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 또 그저 몇 마디 말로 전해질 그런 약속들에 사람들이 두터운 믿음을 보내줄지도 의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국민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정치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 그 곁을 지키는 일이 아닐까. 다가서기조차 두렵던 사법 권력과 검찰을 향해 국민들이 참아왔던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철옹성에 작지만 뚜렷한 균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뿐이 아니다. 긴 시간 눈과 귀를 닫은 채 침묵하던 언론인들이 모든 것을 걸고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그들의 결연함이 눈물겹다.

만일 이들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며 우리 사회에 정치가 필요한 이유, 개혁·진보 정당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아마도 실망하고 돌아서려던 국민들도 기꺼이 다시 마음을 보내줄 것이다.

민주통합당이 뒤늦게나마 "MB정부 4년 동안 자행된 방송장악, 언론장악 시도에 대해 종합적인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통해 실정을 파헤치고 책임자에게 엄정한 책임을 묻겠다"며 태도를 바꾼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말뿐인 약속, 19대 국회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약속만으론 부족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부디 들판에 외롭게 서있는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그들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토록 기다려온 2012년의 봄이 아닌가.


태그:#총선, #언론 파업, #사법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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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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